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31화 (31/255)

# 31

김해수는 하얀 박스를 뜯어서 약을 한 포 꺼냈다.

보기에는 일반적인 한약과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걸어가 컵에 약을 따랐다.

박스 안에는 대략 60포의 한약이 들어 있었다.

산삼 가격만 1억 원이고, 다른 약재도 들어갔으니 어림잡아 한 포에 200만 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웬만한 대기업 회장들도 쉽게 못 먹을 약이었다.

“후우-. 약이 생각보다 쓰진 않네요?”

부엌에서 산삼으로 만든 약 한 포를 마시고 온 김해수가 말했다.

한지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산약이 들어가 쓴맛이 조금 잡혔을 겁니다.”

“산삼을 다루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던데, 한 선생님이 고생했겠어요.”

“무엇보다 최상품의 산삼을 빨리 구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하늘이 김해수 씨를 치료하라고 도운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아, 산삼 가격이 1억 원이면 다른 약초 값과 조제 비용은 어떻게 하죠?”

“일체의 비용과 치료비는 구음절맥이 나은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나를 믿고 1억이라는 거금을 선뜻 보내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한지호의 말에 김해수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역시 한 선생님은 보통 남자가 아니네요.”

“네?”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는 남자들은 거물이 못 되죠. 확실한 결과를 낼 거라고 자신하니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 연예계 대형 기획사 사장들과 비슷한 면이에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칭찬 맞아요. 분야는 달라도 대형 기획사 사장들 못지않은 그릇을 가진 남자로 보이니까.”

한지호는 김해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특히 남자에게 미녀의 칭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리품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섹시하다고 정평이 난 여배우가 칭찬을 해주는데 무덤덤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김해수는 구음절맥으로 유두와 가슴 아래 부분이 보기 흉측해졌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에서 뿜어지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한지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묘하게 웃는 그녀에게 매혹당할 뻔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주유의 아내인 소교 역시 천하절색의 미녀였다.

그럼에도 규호는 그녀를 철저히 환자로만 대했었다.

적어도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는 규호의 칼 같은 정신무장을 본받을 필요가 있었다.

“올라가시죠.”

그가 표정을 고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김해수는 뭔가 아쉬운 듯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나 길게 미련을 두지 않고 거실에 있는 계단을 거슬러 복층으로 올라갔다.

김해수를 따라 계단을 올라간 한지호는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청담동 전경을 쳐다봤다.

럭셔리의 상징과 같은 청담동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빌라가 자꾸 욕심이 났다.

탑 클래스 연예인이나 재벌 2세가 아니면 살기 힘든 프라이빗 빌라를 원하게 된 것이다.

‘욕망은 잠시 눌러두자. 구음절맥을 치료하고, 한 계단씩 위로 올라가는 거야.’

한지호는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번듯한 럭셔리 빌라에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해수를 완벽하게 치료해야 한다.

그가 침실 안으로 들어서니 그녀는 이미 상의를 벗고 엎드려 있었다.

흉측하게 함몰되고 반점이 생긴 가슴 대신 매끈한 등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엎드려 있어도 옆으로 삐져나온 풍만한 가슴은 무서울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다잡은 한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번처럼 아플 겁니다. 참으세요.”

“그럴게요.”

침을 꺼낸 한지호가 미리 경고를 했다.

지난 번 침을 놓을 때는 내내 울려 퍼진 김해수의 신음 소리에 꽤 당황스러웠었다.

왠지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시작합니다.”

신호를 준 한지호가 그녀의 새하얀 등에 침을 놓았다.

꾸욱-

첫 침이 피부를 뚫고 깊이 꽂혔다.

혈도를 자극해 음기를 억누르는 만큼 침이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김해수는 처음 침을 맞을 때와 달리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한지호는 정신을 집중한 채 두 번째 침을 연달아 놓았다.

꾸우욱!

“으음-.”

