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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화타-26화 (26/255)

# 26

사람의 체온은 36.5도를 유지하고 있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은 따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점을 찌른 침에선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알아냈습니다.”

곧이어 그가 김해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읽혔다.

“무슨 병인지 알아냈나요?”

“네.”

한지호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어두운 절망 속에 서있었는데 마침내 빛을 발견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 피부가 함몰되고, 푸른 반점이 일어나는 증상. 이대로 오래 방치하면 반점이 곪으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갈 겁니다.”

“역시…… 심각한 병이었네요.”

“병이 아닙니다. 특이한 체질에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특이한 체질이요?”

“해수 씨는 일억 명에 한 명 꼴로 있는 특이 체질의 소유자입니다. 이 체질은 오직 여자들에게만 나타나고, 대부분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증상이 발현되면 얼마 못 버티고 일찍 죽고 말죠.”

“세상에 그런 체질이 있어요?”

김해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억 명에 한 명 꼴로 여자만 걸리는 체질, 게다가 해당 되는 사람은 대부분 엄청난 미녀에 요절을 한다니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스스로 내린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김해수와 똑같은 체질을 지닌 여자를 치료해본 경험이 있었다.

물론 전생에서 규호로 살아갈 때의 이야기다.

“아마 이런 체질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고대 의술의 명맥이 끊기면서 많은 자료들이 사라졌고,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도 희귀 피부병이나 전염병으로 여겼을 테니까. 무엇보다 워낙 특이한 케이스라서요.”

“대체 내가 어떤 체질이라는 거죠?”

한지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아득한 전생의 기억 속에서 이 단어를 찾아낸 순간의 전율이 생생했다.

“구음절맥.”

“뭐라구요?”

“김해수 씨의 체질은 구음절맥입니다.”

현실에서 사라진 말이 생명력을 가지고 되살아났다.

구음절맥(九陰絶脈)은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음기를 타고난 체질을 뜻한다.

그렇기에 오직 여자에게서만 나타나는 체질이고, 음기가 강하다보니 한 나라를 휘어잡는 경국지색의 미녀가 될 수밖에 없다.

김해수는 그러한 구음절맥의 소유자였다.

만약 한지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구음절맥의 증상이 심해져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부검을 해도 현대 의학으로는 아무 것도 밝혀낼 수 없기에 희귀병으로 알려졌을 터였다.

한지호는 당황스러워 하는 김해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한 것이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알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진짜 치료할 수 있는 건가요? 피부과, 성형외과, 그리고 신경과까지. 각 분야 최고의 의료진들이 고개를 내저었어요.”

“그들과 나는 다릅니다. 구음절맥이 뭔지도 모르는 의사들과 비교하지 말아요.”

한지호의 말에서 굳건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김해수는 어깨를 감싼 그의 체온을 느끼며 안정을 찾았다.

“한 선생님만 믿을게요. 치료만 해주시면 원하는 건 뭐든지 드리겠어요. 뭐든지!”

“쉽지는 않겠지만, 이미 구음절맥을 치료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누구죠?”

“소교.”

“소교?”

“아… 그런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김해수 씨의 구음절맥,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한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규호의 기억 속 이름을 말해버렸다.

소교(小喬).

오나라 대도독 주유의 아내이자 초선을 능가하는 절세미녀.

언니 대교와 함께 손오의 보물이라 불렸고, 특히 조조가 무리하게 오나라를 침공한 건 자매 중에서 소교를 탐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로인해 적벽대전이 벌어졌으니 소교의 미모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음절맥의 소유자였던 소교는 삼국시대를 통틀어 손꼽히는 미모를 자랑했다.

당시 호사가들은 한 세대를 앞서 살아간 초선의 미모도 소교에는 미치지 못할 거라고 말했었다.

규호는 적벽대전이 끝난 후 잠시 오나라에 머물렀고, 과거에 주태의 병을 고쳤던 인연으로 손권과 주유를 만나게 됐다.

결국 그는 주유의 아내인 소교의 구음절맥을 치료해 오나라의 은인 대접을 받았다.

한지호의 머릿속에서 멀고 먼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고 있었다.

소교를 낫게 했던 방법 그대로 김해수를 치료하면 될 것 같았다.

전생과 현생이 교차하는 지점, 한지호는 그 중심에 우뚝 서있었다.

3장, 구음절맥(九陰絶脈) (1)

“오랜만이오, 선생.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땅에서 민초들을 살려 의성이라 불린다지요? 부디 신의 경지에 다다른 의술로 나의 안사람을 구해 주시오.”

