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8화 (28/255)

# 28

“사흘에 한 번, 그래요. 산삼이 빨리 구해졌으면 좋겠네요.”

“산삼으로 약을 짓고, 치료를 위해 또 다른 방법을 써야 합니다만……. 그건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 것 같군요.”

“한 선생님이 편한 대로 하세요. 난 그냥 따를 뿐이니까요.”

김해수는 똑같은 말을 해도 묘한 뉘앙스를 담을 줄 알았다.

연예계에서 섹시 스타로 살아남으며 배인 버릇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묘한 말투는 남자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한지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침을 뽑았다.

‘구음절맥을 타고난 여자는 경국지색이지만, 그만큼 남자의 팔자를 피곤하게 만들지. 매력적인만큼 위험한 여자야.’

침을 뽑아 케이스에 갈무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사흘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전에 산삼이 구해지면 바로 연락을 드리죠.”

“오늘 고마웠어요.”

김해수는 침대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오금희 조공을 결합해서 펼친 침술의 여파가 몸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누워 있는 김해수를 남겨두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이로서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한 여정에 첫 발을 내딛었다.

김해수의 구음절맥을 낫게 하는 날, 그는 거물 투자자인 황만금에 이어 한국 최고의 연예인까지 치료한 한의사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1% 상류층이 앞 다퉈 찾는 은밀한 명의로 발돋움 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

청담동 빌라에서 나온 한지호는 명징약초 최치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후배가 캤다는 산삼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 자넨가?”

전화기 너머에서 최치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언제나처럼 반갑게 한지호를 맞이했다.

직접 찾아가지 않고 전화를 걸었을 뿐인데도 한지호를 향한 호감이 느껴졌다.

“최 사장님, 전에 말씀하신 산삼이요.”

“안 그래도 후배 녀석이랑 약속을 잡으려 하고 있었네. 그 녀석이 지금 경기도로 올라왔다더군.”

“잘 됐네요. 가능한 빨리 산삼을 볼 수 있을까요?”

“구경만 하려던 거 아니었나? 갑자기 관심이 생긴 겐가?”

“최상품의 산삼이 필요해졌습니다.”

“잘 됐네. 그렇다면 시간을 끌지 말고 바로 약속을 잡으면 되겠구만. 안 그래도 녀석이 산삼을 아무에게나 처분하기 싫어했으니 자네라면 주인이 되기에 안성맞춤일 걸세.”

“저는 언제든 괜찮으니 약속을 잡고 연락 부탁드릴게요, 최 사장님.”

“금방 다시 전화 걸겠네. 조금만 기다리게.”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길에서 멈춘 채 생각을 정리했다.

최치우의 후배가 캐낸 산삼이 최상품이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최상품이 맞아도 심마니들은 아무에게나 산삼을 팔지 않는다.

평생 몇 번 캐기 힘든 제대로 된 산삼일수록 더욱 까다롭게 구매자를 고른다.

그들에게 산삼은 단순히 돈을 받고 파는 물건이 아니라 인생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심마니 중에 괴짜와 기인이 많은 것도 그래서이다.

심산유곡을 헤매며 산삼을 캐는데 목숨을 바친 심마니들은 세상의 기준과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한지호는 이름난 약초꾼 출신인 최치우를 사로잡은 것처럼 심마니의 마음도 얻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곳에도 연락을 해둬야겠어.”

그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스마트 폰에서 다른 연락처를 찾았다.

교토삼굴(狡?三窟)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교활한 토끼는 도망갈 굴을 최소 세 개는 마련한다는 말이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미리미리 다양한 방편을 준비한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그처럼 한지호 역시 명징약초 최치우의 후배에게만 기대를 걸고 있을 순 없었다.

구음절맥 치료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김해수의 가슴 아래를 점령한 푸른 반점이 전신으로 퍼지면 손을 쓰기 어려워진다.

하루 빨리 최상품의 산삼을 구해 약을 지어야 한다.

