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35화 (35/255)

# 35

한지호는 오늘도 청담동 빌라에 도착했다.

치료가 막바지에 다다라 염려할 게 없었다.

이대로 일주일 정도가 무사히 지나면 김해수는 구음절맥으로부터 해방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그녀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았다.

지난 번 만남에서 미묘한 뉘앙스로 말을 했기 때문에 기대가 됐다.

철컥-

마치 한지호를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아있는 김해수를 쳐다봤다.

워낙 자주 방문해서 남의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요?”

“좋아요, 아주.”

둘은 식상한 인사를 생략하고 바로 안부를 물었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

직접적으로 정사를 나누진 않았어도 알몸을 맞대고 방중술 치료를 한 이후 부쩍 거리감이 줄어든 것 같았다.

구음절맥으로 인한 증상이 빨리 나아지고 있다는 점도 둘을 가깝게 만들었다.

치료가 성공적일 때 의사와 환자는 더없이 좋은 사이가 된다.

반대로 치료 과정이 순탄치 않으면 원수가 되기 십상이다.

한지호와 김해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부드럽고 한편으로는 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침실로 올라갈까요?”

“아니, 그전에 잠시만요.”

복층 침실로 올라가려는 한지호를 김해수가 붙잡았다.

침을 맞기 전에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지호의 예상대로 오늘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죠?”

그는 짐짓 모르는 척 소파에 앉았다.

수많은 남자들이 선망하는 김해수와 같은 소파에 앉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김해수는 고개를 돌려 한지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완치 판정이 코앞에 온 거 맞죠?”

“그렇습니다. 일주일 안에 반점이 깨끗이 사라지고, 함몰됐던 부위도 살이 차오를 겁니다.”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어요. 산삼을 먹은 후 살짝 줄어든 반점이 그날 이후 급속도로 사라졌으니까요.”

김해수가 말한 그날은 방중술로 치료를 했던 때를 뜻한다.

서로 다른 성격의 세 가지 양기를 조합해 삼위일체를 이룬 치료법은 구음절맥을 잡는데 딱이었다.

환자인 김해수 스스로 확실한 차도를 느끼고 있으니 치료 효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완치는 시간문제일 뿐, 실질적으로 구음절맥을 치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해수는 고마움을 표시하며 미뤄둔 치료비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유 팀장님의 소개로 한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가슴만 흉측해진 게 아니라 괴롭게 죽어갔을 거잖아요.”

“해수 씨가 그렇게 괴로워하며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거죠. 적절한 시기에 나를 만난 걸 보면.”

“하늘이 도운 거겠죠?”

“그럼요.”

“자고 일어날 때마다 푸른 반점이 줄어들고, 움푹 파였던 곳에서 새살이 차오르는 걸 볼 때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에요. 진짜, 진짜 고마워요.”

“환자의 고맙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 같습니다.”

“말로만 고맙다고 할 수는 없죠. 이런 치료는 처음 받아봤고, 한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있을 순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대체 어떤 보답을 해야 할지 계산하기 힘들어요. 차라리 한 선생님이 원하는 걸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김해수는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구음절맥을 치료해준 한지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감사한 마음이 너무 커서 먼저 대가를 제시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이다.

한지호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김해수가 이런 식으로 원하는 걸 물어볼 수 있다고 한 번쯤 예상은 했었다.

평창동 황만금과는 경우가 달랐다.

거의 할아버지 연배인 황만금에게 먼저 요구 사항을 말하기는 어려웠었다.

게다가 황만금은 돈을 무기로 사람을 다루는데 이골이 난 인물이다.

한지호는 황만금 앞에서 일체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렇게 꾹 참은 결과 1억 원이라는 거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해수는 한지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고, 연예인이라 마인드가 열려 있기에 솔직하게 원하는 걸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천종산삼을 구입하는데 1억 원이 들었습니다. 김해수 씨가 선뜻 거액을 입금했고, 그 덕에 산삼을 구해 약을 지어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지호는 갑자기 산삼 이야기를 꺼냈다.

