# 43
여러 번 와봤기에 굳이 안내를 받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한지호뿐 아니라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전담 직원이 붙는 게 알렉산드르의 원칙인 것 같았다.
이층으로 올라간 한지호는 복도 끝에 있는 방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살짝 앞서 움직인 미진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모든 게 갖춰진 넓은 방 안에는 이지은이 네일을 받고 있었다.
알렉산드르에 올 때마다 봤던 똑같은 광경이다.
그러나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한지호는 보는 이지은의 표정이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TV 속에서 종종 보여주는 환한 표정이 방 안의 분위기를 살렸다.
“오셨어요?”
“콘서트 잘 봤습니다.”
“덕분에 무리 없이 라이브를 소화했어요. 고마워요, 한 선생님.”
이지은이 직접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에 고루게 팬을 보유한 그녀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지호는 뿌듯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잠긴 성대를 풀었지만, 무리한 스케줄이 계속되면 다시 목이 안 좋아질 겁니다. 소속사에 말해서 스케줄을 조절해 달라고 하세요.”
“안 그래도 이번에 좀 따졌어요. 한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계속 목을 못 쓸 뻔 했으니까요. 앨범 활동 끝나면 스케줄도 좀 나아지겠죠.”
이지은의 목소리는 내내 하이톤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만큼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발랄한 표정의 이지은은 주위 공기를 화사하게 바꿔 놓았다.
꽉 막혔던 목이 풀리고, 시원한 고음을 회복한 게 그녀의 밝은 성격을 되돌려 놓은 모양이다.
한지호는 방 안의 다른 스텝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치료는 아니었다.
약재와 찻잎을 배합해 기력을 회복시키며 잠긴 목을 달랬고, 침도 세 번 밖에 놓지 않았다.
태자병이나 구음절맥 같은 천고의 난치병을 고쳤던 것에 비하면 치료 축에도 들지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작은 문제를 갖고 끙끙거리기 마련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커다란 병을 치료할 일은 드물다.
큰 병이 아니지만 환자 개인에겐 심각한 문제를 얼마나 잘 치료하느냐가 의사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그런 점에서 이지은의 고음을 회복시킨 건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참, 계좌번호 하나만 남겨주세요.”
네일을 받던 이지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지호가 오늘 알렉산드르로 온 건 치료의 대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프리랜서 한의사로 활동하는 그는 치료비를 정해 놓지 않는다.
병원이나 한의원처럼 치료비가 정가로 정해져있지 않다.
황만금을 고치고 난 뒤에는 치료비를 주는 대로 받았고, 김해수에겐 먼저 1억이라는 대가를 제시했었다.
상황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치료비를 받는 것이다.
이지은의 경우 가벼운 치료였기에 큰 대가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류층에 해당하는 인기 가수를 치료한 것이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치료비를 바라는 게 당연했다.
한지호가 괜히 1%를 위한 특별한 프리랜서 한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다.
가벼운 치료도 보다 확실하게 해주고, 대신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받겠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는 이지은은 과연 일주일 안에 고음을 회복시켜준 대가로 얼마를 생각하고 있을까.
호기심이 들었지만 여기서 표출할 수는 없었다.
한지호는 체면을 지키면서 한 발짝 더 나갔다.
“계좌 번호는 메시지로 보내겠습니다. 번호를 알려주시죠.”
“아… 좋아요.”
연예인들은 아무에게나 개인 번호를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지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 있는 코디의 안색이 변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한지호는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이지은의 개인 번호를 받았다.
그녀의 번호를 받아서 어디에 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연락이 가능한 번호를 교환했고, 한지호의 인맥에 누가 들어도 부러워 할 사람이 추가됐다는 게 중요한 수확이었다.
상류층과 거물, 연예인 인맥은 언제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한지호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지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계좌번호를 전송한 그는 자칫 날카롭게 느껴질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치료비는 지은 씨가 내는 겁니까, 아니면 소속사에서?”
다소 민감한 질문에 매니저 역할까지 맡은 코디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지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편하게 대답했다.