그는 번호부에서 연락처 하나를 찾고 통화 버튼을 누를지 망설였다.

번호의 주인은 다름 아닌 K대 한의학과 교수인 김영찬이다.

김영찬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교수로 임용 돼 한의대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국내 한의학계에서 김영찬의 가족들은 로열 패밀리로 불린다.

그의 아버지가 K대 한의학과의 전임 학과장이었고, 직계 가족들 모두 대형 한방 병원의 원장이기 때문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레드 카펫을 밟으며 교수가 된 김영찬은 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가 챙기는 소수의 학생들은 대부분 좋은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한지호는 제법 우수한 성적을 내는 학생이었지만 김영찬의 안중에도 들지 못했었다.

고아라는 출신 성분은 김영찬의 기준에 턱도 없이 모자라는 것이다.

한지호가 선뜻 전화를 걸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도 대학 생활 내내 김영찬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냉소와 무시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김영찬은 국내에 유통되는 최상품의 산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능력자다.

가능한 많은 경우의 수를 대비해 놓아야 한다.

한지호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삐이이- 삐이이이-

무미건조한 통화 연결음이 한참 울렸다.

김영찬이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

한지호가 스마트 폰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전화기 너머에서 오랜만에 듣는 음성이 울렸다.

“여보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한지호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한지호?”

“네. 07학번 한지호입니다.”

“아……. 누군지 알겠군. 그래, 무슨 일이지?”

전화기 너머 김영찬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제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다.

마치 스팸 전화라도 받은 것처럼 귀찮아하는 티가 역력했다.

한지호는 개의치 않고 용건을 말했다.

“최상품의 산삼을 구하고 싶은데 특별히 아는 루트가 없어서요. 교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어 전화를 드렸습니다.”

“최상품의 산삼?”

한의사들 사이에서도 산삼은 자주 다뤄지는 약초가 아니다.

그만큼 귀하고 비싼 것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김영찬 목소리가 변하는 걸 느꼈다.

아주 약간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네. 갑자기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교수님.”

“최상품의 산삼을 구한단 말이지? 아무튼 지금은 다른 일이 있으니 다시 전화를 걸지.”

“알겠습니다.”

김영찬은 별다른 인사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지호는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으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는 산삼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작정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김해수의 구음절맥을 치료하는 것이 최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나타난 구음절맥.

한지호는 소교를 치료했던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4장, 심마니와 산삼 (1)

김해수에게 침을 놓고 온 다음날, 한지호는 설레는 기분으로 자취방을 나섰다.

최치우의 후배가 산삼을 들고 명징약초로 왔기 때문이다.

산삼으로 약을 짓기 전까지는 사흘마다 침술로 음기를 억눌러야 한다.

오금희 조공의 화기가 가미된 침을 오래 맞으면 부작용이 타나날 수 있다.

인위적인 불의 기운이 과하게 주입 되어 좋을 건 없다.

그러니 김해수를 위해서 최대한 빨리 산삼을 구해 약을 지어야 한다.

경동시장으로 가는 길, 택시 뒷좌석에 앉은 한지호는 주머니 속 스마트 폰의 진동을 느꼈다.

우웅- 우우웅-

“최 사장님인가?”

별 생각 없이 스마트 폰을 꺼낸 한지호의 동공이 커졌다.

화면에 김영찬 교수님이라는 글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제 잠깐 통화를 하고 연락이 없던 김영찬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한지호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07학번 한지호. 맞지?”

“맞습니다.”

“어제 최상품 산삼을 구하고 싶다고 했었지.”

“네, 교수님께서 도와주시면…….”

“너. 내가 알아보니 공보의 마치고 소속도 없던데. 어느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

김영찬의 말투는 무척 공격적이었다.

마치 취조를 하는 경찰처럼 날카롭고 딱딱한 어조였다.

