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전생의 규호는 주유에게 부탁해 최상품의 삼을 구했었다.
한지호는 그럴 필요 없이 최 사장의 후배가 캤다는 산삼을 쓰면 된다.
물론 산삼이 진짜 최상품이어야 하고, 또 심마니가 한지호에게 산삼을 팔지도 미지수였다.
자부심 강한 심마니들은 돈만 준다고 해서 산삼을 함부로 팔지 않는다.
치료법은 명확히 알고 있지만, 목표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험난할 것 같았다.
“샤워부터 하고, 하나씩 처리하자.”
한지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잠기운을 날려버린 뒤 김해수의 집으로 가야 한다.
침술로 구음절맥의 증상을 약간이나마 억누르는 게 첫 번째 할 일이다.
산삼을 확인하는 건 두 번째 단계다.
이렇게 하나씩 단계를 밟아 가면 머지않아 구음절맥을 치료하는 최종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지호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주어진 일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쏴아아아-
뜨거운 물이 그의 온몸을 적셨다.
생생한 꿈을 꾸느라 잠을 설쳤지만 샤워를 하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한지호는 오늘 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췄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옛말을 곱씹으며 그는 뜨거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황만금에 이어 두 번째로 찾아온 큰 기회.
구음절맥이라는 난관이 버티고 서 있지만, 한지호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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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청담동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라에 김해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땅값 비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청담동, 그곳에 1% 상류층만을 위한 빌라가 있었다.
아파트와 달리 건물 한 채만 우뚝 서있고, 극소수의 선택 받은 사람들만 입주할 수 있는 프라이빗 빌라였다.
당연히 특급 경비 업체가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보호하고, 입주민을 위한 수영장과 헬스 시설도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복층 구조의 빌라 내부는 청담동과 강남이 보이는 럭셔리한 전망을 자랑한다.
한 채에 최소 50억 원을 넘는 초호화 빌라에는 김해수를 비롯한 특급 스타들과 재벌 2세들이 살고 있었다.
청담동이라는 화려한 거리에 세워진 그들만의 성.
한지호는 빌라 앞에 내려 기하하적인 조형미를 뽐내는 건물을 올려봤다.
듣기로 건물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도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도맡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돈을 쏟아부어서 만든 건물이다.
언젠가 TV 연예 뉴스 프로그램에서 이 건물을 파헤친 기억이 났다.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가격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럭셔리한 공간.
평창동에 세워진 황만금의 저택과는 또 다른 포스가 느껴졌다.
황만금의 저택을 보면 욕망 대신 경외감이 든다.
하지만 인기 많은 연예인과 젊은 부자들의 세련된 주거 공간인 청담동 빌라를 보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는다.
한지호도 한동안 빌라 앞에 서서 끓어오르는 야망을 진정시켰다.
50억 원이 넘는 청담동 빌라.
아직은 꿈같은 공간이지만 머지않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되새겼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빌라 입구로 다가서자 정복을 입은 경비원이 막아섰다.
어차피 카드 키가 없으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입구 근처에서부터 철저하게 관리를 하는 것이다.
한지호는 대답 대신 스마트 폰을 꺼냈다.
“잠시만요.”
경비원을 기다리게 만든 그가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남산의 특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김해수의 개인 번호를 받았다.
전화번호만 받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상반신을 낱낱이 살피고, 구음절맥의 영향으로 증상이 나타난 가슴을 만지기까지 했었다.
지금 당장 김해수가 가장 신뢰하고, 또 가장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한지호다.
그가 전화를 걸자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김해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선생님, 오셨어요?”
“네, 지금 빌라 앞입니다.”
“들어오세요. 현관 열어 드릴게요.”
“그런데 경비하시는 분이 막아서요.”
“아…… 우리 빌라가 원래 좀 그래요. 잠시 바꿔 주세요.”
한지호는 전화기를 경비원에게 건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은 경비원은 화들짝 놀란 듯 연신 고개를 숙였다.
설마 탑 스타인 김해수가 직접 맞이하는 손님인줄 상상도 못한 것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기를 들고 고개를 조아린 경비원이 한지호를 쳐다봤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현관으로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한지호는 경비원을 따라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청담동 성채의 문이 열렸다.
그는 의술이라는 무기 하나로 김해수의 집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현관문을 열어준 경비원이 허리를 숙였다.
한지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갔다.
그는 게스트가 아니라 주인으로 청담동 빌라에 입성할 날을 그리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모든 치부를 노출한 김해수가 한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3장, 구음절맥(九陰絶脈) (2)
띠딩-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다시 복도로 발을 내딛은 한지호는 김해수가 사는 501호 문 앞에 섰다.
굳이 초인종을 누를 필요는 없었다.
김해수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이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둘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빌라 내부는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다.
복층 구조답게 거실 복판에 계단이 있었고, 창밖으론 강남 일대의 전경이 펼쳐져 장관을 자아냈다.
복층 전체의 평수를 합하면 족히 100평은 넘을 것 같았다.
상당히 비효율적인 구조지만, 어차피 부자들은 효율성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얼마나 더 럭셔리하고 특별한 구조인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해수가 사는 청담동 빌라는 상류층의 입맛을 딱 만족시키는 집이었다.
벽면 곳곳에는 김해수의 스틸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의 포스터가 거설을 장식해 이곳이 대한민국 탑 스타의 집이라는 걸 알려줬다.
“앉아요. 커피? 주스?”
“커피로 하죠.”
“잠시만 기다려요.”
마치 연인의 집에 놀러온 것 같았다.
한지호는 가죽 소파에 앉아 김해수를 기다렸다.
