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사람들이 괜히 비싼 가격을 지불하며 압구정의 최고급 미용실을 찾는 게 아니었다.
시설부터 서비스, 분위기와 시스템 모든 게 차별화 돼 있었다.
그러나 아직 한지호에겐 이런 최고급 샵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마음 편히 찾아갈 수 있는 동네 블루클럽이 최고 같았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미진은 넓은 미용실 내부를 가로질러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은 탁 트인 일층과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복도 좌우로 방문들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층에서 머리를 하는 손님은 프라이버시를 완벽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로 협찬을 받는 연예인이나 한 번에 몇 백만 원에서 몇 천만 원짜리 회원권을 끊는 사모님들이 이층을 이용한다.
미진은 복도 안쪽 문으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지은아, 손님 오셨어.”
그녀는 여자 솔로 가수 중에서 원 탑으로 꼽히는 이지은과 친한 사이인지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
곧이어 방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언니.”
한지호는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TV와 라디오에서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삼촌팬을 홀리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담담한 듯 살짝 애교가 묻어나는 이지은의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실 한지호는 탑 스타인 김해수를 치료하고, 그녀와 뜨거운 시간까지 나눈 남자다.
그럼에도 아직은 연예인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끼이익-
미진이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은 샵의 전체적인 분위기처럼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전신 거울부터 메이크업 공간, 머리를 자르고 감을 수 있는 의자까지 없는 게 없었다.
여러 벌의 옷을 걸어놓고 갈아입을 수 있는 간이 탈의 시설도 마련 돼 있었다.
별도의 룸 안에 작은 1인 샵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이지은은 메이크업 의자에 앉아 네일 아트를 받는 중이었다.
자그마한 체구, 새하얀 피부, 쌍꺼풀이 없어서 오묘한 매력을 자아내는 이목구비까지.
TV에서 보던 그녀가 눈앞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녀는 미진과 함께 들어온 한지호를 발견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입니다.”
한지호는 다소 딱딱하게 첫 인사를 건넸다.
초면이기에 당연한 예의를 차린 것이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자유분방한 뮤지션인 이지은은 딱딱한 말투가 불편한 듯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렇게 찡그리는 표정마저 귀여워서 삼촌팬들이 봤다면 녹아 내렸을 것이다.
“제가 갑자기 보자고 해서 불편하세요? 하필 샵으로 불러서 죄송해요. 여기가 제일 편하기도 하고, 마침 시간도 비는 타이밍이어서.”
“아닙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구요, 헤헤.”
이지은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었다.
약간 푼수 끼가 섞인 그녀의 웃음에는 사람을 무장 해제 시키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역시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걸 그룹과 아이돌 틈새에서 이지은이 누리는 엄청난 인기는 거저 생겨난 게 아니었다.
통통 튀는 그녀의 매력은 잠깐 방심한 사이에 사람을 낚아챈다.
한지호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의 어린 여자라고 만만히 보면 큰 코를 다칠 것 같았다.
“김해수 씨를 통해 제 연락처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김해수 선배님 매니저랑 제 코디 언니랑 친한 사이여서 한지호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를 만나자고 한 건 몸이 불편하기 때문일 텐데, 여기서 진맥을 해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여기가 제일 편하기도 하구, 샵 언니들이 입이 무겁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기다리죠.”
한지호는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이지은이 네일 아트를 받고 있었기에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맥을 하려는 것이다.
독립된 룸 안에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이지은과 그녀의 코디, 그리고 네일을 하는 사람과 헤어 디자이너인 미진 모두 여자였다.
한지호는 네 명의 여자들과 한 방에 있는 게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김해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여자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대부분 걷어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여자들도 한지호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여자들의 수다는 끝이 없다.
이지은 역시 네일 아트를 받으며 보통의 20대 여자처럼 사소한 이야기로 깔깔거렸다.
이윽고 네일 아트가 끝났다.
그녀의 손톱을 아름답게 꾸며준 네일 담당이 방에서 나갔다.
이지은은 코디와 미진을 남겨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한 선생님.”
“오래 걸린 것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듣던 대로 정말 훈남이시네요. 아까 미진 언니랑 같이 들어오시는데 깜짝 놀랐어요.”
“감사합니다. 지은 씨도 실물이 더 예쁘네요.”