대학 시절 내내 무시 아닌 무시를 받았던 한지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뜬금없지만 예전 제자로서 정중하게 부탁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취조를 당하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냥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자리도 못 구한 주제에 최상품의 산삼을 찾는다고? 살 능력은 있고? 아니면 어디 호구를 잡아서 산삼이라도 팔려는 건가?”

“교수님,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괜히 학교 이름 내세워서 약이나 팔고 다니려는 거 아니냔 말이다. 모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행동 똑바로 하고 다니도록!”

삐이-

일방적으로 할 말을 마친 김영찬이 전화를 끊었다.

하루가 지나 전화를 걸어 한다는 말이 저주에 가까운 충고였다.

한지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김영찬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대학 시절보다 더 노골적으로 한지호를 무시하며 수모를 줬다.

산삼을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은 그리 큰 부탁이 아니다.

김영찬의 위치에서는 얼마든지 손쉽게 알아봐줄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한지호가 좋은 집안 출신에 총애를 받는 제자였다면 김영찬이 이런 태도를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조만간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실 겁니다, 김 교수님.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드리죠.’

한지호는 김영찬의 얼굴을 떠올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각오나 다짐 정도가 아니었다.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인 김영찬도 함부로 대하지 못 할 거물이 되어 K대를 찾아갈 것이다.

그는 택시가 경동시장에 도착할 때까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택시가 길가에 멈췄고, 경동시장 앞에 내린 한지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김영찬 때문에 치밀어 오른 화를 가라앉히기 위함이다.

명징약초에선 최치우와 그의 후배 심마니가 산삼을 들고 한지호를 기다리는 중이다.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만남에 임해야 한다.

어쨌거나 최상품의 산삼을 구하는 게 급선무다.

명징약초에 와있는 산삼이 진짜 물건이라면 김영찬의 냉대를 아쉬워 할 필요도 없다.

그에게 받은 수모는 언제든 갚아줄 날이 올 것이다.

“후우-! 다 털어버리고 가자.”

한지호는 스스로를 다독이고 경동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약재상 거리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들이 코끝을 찔렀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명징약초로 걸음을 옮겼다.

약재상 거리의 다른 상인들 중에 자주 방문하는 한지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지호가 명징약초의 단골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붙잡거나 호객을 하는 상인은 아무도 없었다.

“사장님.”

한지호는 최치우를 부르며 명징약초 내부로 들어섰다.

진열대 안쪽에서 최치우와 다른 사람이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 자네 왔는가!”

한지호를 발견한 최치우가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옆에 서있던 사람과 한지호를 서로 인사시켰다.

“이쪽은 내가 평생 본 한의사들 중에서 약초를 제일 잘 다루는 한지호 선생이야. 내가 말했지? 그리고 여기는 내 후배이기도 한 심마니 이원복일세.”

한지호는 심마니라 불린 이원복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라고 합니다.”

“치우 형님에게 말씀은 많이 들었수다. 젊은 양반이 기가 막히게 약초를 알아본다고. 나는 이원복이요.”

개량한복을 입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이원복은 무척 독특해 보였다.

비쩍 마른 체형이지만 눈빛은 칼날처럼 예리했고, 까무잡잡한 피부에서 산을 헤매고 다니는 내공이 느껴졌다.

털보 수염을 자랑하는 최치우와 개량한복에 장발을 한 이원복이 나란히 서있는 광경은 사뭇 이색적이었다.

둘 다 평범한 중년 남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최치우와 이원복이 길을 걸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흠칫 놀라 거리를 벌릴 것 같았다.

“K대 출신이시라고?”

“그렇습니다.”

이원복은 한지호를 탐색하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

한지호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치우 형님 말로는 약초를 잘 알아본다는데, 그렇게 젊은 나이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서 신기하구려.”

“연륜과 경험도 중요하지만, 노력과 실력으로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법이죠.”

“호오라. 그러니까 한 선생은 노력과 실력으로 연륜을 뛰어 넘었다, 이 말이오?”

“약초를 감별하는 감각, 그리고 의술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지호는 도발적인 이원복의 질문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