곧이어 그녀가 차가운 커피를 들고 왔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시원한 커피로 목을 축였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한지호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김해수의 집에 찾아온 건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괜히 섹시한 여배우의 집에 방문했다고 들뜨거나 흥분해선 안 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선 감정을 배제하는 게 중요하다.
한지호는 김해수를 여자가 아니라 한 명의 환자로 바라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어요. 알게 모르게 푸른 반점이 조금 늘어난 것 같달까?”
“지금은 가슴 아랫부분에 반점들이 모여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신으로 퍼질 겁니다. 그 다음에는…….”
“몸 안으로 곪아가며 전신 세포를 죽인다, 맞죠?”
“네, 맞습니다.”
무척 무서운 말이지만 한지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하지 않고 구음절맥을 방치하면 김해수가 말한 것처럼 최악의 결과가 나타날 터였다.
한지호 자신이 알려준 증상이기에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는 구음절맥의 무서움에 대해 숨기지 않았다.
당사자인 김해수가 구음절맥이 얼마나 위험한 체질인지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다른 각오로 치료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해수는 한지호의 충고대로 모든 활동을 연기했다.
연예계에서는 CF 촬영까지 뒤로 미룬 김해수를 두고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연예계의 소문이나 타격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목숨을 잃으면 악착같이 지킨 인기와 돈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김해수는 구음절맥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남산의 특급 호텔에서 한지호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의심을 할 수 없었다.
한국 최고의 전문의들도 고개를 내저은 증상을 간파한 한지호는 그녀의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오늘은 침으로 김해수 씨 몸 안의 음기를 억누를 겁니다. 일시적인 방편이지만, 최대한 증상의 진행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쓰는 방법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본질적인 치료는 언제 가능한 거죠?”
“최상품의 산삼으로 약을 짓고, 그 뒤 특별한 조치를 더해야 합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진짜 산삼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삼이라……. 무척 비싸겠네요?”
“최상품이 아니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비쌀 겁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요. 이 병을 낫게만 해준다면.”
“반드시 낫게 하겠습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했으니까.”
“좋아요. 믿을게요, 한 선생님.”
김해수는 한지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여느 의사들처럼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의사와 한의사들은 완치라는 단어를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다.
혹시 치료에 실패하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스스로의 의술을 믿었고, 어떤 변수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런 태도가 옳은 것인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그러나 환자에게 믿음과 편안함을 준다는 것은 분명했다.
“상의를 벗고 편한 곳에 엎드리세요.”
“그럼 침실로 가죠.”
김해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거실 복판에 있는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복층 위에 있는 침실에서 침을 맞으려는 것 같았다.
김해수를 뒤따라 위층으로 올라간 한지호는 자연스레 침실로 들어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해수의 침실에 들어갔지만 딱히 감회가 남다르진 않았다.
이미 남산의 호텔 스위트룸에서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그녀의 상반신을 봤기에 더 놀랄 일이 없었다.
김해수도 한지호 앞에서 부끄러움을 타지 않았다.
훌러덩 상의를 벗어던진 그녀가 망설이지 않고 브래지어를 풀었다.
한지호는 또 다시 대한민국을 뒤흔든 김해수의 풍만한 가슴을 보게 됐다.
구음절맥의 영향으로 유두가 함몰되고 푸른 반점이 돋아났지만, 그녀의 굴곡진 S라인은 명불허전이었다.
“누울게요.”
“조금 아플 겁니다.”
“참아야죠.”
김해수는 눈을 찡긋 거리며 침대에 엎드렸다.
한지호는 그녀의 새하얀 등을 쳐다보며 오금희를 펼쳤다.
황만금을 치료할 때는 양기를 억누르기 위해 물의 기운을 지닌 녹공을 펼쳐 침을 놓았었다.
이번엔 반대로 음기를 눌러야 하니 불의 기운을 지닌 조공(鳥功)을 펼쳐야 한다.
오장육부 중에서 심장과 연결된 조공은 화기(火氣)를 지니고 있다.
고오오오-
한지호의 단전에서 치솟은 내공이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혈도를 타고 흐른 기운은 그의 손끝을 거쳐 가느다란 침에 전달됐다.
오금희를 침술과 치료에 접목시켜 의술로 사용하는 것.
세계 최초로 외과 수술을 성공시킨 화타의 의술은 그 뿌리를 오금희에 두고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오금희를 수련하고 있는 한지호는 빠른 속도로 전생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꾸욱-
조공의 힘이 담긴 침이 김해수의 등에 꽂혔다.
살이 불에 타는 듯 강렬한 통증이 김해수를 덮쳤다.
“으음-!”
그녀의 입술 사이로 비명이 흘러 나왔다.
마치 불에 달궈지는 느낌일 것이다.
오금희 조공의 강력한 기운이 침에 실려 있으니 피부가 불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침을 놓았다.
“음… 으으음-!”
김해수는 고통을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가 엎드린 채 흘리는 비명이 묘하게 들렸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상야릇한 신음처럼 청각을 자극했다.
확실히 구음절맥을 타고난 여자답게 몸짓 하나, 소리 하나로도 남자를 홀리는 것이다.
침을 다 놓은 한지호는 누워 있는 그녀에게 설명을 해줬다.
“일시적으로 몸의 열기를 자극해 음기와 맞서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이 나른할 수 있으니 집에서 계속 휴식을 취하세요.”
“알겠어요. 그런데 이 침은 언제까지 맞으면 되는 거죠?”
“사흘에 한 번씩 맞아야 합니다. 빠른 시일 안에 최상품의 산삼을 구해 약을 지을 겁니다. 그 전까지는 사흘 마다 찾아와서 침을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