김해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원하는 치료비를 물어봤는데 아무 이유 없이 산삼을 언급하진 않았을 것이다.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 놓기로 마음먹은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김해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이 바라는 치료비를 알려줬다.

“구음절맥을 치료한 의술이 산삼만큼의 값어치는 한 것 같습니다.”

“1억 원을 원하는 건가요.”

“꼭 현금이 아니어도 됩니다만, 그에 준하는 치료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7장, 그녀의 선물 (2)

한지호는 당당하게 1억이라는 숫자를 불렀다.

예전에는 차마 상상도 못하던 액수였다.

한의사가 치료비로 1억 원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알려진 케이스가 단 한 건도 없을 것이다.

최첨단 현대 기술로 암이나 희귀병을 수술을 해도 치료비가 1억까지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황만금의 태자병도 그랬고, 김해수의 구음절맥 역시 현대의학으로는 손을 쓸 수 없었다.

희소성은 높은 가격을 낳기 마련이다.

오직 한지호만이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것이라면 1억도 무리가 아니다.

황만금을 치료하면서 스케일이 커진 한지호는 자신의 의술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깨달았다.

그렇기에 1억 원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김해수는 살짝 당황한 모양이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천종산삼을 구입하기 위해 1억을 입금하면서 내성이 생긴 탓일까.

물론 그녀에게도 1억 원은 쉽게 쓸 수 있는 액수의 돈이 아니다.

하지만 한지호가 아니었다면 구음절맥은 기필코 김해수가 지닌 아름다움과 목숨을 동시에 빼앗아갔을 것이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의사들이 포기했던 증상이 한 선생님 덕분에 낫고 있어요. 그러니 1억이 아깝지는 않아요.”

연예계 안팎에서 화끈하기로 소문난 김해수는 1억이라는 숫자 앞에서 째째하게 굴지 않았다.

한지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김해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준을 제시해줘서 고마워요. 한 선생님이 만족할 수준으로 맞춰 볼게요.”

“그럼 이제 침실로 올라갈까요? 침을 맞을 시간입니다.”

“그 침, 정말 아픈데…….”

“몇 번만 더 맞으면 끝날 겁니다. 조금만 참아요.”

한지호는 치료비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엄살을 피우는 김해수를 장난스럽게 달래며 복층 침실로 올라갔다.

그는 치료의 대가로 원하는 바를 분명히 밝혔고, 김해수도 한지호의 의술이 그만한 가치를 지녔다는 걸 인정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굳이 정확한 액수와 지불 시점 등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하는 건 한지호의 위신을 깎아먹는 일이다.

상류층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 명예와 체면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 앞에서 계산기를 들이밀고 업자 같은 모습을 보이면 동등한 위치로 인정받을 수 없다.

적절한 기준을 제시한 뒤에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황만금이 선뜻 1억 원 수표를 건넸던 것처럼 VIP를 자처하는 이들은 절대 경우 없이 굴지 않을 것이다.

의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알아보고 상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침실로 들어간 한지호는 김해수의 새하얀 등에 정성스레 침을 놓았다.

언뜻 살펴본 그녀의 가슴은 원래의 아름다움을 거의 되찾은 것 같았다.

한지호가 상류층의 인정을 받는 비밀스러운 의원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사실을 김해수의 풍만한 가슴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

- 한 선생님, 오늘 청담동으로 와줄 수 있나요?

잠에서 깬 한지호는 김해수의 메시지를 읽었다.

밤새 그녀가 문자를 보내놓은 거시다.

금방 가겠다고 답장을 한 그는 얼른 샤워를 마쳤다.

택시에 몸을 싣고 청담동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평일 오전 시간이라 연남동에서 청담동까지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현관에서 벨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탄 한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해수가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낸 적은 없었다.

혹시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던 것일까.