“그렇죠?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화면발이 더 잘 받아야 하는데.”
영락없는 20대 여자와의 즐거운 대화였다.
그러나 한지호는 이지은과 팬 미팅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이야기의 흐름을 커트하며 본론을 꺼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음…….”
다짜고짜 핵심을 찌른 한지호의 물음에 이지은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난기 많은 그녀도 한지호가 환자를 대할 때 뿜어내는 카리스마를 느낀 것이다.
“목이 안 좋아요. 성대결절은 아니라는데 이상하게 고음이 안 올라가서요. 그런 이야기를 우리 코디 언니가 다른 자리에서 했는데, 그걸 들은 김해수 선배님 매니저가 한 선생님 연락처를 준 거죠.”
“그렇군요. 성대결절이 아닌데도 고음이 안 올라간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고음을 못 올려도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창력으로 인정을 받은 솔로 가수에겐 치명적인 결함이다.
한편으로는 김해수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녀는 정확한 병명만 밝히지 않으면 자신의 이름을 마음껏 팔아도 된다고 말했었다.
뿐만 아니라 매니저를 통해 한지호를 알려주고 있었다.
소문이 빠른 연예계에서 한지호의 이름은 금방 퍼져 나갈 것이다.
김해수의 난치병을 고친 유능한 한의사로 소문이 나면 연예계에서 그를 찾는 사람이 늘어날 게 분명했다.
잘 나가는 연예인들 대부분이 상류층이기에 한지호가 원하는 고객층이 형성될 수 있다.
유건영이 소개해줄 플래티넘 홀딩스의 VIP 고객들 말고도 연예계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 할 계기가 생긴 것이다.
“진맥부터 해보죠.”
소파에서 일어난 한지호가 이지은에게 걸어갔다.
그는 이지은의 손목을 낚아채고 진맥을 시작했다.
무방비 상태로 앉아있던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다짜고짜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는 그에게서 박력이 느껴졌다.
“몸에서 힘을 빼고 편하게 있어요. 목젖을 만질 겁니다.”
“목젖이요?”
한지호는 이지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손가락으로 목젖을 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진동이 많은 정보를 전해줬다.
그녀의 맥, 호흡, 목젖의 움직임까지.
필요한 정보는 모두 손끝을 거쳐 머릿속에 입력됐다.
태자병이나 구음절맥에 비하면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문제다.
한지호가 이지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일주일 안에 원래대로 고음이 나오게 만들겠습니다.”
“네에? 정말 일주일 안에 그게 가능해요?”
“가능합니다. 기한을 넘기면 치료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완치가 되면…… 김해수 씨 매니저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제 치료비는 무척 비싼 편입니다.”
한지호는 당당하게 자신의 가치를 어필했다.
그는 황만금과 김해수를 치료하며 전생의 능력을 체화시켰고, 두둑한 배짱도 갖추게 됐다.
거물 두 명을 완치 시켰기에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공신력까지 얻은 셈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한지호는 상류층과 연예인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특별한 한의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9장, 연예계 명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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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자를 대표하는 솔로 가수 이지은이 앓고 있는 문제는 간단했다.
병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무리한 스케줄과 불규칙한 생활 습관으로 성대가 잠긴 것이다.
보통 체력적으로 혹사를 당하면 평소에 가장 많이 쓰던 부위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근육통을 느끼며 몸살을 앓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지은은 성대를 주로 쓰는 가수였다.
성대 역시 근육의 일종이다.
거듭된 오버 페이스에 그녀의 성대가 먼저 백기를 든 것뿐이다.
성대결절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에 양학으로는 딱히 치료할 방법이 없다.
푹 쉬면서 컨디션을 회복하는 게 최선의 치료법이다.
그러나 이지은은 계속해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장 큰 원인인 무리한 스케줄과 불규칙한 생활 습관을 개선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는 일주일 안에 고음이 터지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태자병과 구음절맥에 비하면 이 정도 문제는 난관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는 압구정 알렉산드르 미용실에서 이지은을 만난 날, 곧장 명징약초로 향했다.
명징약초에서 필요한 약초를 구해 특별한 한약을 조제하려는 것이다.
약초를 사서 신사동 오피스텔로 돌아온 한지호는 옷을 갈아입고 방에 들어갔다.