이번에는 전과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침술의 통증을 참지 못해 흘리는 약한 비명이다.

하지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소리는 야릇한 신음처럼 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해수가 내는 신음 소리다.

70살이 넘은 노인도 평정심을 잃고 집중이 깨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한지호는 무감정한 얼굴로 침을 놓는데 신경을 기울였다.

“계속 갑니다. 조금만 더 참아요.”

아이를 달래듯 느릿하게 말한 한지호가 손을 바삐 움직였다.

꾸욱, 꾸우욱-

가늘고 긴 침이 그녀의 살갗을 꿰뚫고 혈도를 자극했다.

산삼으로 만든 열양(熱陽)의 결정체인 한약, 그리고 음기를 억누르는 침술이 더해져 구음절맥과 싸울 것이다.

“으으음…….”

김해수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방음이 완벽하게 되는 프라이빗 빌라여서 다행이었다.

만약 옆집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100% 오해를 했을 것이다.

침을 다 놓은 한지호는 그녀의 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겠습니다.”

“알겠어요. 이 침술은 적응이 잘 안 되네요.”

“평범한 한의원에서 대충 놓는 침과는 다르니까요. 혈도를 깊이 자극하기 위해 통증이 수반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해준다던 다른 치료법은 뭐죠?”

김해수가 한지호의 말을 기억하고 엎드린 채 다른 치료법을 물어봤다.

한지호는 침술로 음기를 억제하고, 산삼으로 약을 지어 먹은 뒤 마지막 치료법을 거쳐야 구음절맥이 낫는다고 말했었다.

천종산삼을 구해 약을 지었으니 마지막 치료법에 대해 설명할 차례였다.

그는 엎드린 김해수의 얼굴 옆면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산삼으로 지은 약을 절반 이상 먹은 뒤 마지막 치료법을 실행할 겁니다.”

“대체 어떤 치료법이기에 늘 당당한 한 선생님이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궁금해지네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오해 안 할게요.”

“남자의 원초적인 양기를 주입해 몸 안에 쌓인 산삼의 기운을 왕성하게 끌어내서 구음절맥의 음기를 완전히 터트려야 합니다.”

“남자의 원초적인 양기? 그 말은 설마…….”

“일종의 음양교합이 필요한 거죠.”

김해수는 음양교합(陰陽交合)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남녀가 몸을 섞어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사자성어였다.

엎드린 김해수의 안색이 붉어졌다.

음양교합이라는 말을 내뱉은 한지호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묘한 침묵이 김해수의 침실을 휘감았다.

5장, 뜨겁고 뜨겁게 (2)

“한 선생님이 어떤 말을 해도 믿었어요. 눈앞에서 퉁퉁 부은 손을 치료하는 걸 봤고, 내 가슴을 본 뒤에 병명을 말하며 고칠 수 있다고 자신한 사람도 한 선생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1억 원을 보낸 거죠. 하지만 음양교합이라니…….”

침묵을 깨고 입술을 달싹인 김해수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지호는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침을 뽑고 다시 이야기하죠.”

“알겠어요.”

잠깐의 시간이 더 흐르고, 한지호는 김해수의 등에 놓인 침을 회수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헐렁한 박스 티셔츠를 입었다.

루즈한 핏의 셔츠라 김해수의 목선과 어깨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한지호를 바라봤다.

침을 케이스에 넣고 서있는 그를 똑바로 마주본 것이다.

“마지막 치료법이 음양교합이라고 했나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그러니까…….”

한지호는 말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치료를 위한 것이라 해도 음양교합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말을 빙빙 돌려봤자 시간낭비일 뿐이다.

마음을 먹는 한지호가 설명을 시작했다.

“본래 음양교합은 남녀가 몸을 섞을 때 쓰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섹스. 맞죠?”

“맞습니다.”