“회사에 말하니 난감해 하더라구요.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적정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하길래, 그냥 내가 내겠다고 했어요.”
“알겠습니다. 지은 씨의 트레이드 마크인 삼단고음을 스스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겠군요.”
한지호는 가벼운 도발을 얹어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이런 식의 대화법은 김해수가 주로 쓰는 것이었다.
소심한 사람은 불쾌해 하고, 통이 큰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는 화술(話術)이다.
한지호는 이지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했다.
그녀는 스무살 소녀답지 않게 호탕하게 웃으며 허리를 꺾었다.
손톱을 손질하던 네일 아티스트가 잠시 동작을 멈출 정도였다.
“아하하하! 정말 한 선생님은 재밌는 분이에요. 그렇죠. 제 고음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먹을 순 없죠. 안 그래도 김해수 선배님 매니저에게 물어봤는데 치료비를 어마어마하게 받으신다고 들었어요.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제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수준으로 대우해 드릴게요.”
“생각보다 화끈한 성격이네요, 지은 씨.”
“그럼요. 꿍한 성격으로 연예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요?”
한지호는 의외로 당돌한 면모를 보이는 이지은이 마음에 들었다.
TV 속에서는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음악만 좋아하는 귀여운 소녀로 포장 돼 있지만, 실제로는 스무 살 답지 않게 배포가 크고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또 문제가 생기면 연락 주세요. 지은 씨가 부르면 열 일을 제쳐 놓고 달려올 테니.”
“정말이죠?”
“빈말은 하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이제 한 선생님이 제 주치의가 되어 주시는 거예요.”
“영광입니다.”
한지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로 보아 이지은도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분명했다.
독보적인 여자 솔로 가수 이지은의 주치의는 매력적인 타이틀이다.
한지호는 자신을 소개할 커리어를 화려하게 채워 넣고 있었다.
평창동의 황만금을 시작으로 김해수와 이지은이라는 연예계 최고의 스타들이 그가 치료한 환자 리스트에 올랐다.
단순히 치료만 하고 끝난 게 아니라 지속적인 교류가 가능한 인맥이 됐다.
이제 막 출사표를 던진 29살의 한의사로선 상상하기 힘든 성과였다.
그는 이지은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간혹 이지은이 한의학적 지식을 물어보면 한지호가 설명을 해주고, 또 연예계에 대한 한지호의 물음에 그녀가 답해주는 방식이었다.
9살이라는 나이 차이, 그리고 완전히 다른 직업에도 불구하고 둘은 대화가 잘 통했다.
치료의 대가를 받으러 왔지만 뜻하지 않게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기회가 됐다.
이윽고 이지은이 스케줄을 위해 이동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또 연락드릴게요, 한 선생님. 꼭 아프지 않아도 연락해도 되죠?”
“그럼요.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이지은의 말이 단순한 인사인지 진심인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와 악수를 나눴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이지은의 아기 같은 작고 하얀 손이 인상적이었다.
한지호는 그녀와 함께 알렉산드르 샵 밖으로 나왔다.
이지은은 코디와 매니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커다란 스타크래프트 밴에 탔다.
집채 만한 밴을 보니 이지은이 연예인이라는 게 한 번 더 실감났다.
그사이 발렛 직원이 한지호의 A5 쿠페를 샵 앞으로 몰고 왔다.
한지호는 언제 봐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흘러넘치는 자신의 검은색 아우디를 타고 엑셀을 밟았다.
그는 자동차보다 빠른 속도로 상류층 사회의 중심부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
띠딩!
스마트 폰에서 효과음이 울렸다.
신사동 오피스텔에서 조기운을 기다리고 있던 한지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스마트 폰을 들었다.
그의 얼굴색이 바뀌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폰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가 한지호를 놀라게 만들었다.
- 3천만 원이 입금 되었습니다. -
은행 계좌 어플이 입금액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한지호는 화면을 눌러 누가 3천만 원을 보냈는지 확인했다.