한지호는 황만금의 전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태자병이 완치되기 직전, 황만금은 질병의 회광반조 현상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그때처럼 구음절맥이 다 나아가는 시점에서 김해수가 이상 반응을 겪지 말란 법도 없었다.

딩동-

벨을 누른 한지호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짧은 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만약 김해수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음절맥이 회광반조 현상을 일으켰을 때 쓸 대처법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덜컥!

그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김해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환한 웃음으로 한지호를 맞이했다.

“왔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한지호는 김해수를 보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밝은데 무슨 일이 있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이상했다.

집으로 들어선 한지호는 신발을 벗고 다시 물어봤다.

“몸에 이상이 생겼나요? 설마 푸른 반점이 늘어나거나 그런…….”

심각한 한지호의 말에 김해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한지호를 안심시켰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다 나았어요.”

“네?”

“어제 밤에 남아있던 푸른 반점이 모두 없어졌어요! 그리고 함몰되었던 부위도 완전히 회복 됐죠!”

김해수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녀는 이상이 생겨서 문자를 보낸 게 아니었다.

구음절맥 증상이 완전히 치료 되어서 제일 먼저 한지호에게 소식을 알린 것이다.

한지호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넓게 벌리며 환호성을 질었다.

“잘 됐다! 진짜 잘 됐어요!”

“그렇죠?”

김해수가 한지호의 양 팔 사이로 파고들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포옹이라서 어색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한지호는 품에 들어온 김해수를 꽉 안아줬다.

완전하게 회복된 그녀의 가슴이 묘한 감촉으로 품안에 와 닿았다.

구음절맥이 완치됐다는 기쁨은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한지호는 의사로서 또 하나의 산을 넘어섰고, 김해수는 연예인으로서는 물론이고 한 명의 여자로서 생명이 끝날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강렬한 환희가 잦아들자 떠나갔던 어색함이 돌아왔다.

서로를 안고 있던 둘은 머뭇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그만.”

“아닙니다. 그리고 완치 된 것,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모두 한 선생님 덕인걸요.”

“오늘은 샴페인이라도 터트려야겠는데요?”

한지호가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김해수는 정말 샴페인을 터트리려는 듯 부엌으로 갔다.

“잠깐만 앉아있어요.”

그녀의 말을 따라 소파에 앉은 한지호는 심장이 기분 좋게 뛰는 걸 느꼈다.

드디어 구음절맥을 완전히 물리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김해수를 품에 안아서인지 모를 일이다.

곧이어 김해수가 샴페인과 잔을 들고 거실로 왔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그녀는 투명한 글라스에 샴페인을 따랐다.

술에 대해 잘 모르는 한지호도 익히 들어본 샴페인이었다.

돔 페리뇽(Dom Perignon).

샴페인의 제왕이라 불리는 귀족적인 술이 잔을 가득 채웠다.

한지호와 김해수는 가볍게 건배를 했다.

“축하해요.”

“고마워요.”

짧은 말로 진심을 나눈 둘은 축배를 들었다.

입안을 맴돌고 목으로 넘어가는 샴페인이 이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밤 새 잠을 못 잤어요.”

“어젯밤에요?”

“네. 처음 가슴에 반점이 생겼을 때가 생각나서요.”

샴페인 잔을 내려놓은 김해수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지호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푸른 반점이 돋아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두가 움푹 함몰 됐죠. 그때 느꼈던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최고의 의사들에게 찾아갔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만 지겹도록 들었고…….”

“여배우로서 참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반점이 가슴 위로도 퍼지면 내 배우 인생은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보니 우스워졌어요. 겨우 가슴 하나에 의지해서 탑 여배우 노릇을 해왔다는 게 말이에요.”

“김해수 씨가 글래머 스타로 유명해졌지만, 출중한 연기력이 뒷받침 됐으니 지금처럼 롱런하는 거죠.”

한지호는 과장되지 않은 말투로 김해수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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