김해수는 도발적인 단어 선택으로 한지호를 자극했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일반적인 남녀의 섹스로는 서로의 양기와 음기를 교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방중술을 익히고 운우지락을 나누면 남자는 양기를 보내고, 여자는 음기를 보내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완벽한 관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황제내경과 소녀경 등에 이 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침술과 산삼으로 내 몸에 들어온 양기를 증폭시키기 위해 음양교합으로 남자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 이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한지호가 굳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김해수도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구음절맥은 사람이 타고나는 체질입니다. 침술과 산삼으로도 음기를 태울 수 있지만, 마지막에는 똑같은 사람의 양기가 들어가야 구음절맥이 힘을 못 쓰고 누그러질 겁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치료법이네요.”

“구음절맥이라는 이름도, 피부가 함몰되고 푸른 반점이 돋아나는 증상도 처음 들어보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건…….”

정곡을 찔린 김해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구음절맥 자체가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지호의 치료법을 무조건 몰상식하다고 판단하긴 힘들었다.

애초에 상식의 영역을 벗어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당혹감으로 붉게 물든 김해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음양교합은 김해수 씨 말처럼 섹스를 뜻합니다. 하지만 꼭 몸을 섞지 않고도 비슷한 방법으로 양기를 주입할 수 있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방중술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라면 맨살을 맞댄 상태만으로 원천의 양기를 주입하는 게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섹스를 하지 않고 맨살만 맞대서 음양교합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죠?”

“방중술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어디서 찾을 수 있어요?”

“이런 타이밍에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겠지만, 지금 여기에 서있습니다.”

“한 선생님이? 방중술을?”

김해수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한지호는 내심 민망함을 느꼈지만 별 수가 없었다.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방중술을 익힌 남자가 직접 맨살을 맞대고 양기를 주입하는 것.

아니면 두 사람이 진짜 음양교합을 할 때 한지호가 옆에서 지도를 해서 양기가 주입되도록 돕는 것.

전생의 규호는 주유와 소교가 음양교합을 할 때 바로 옆에서 방중술을 알려주며 양기가 주입되게 만들었었다.

무척 남사스러운 일이지만 소교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주유와 소교는 부부지연을 맺었고, 일전에 오나라 장수 주태를 살렸던 규호를 믿기에 망설이지 않고 지시를 따랐었다.

당연히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주유는 당초 약속대로 제갈공명을 죽이지 않고 돌아가게 내버려 두었다.

한지호는 전생에서 규호가 소교를 치료한 방법을 알기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확신에 찬 말투로 김해수에게 제안을 했다.

“산삼으로 지은 약을 매일 먹어 보세요. 벌써 두 번 침을 맞았으니 약을 꾸준히 먹으면 푸른 반점이 조금 줄어들 겁니다. 아무 효과가 없으면 내 치료법이 잘못 됐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김해수 씨 스스로 효과를 느낀다면 내 방법이 맞다는 뜻입니다. 그때 결정하세요. 음양교합의 원리를 이용한 마지막 치료를 받아들일지 말지.”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치료 경과를 살펴보고 직접 판단을 내리라는 말이다.

한지호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일단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약을 꼬박꼬박 먹으면서 경과를 지켜볼게요.”

“그럼 오늘은 침술 치료도 끝났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 나갈게요. 고생 많았어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한지호는 구질구질하게 더 많은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렸다.

김해수를 남겨둔 채 청담동 빌라 밖으로 빠져나온 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주사위는 던져졌어.”

오래된 명언을 곱씹은 그는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침술로 혈도를 자극했고, 110년 수령 천종산삼으로 약을 지었으니 김해수의 가슴에 난 푸른 반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한지호는 그녀가 반드시 연락을 해올 거라 믿었다.

이제껏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기에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치료 경과를 확인한 김해수가 연락을 하면 방중술에 근거하여 양기를 주입할 일만 남았다.

전생에 이어 또 다시 마주한 구음절맥의 뿌리를 잘라버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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