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그녀는 살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연예인이 아니라 여자로서도 가슴을 잃는다는 건… 거의 전부를 잃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거예요. 한 선생님은 남자라서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다는 아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이해합니다.”
“사실 안 좋은 생각까지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유 팀장님의 말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선생님을 만나게 된 거죠.”
“그 지푸라기가 결국 김해수 씨를 살렸네요, 하하.”
“알고 보니 지푸라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죠.”
김해수의 말에서 어떤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예계에는 얼굴에 분칠 하는 사람은 절대 믿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그만큼 연예인들이 감정을 숨기고 사람을 속이는데 능통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김해수가 보여주는 감정은 진짜였다.
한지호는 의원으로서, 또 한 사람의 남자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참, 전에 이야기한 치료비 말이에요.”
김해수가 화제를 돌렸다.
한지호는 구음절맥을 치료한 대가로 1억 원 정도를 원한다고 밝혔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쉽게 생각하기 힘든 액수다.
김해수는 나름대로 그 기준이 맞춰 고민을 한 것이다.
“갑자기 현금으로 1억을 준비하는 건 조금 힘들기도 하고, 또 그렇게 되면 단순한 거래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한지호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해수는 오랜 연예계 생활을 통해 만만치 않은 부를 축적했다.
듣기로는 이태원 지역에 빌딩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장 현금 1억을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자산은 해약을 하기 힘든 주식이나 펀드, 그리고 은행권에 묶여 있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황만금처럼 현금을 쌓아놓고 살아야 1억 원 수표를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있는 법.
그렇기에 한지호는 처음부터 현금으로 1억 원을 다 받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애초에 꼭 현금이 아니어도 된다는 단서를 달았던 것도 현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의사와 환자로 치료비를 주고받는 사이 이전에 한 선생님은 내게 잊지 못 할 은인이 됐어요. 그래서 나도 오래 오래 기억 될 선물을 하고 싶었어요.”
“어떤 선물을 준비했는지 엄청 기대되네요. 너무 속물 같은가?”
“아니에요. 기대를 해줘야 주는 맛이 있죠.”
김해수는 한지호의 솔직한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공개했다.
“받아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김해수가 한지호의 반응을 살폈다.
한지호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을 쳐다봤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예상을 뛰어넘는 선물이 김해수의 손바닥에서 그를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차 키?”
“맞아요. 마음에 들어요?”
“제대로 서프라이즈인데요!”
한지호는 눈을 크게 뜬 채 키를 건네받았다.
그는 자동차 브랜드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편이다.
또래 남자들처럼 차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해수가 준 차 키를 보자마자 어떤 브랜드인지 바로 알았다.
올림픽 마크와 비슷하게 겹쳐져 있는 동그라미 4개.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 아우디(audi)의 차 키였다.
김해수는 오래 기억 될 선물로 자동차를 선택했고, 현금 1억 원에 비해 부담도 적었을 것이다.
자동차를 구매하는 초기 비용은 얼마 들지 않고, 매달 나가는 요금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우디 A5에요. 한 선생님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우선 내 명의로 등록해놨는데 바로 이전해줄게요. 매달 나가는 차 값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처음 1년 보험료도 한 번에 내줄게요. 말 그대로 한 선생님한테 차를 선물하고 싶었어요. 이만하면 기억에 오래 남겠죠?”
“자동차라니… 아무리 오래 지나도 못 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작전 성공이네요. 아, 이게 다가 아니에요. A5는 6500만 원 정도 해요. 모자란 건 현금으로 입금할게요.”
김해수는 1억 원이라는 상징적인 가치를 지키려고 했다.
어설프게 에누리를 시도하지 않았다.
인상적인 선물과 함께 치료의 대가를 화끈하게 지불하는 모습이 과연 김해수다웠다.
한지호는 기대 이상의 선물에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1억 원을 원한다고 과감하게 말했지만, 이렇게 빨리 치료비를 받게 될 줄은 몰랐었다.