그는 세 개의 방 중에서 하나를 탕약실로 꾸며 놓았다.
청우단을 비롯해 각종 한약을 마음 편히 조제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게 또 여기에 쓰일 줄은 몰랐네.”
한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이 보관해둔 약초를 꺼냈다.
그의 손에 잡힌 건 다름 아닌 110년 수령의 천종산삼이었다.
김해수의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심마니 이원복에게 1억 원을 주고 샀던 바로 그 산삼이다.
산삼의 몸통이라고 할 수 있는 뇌두는 김해수를 위한 약을 만들 때 전부 사용했다.
하지만 워낙 큰 110년 수령 천종산삼답게 잔뿌리와 잔가지가 많이 남았고, 한지호는 그것들을 손질해 보관하고 있었다.
뇌두만큼의 약효를 기대할 순 없어도 천종산삼에서 나온 잔뿌리다.
언젠가 긴히 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지은이 나타난 것이다.
한지호는 잔뿌리의 절반을 꺼내놓고, 나머지 반을 다시 포장해 넣어뒀다.
절반으로도 원하는 약효를 내기에 충분하다.
그는 명징약초에서 사온 갖가지 약초에 천종산삼 잔뿌리를 섞어 약재를 달였다.
산삼 잔뿌리가 들어간 만큼 보양(補陽)에 탁월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물론 김해수에게 지어줬던 것처럼 극단적으로 양기가 강한 약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 김해수의 한약을 먹으면 과다한 양기로 부작용을 겪을 게 분명하다.
한지호는 이지은이 빠른 속도로 기력을 회복해 지친 성대가 힘을 차리게끔 적당한 보양 한약을 만들고 있었다.
천종산삼 뇌두가 남아 있었어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약이라고 무조건 좋은 효과를 내는 건 아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처방을 하고 약을 지어야 딱 알맞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한 배분과 조절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결국 한의사의 실력이다.
한지호는 천종산삼 잔뿌리와 다른 약초를 이용해 오직 이지은만을 위한 약을 달였다.
누구보다 섬세하고 정확한 진맥 결과를 바탕으로 완벽한 맞춤형 약을 짓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약(藥)과 차(茶)를 병행해서 시위 중인 이지은의 성대를 풀어줄 작정이었다.
약으로는 바닥까지 꺼진 기력과 컨디션을 회복하는데 중점을 뒀다.
그리고 매일 물 대신 차를 마시게 해서 꽉 잠긴 성대를 직접적으로 풀어주려는 것이다.
“오미자, 캐모마일, 돌배꽃. 이 정도면 완벽해.”
한지호는 자신이 준비한 재료들을 돌아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명징약초 사장 최치우는 다도(茶道)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한지호가 방문할 때마다 직접 우린 차를 대접하는 게 그의 취미다.
그렇기에 약초뿐 아니라 양질의 찻잎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오미자와 캐모마일, 돌배꽃은 모두 목과 기관지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
보통 다도를 즐기는 사람들은 한 가지 찻잎만을 이용한다.
여러 잎을 섞어 블랜딩을 하면 본래의 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다도를 즐기기 위해 차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철저하게 치료 목적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침없이 세 가지 다른 재료를 섞어 새로운 차를 블랜딩했다.
커피 원두나 위스키를 블랜딩하는 것처럼 찻잎도 제대로 블랜딩하면 색다른 향과 효능을 얻을 수 있다.
한지호는 마치 차를 다루는 바리스타가 된 것처럼 세 가지 찻잎을 섞었다.
이번에도 역시 배합과 비율이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섞는 건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할 수 있다.
한약을 만들 때 약초 배합과 비율이 중요한 것처럼 치료를 위한 차도 다르지 않다.
“이만하면 됐다.”
블랜딩을 끝낸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들여 만든 한약과 전통 차, 그리고 비장의 침술이면 이지은의 잠긴 목이 시원하게 열릴 것이다.
준비를 끝낸 한지호는 스마트 폰에서 이지은의 매니저 번호를 찾았다.
다시 약속을 잡기 위해서였다.
김해수에 이어 이지은까지, 한지호는 굵직한 스타들을 치료하며 연예계에 한의학 돌풍을 일으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