입금자 이름에는 이지은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가 일주일 안에 고음을 회복시켜준 대가로 무려 3천만 원을 보낸 것이다.
한지호는 치료비의 액수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황만금으로부터 1억 원 수표와 신용증을 받았고, 김해수에게선 아우디 A5와 현금 3천만 원을 받았었다.
그렇기에 3천만 원이라는 액수 자체가 충격적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지은의 통이 얼마나 큰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태자병이나 구음절맥처럼 심각한 질병을 앓았던 게 아니다.
주어진 기한 안에 목 상태를 정상으로 만들기 까다로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망설임 없이 보낸 것이다.
한지호는 이지은의 인지도를 생각해 수백만 원 정도를 치료비로 예상했었다.
많이 잡아봐야 천만 원이 한계일 거라 생각했다.
사실 천만 원도 적은 돈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한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거금 천만 원을 선뜻 낼 수 있겠는가.
1% 상류층에 해당하는 인기 연예인이기에 그만큼을 기대한 것이지 상식적인 선에는 천만 원도 엄청나게 과한 치료비다.
그렇기에 현금 3천만 원은 기대 이상이었다.
우웅- 우우웅-
때마침 스마트 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방금 화끈하게 치료비를 입금시킨 이지은이 개인 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다.
번호를 교환한 후 처음 온 연락이었다.
의례적으로 번호만 주고받고 마는 게 아니라 이지은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한지호입니다.”
“한 선생님, 치료비 확인 하셨죠?”
“네. 생각보다 액수가 커서 조금 놀랐습니다.”
“한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제가 스스로 생각하는 삼단고음의 가치를 보겠다고. 그러니 아낄 수가 없었어요.”
“제가 밥이라도 거하게 사야겠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치료비는 연합 콘서트 끝나고 있었던 대학교 행사 출연료였어요. 고음이 회복되지 않았으면 행사에서 라이브를 못 했을 테니 그만큼은 온전히 한 선생님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조만간 야소녀 모임 있는데 한 번 나와 주시지 않을래요?”
“야소녀 모임이요?”
“아… 연예계 소식 잘 모르시는구나. 야생 소녀 모임이라구, 제 때로의 여자 아이돌 가수들이 모여서 만든 모임이에요. 뉴스에도 엄청 많이 언급 됐는데. 아무튼 한 선생님 이야기를 하니까 다들 보고 싶다고 난리가 나서요.”
“시간만 알려주시면 당연히 나가야죠.”
“그럼 날짜 잡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지은이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한지호는 자신이 다른 세계에 진입했음을 자각했다.
스무살 여자인 이지은의 행사 출연료가 3천만 원이다.
방금 전까지 3천만 원을 거액이라 생각했지만, 고작 행사 한 회 출연료라 생각하니 그리 크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과는 돈의 가치가 완전히 다른 세계.
차원이 다른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걸 자각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야 할 것 같았다.
한지호는 순식간에 3천만 원이 들어찬 잔고를 의식하지 않았다.
한 번의 치료로 웬만한 사람들의 일 년 연봉을 벌어들이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는 잔고를 확인하는 대신 스마트 폰으로 야소녀 모임을 검색해봤다.
- 야생 소녀 모임. 연예계 20대 초반 아이돌 가수들의 대표적인 사조직. 솔로 가수 이지은과 Fs의 멤버 크리스탈 등이 소속 되어 파티, 봉사 활동, 여행 등을 함께 한다. -
검색창 밑으로 야소녀와 관련된 결과가 끝없이 떠올랐다.
쉽게 말해 요즘 제일 잘 나가는 20대 초반 여자 가수들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 초대 받아 참석할 수 있는 남자는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돈이 많거나 명성이 높다고 해서 20대 초반 여자 가수들의 사적인 모임에 초대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야소녀 모임이라는 대어(大漁)가 낚시 바늘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인맥이 인맥을 낳고, 돈이 돈을 낳고, 또 명성이 명성을 낳는 화려한 선순환의 흐름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강남에 입성한 이후 대운(大運)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
-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