자동차에 현금 3천만 원이 추가로 생겼으니 계획하던 일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단 하나.
그가 약간 민망한 듯 턱 밑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해수 씨.”
“응, 말해요.”
“우선 면허부터 따야겠네요.”
“뭐라구요? 면허가 아직 없어요?”
“공부하느라 바빠서……. 얼른 면허부터 따겠습니다.”
운전면허가 없다는 말에 김해수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녀는 한지호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한 선생님, 이런 의외의 모습이 있었네요. 완벽하고 빈틈없는 남자인줄 알았는데.”
“면허야 금방 따면 됩니다.”
스으윽-
한지호가 말을 끝내기 전에 김해수가 성큼 다가왔다.
소파 옆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한지호를 쳐다본 것이다.
구음절맥에서 벗어난 그녀의 눈빛은 TV에 나오던 것보다 더 도발적이고 당차 보였다.
아우디 A5와 현금 3천만 원 말고도 줄 선물이 남아있는 것일까.
한지호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거세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치료를 위해 알몸으로 몸을 맞대고 방중술을 펼쳤을 때보다 훨씬 더 떨렸다.
그때는 철저하게 한의사로서 환자를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명의 남자와 여자일 뿐이다.
“병이 다 낫고, 내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한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김해수가 귀에 착 달라붙는 목소리로 유혹의 말을 흘렸다.
한지호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자체로 충분한 대답이라 여겼는지 김해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입술과 한지호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청담동 빌라의 거실에 놓인 소파는 웬만한 침대보다 크고 안락하다.
넓은 소파 위에서 한지호와 김해수의 몸이 어지럽게 얽혀들고 있었다.
한지호는 대한민국 최고의 섹시 스타가 뿜어내는 마력에 온몸을 맡겼다.
평생의 첫 키스, 그리고 키스보다 더 진하고 깊은 순간을 나누는 상대가 김해수라니!
전생을 각성한 후 그의 인생은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해졌다.
한지호는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에 적응해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두컴컴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현재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8장, 강남 스타일 (1)
“네, 여기로 계약할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바로 사무실로 가실까요?”
“조금만 있다가요. 혼자서 전망도 좀 보고 싶고. 10분 안에 밑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내려오십시오. 차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여러 곳의 오피스텔을 둘러본 한지호가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신사동의 고층 오피스텔을 선택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망, 다리 하나로 강북과 강남을 오갈 수 있는 지리적 요건, 그리고 가로수길과 청담동처럼 핫한 동네가 바로 근처라는 점까지.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물론 그만큼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넓은 거실과 부엌, 방이 3개나 되는 신사동 오피스텔은 웬만한 고급 아파트보다 더 좋았다.
한지호는 황만금에게 받았던 1억 원 중에서 남은 오천만 원을 보증금으로 삼았다.
보증금 오천만 원에 매달 내야하는 월세가 무려 300만 원이다.
한 달 월세가 웬만한 직장인의 월급과 맞먹는다.
그렇지만 신사동과 강남 일대 고급 오피스텔은 공실 없이 원활하게 거래가 이뤄진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기꺼이 고액 월세를 지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한지호도 매달 300만 원이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꾸준히 팔리는 청우단의 매출만 월 1000만 원 수준이다.
그는 서울의 중심인 강남에서 살고 싶었고, 편하게 약을 조제하기 위한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한강과 가로수길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오피스텔은 한지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좋다.”
한지호는 거실에 설치된 통유리 너머로 강남의 경치를 내려다봤다.
전망은 김해수의 청담동 빌라 못지않았다.
바로 앞의 한강 공원까지 보인다는 측면에서 청담동 빌라보다 뷰(view)는 더 좋은 것 같았다.
김해수의 청담동 빌라를 떠올린 한지호는 그날 일을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기억으로 마음 깊이 각인 된 그날의 추억.
구음절맥이 완치된 날, 김해수는 아우디 A5의 차 키와 3천만 원의 현금 그리고 만인의 선망을 받는 글래머러스한 몸을 한지호에게 선물했다.
남산의 특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둘 사이엔 미묘한 공기가 흘렀었다.
김해수는 누구보다 솔직한 여자였고, 구음절맥으로부터 해방되자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연애할 여유가 없어 모태솔로였던 한지호는 다른 사람도 아닌 김해수를 인생의 첫 여자로 갖게 된 것이다.
물론 단 하루 격렬한 사랑을 나눴다고 둘이 진지한 연인이 되는 건 아니었다.
연예계라는 험한 바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김해수는 평범한 여자와는 다른 사고관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한지호를 좋아하지만, 서로를 구속할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다고 먼저 밝혔다.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좋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자유로운 관계를 원한다고 말했다.
질척거리는 연애가 아니라 호의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관계. 마치 미국 드라마나 헐리웃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프리한 커플처럼 말이다.
제대로 된 연애조차 못해본 한지호는 김해수 덕분에 몇 단계를 훌쩍 건너뛰게 됐다.
사실 한지호에게도 자유로운 관계가 부담 없고 좋았다.
김해수라는 만인의 연인을 혼자 소유하고픈 마음이 들진 않았다.
그녀는 분명 매력적이고 아름답지만, 나만의 여자로 만들고 싶은 애틋함이 느껴지진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김해수를 만난 건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한지호는 그녀처럼 강남 중심에 자신의 공간을 마련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를 하며 이름을 알릴 작정이었다.
그의 귓가로 김해수와 나눴던 대화가 맴돌았다.
- 내 이름을 얼마든지 팔아도 괜찮아요. 대신 이미지에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는 자세한 이야기만 커트해준다면.
- 마이너스의 기준이 어디까지 입니까?
- 가슴에 흉측한 함몰과 반점이 있었다는 건 너무 디테일하잖아요? 현대 의술로 손쓸 수 없는 문제점, 이라고 대충만 말해도 알 사람은 다 알아들을 테니까.
- 알겠습니다. 적절한 선을 지키면서 김해수 씨의 이름을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나도 기회가 되면 연예계 지인들에게 한 선생님을 소개해 줄게요. 성형 부작용 같은 걸로 고민하는 친구들이 꽤 있어서.
- 그럼 정말 감사하죠.
- 난 한 선생님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아주 큰 인물이 되어야 내가 마음을 준 보람이 있겠죠?
- 나에게 김해수 씨의 마음을 준 겁니까?
- 글쎄.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우리.
소파 위에서 한바탕 격렬하게 서로를 갈구하고 난 후 옷을 벗고 나눴던 대화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한지호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대한민국의 노른자 땅인 강남에 깃발을 꽂은 것, 그리고 막강한 인지도를 지닌 김해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 어느 하나 쉽게 얻기 힘든 성과였다.
게다가 한지호의 품 안에는 아직 쓰지 않은 비장의 무기가 남아있다.
황만금의 인감도장이 찍힌 신용증은 언젠가 천군만마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한동안 오피스텔 유리창 너머 펼쳐진 강남과 한강을 바라본 한지호가 등을 돌렸다.
감상은 여기까지.
현실로 돌아가 진짜 서류에 사인을 하고 계약을 마무리 지을 차례였다.
오늘부터 가로수길 옆에 우뚝 솟은 최고급 오피스텔은 한지호의 울타리가 된다.
한 걸음 더 높이 올라선 그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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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진짜 상상 이상입니다, 형님!”
한지호의 새로운 오피스텔에 들어온 조기운이 탄성을 내질렀다.
강남 신사동에서 한강과 도심을 내려다보는 최고급 고층 오피스텔은 조기운에게도 신세계였다.
그는 변함없이 경외의 시선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이렇게 럭셔리한 오피스텔에 보금자리를 꾸민 그가 더 대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