옥으로 빚은 듯 완벽한 이목구비를 지닌 미남자가 간절하게 말했다.

그의 옆에는 살짝 고개를 숙인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언뜻 보이는 이마와 콧날로 절세가인임이 드러났다.

조조로 하여금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게 만든 경국지색의 미녀.

손오의 보물이자 대도독 주유의 부인, 소교.

규호는 주유와 소교를 번갈아 쳐다봤다.

문무를 겸비하고, 수려한 외모로 수많은 여인들의 심금을 울려 어린 시절부터 옥룡(玉龍)이라 불렸던 주유.

그는 언니인 대교의 미모를 앞지르며 꽃을 피운 소교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불태우고, 오나라의 이인자로서 입지를 단단히 굳힌 그에게 부족한 점이 없어 보였다.

다만 한 가지, 목숨보다 아끼는 소교가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주유를 괴롭게 만들었다.

규호는 주유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공근의 부인께서는 구음절맥이라는 체질입니다. 온몸에 푸른 반점이 도드라진다고 하셨지요? 이대로 가면 반점이 곪으며 고통스럽게 운명하실 겁니다.”

“그런……! 무슨 방법이 없겠소?”

주유는 오나라 대도독이지만 한창 젊은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금슬도 절정에 다다른 시기였다.

그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절박해 보였다.

마치 적벽에서 조조와 맞선 것처럼 비장한 얼굴이었다.

규호는 주유의 간절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구음절맥을 고칠 수 있는 비법이 있다.

“방법이 있습니다. 필요한 약초를 구하기 어렵고, 부인께서 은밀한 곳을 제게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 몹쓸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겠소! 원하는 약초는 천하를 뒤져서라도 찾아오리다. 왕궁의 약초도 열러 드리리다. 또 치료를 위한 것이라면 남녀의 법도가 중요하지 아니하오. 그렇지 않소, 부인?”

주유의 물음에 소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여자로서 체면을 차릴 처지가 아니었다.

구음절맥을 치료할 수 있다면 푸른 반점이 생긴 속살을 기꺼이 보여줄 기세였다.

두 사람의 의지를 확인한 규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삼(蔘)이라는 약초가 필요합니다. 산을 타는 약초꾼들에게 수소문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나 천금보다 비싼 값을 치러야 할 겁니다.”

“안사람의 생명이 달렸거늘 그깟 천금이 대수겠소.”

“최상품의 삼을 구하고,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다면 구음절맥의 기운을 이겨내겠습니다.”

“선생은 지난 날 유평을 고쳐 우리 손오의 은인이 되었소. 이번에 나의 안사람까지 낫게 해준다면 주군께서 친히 폐물을 하사하실 것이오.”

유평은 주태의 자(字)다.

주유는 규호가 화타와 함께 주태를 치료했던 사실을 언급했다.

그것만으로도 오나라에 은혜를 베푼 셈이니 소교까지 낫게 하면 손권이 직접 선물을 줄 거라고 약속한 것이다.

오나라의 군주인 손권은 통이 큰 인물이다.

그가 하사할 폐물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귀한 가치를 지녔을 터.

주유가 약속한 보상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규호는 손권의 폐물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주유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폐물은 원치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대도독의 약속을 받고 싶습니다.”

“내게서 무엇을 원하시오?”

“구음절맥을 치료하면 공명을 살려주십시오.”

“그게 무슨!”

순간 주유의 눈동자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서렸다.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유는 전쟁을 치르며 유비의 책사인 제갈량의 진면목을 알아봤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를 죽일 작정이었다.

규호는 주유의 속내를 꿰뚫어 봤고, 치료의 대가로 제갈량을 살려 달라고 말한 것이다.

“공명은 장차 조조를 막는데 큰 힘을 보탤 겁니다. 그를 살려주십시오, 대도독.”

“내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걸 어찌 알았소?”

“공명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조조를 괴롭게 할 뿐 아니라 장차 손오에도 우환이 될 인물이오!”

“주공근이 대도독으로 있는 한 손오가 위태로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공명을 살려 천하의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적벽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조조의 대군이 건재하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

주유가 입술을 깨물었다.

고뇌에 빠진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규호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규호는 한낱 의원이 아니었다.

손오의 귀한 식객이며 소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게다가 천하를 떠돌며 여러 장수와 교분을 나누고 책사들과 배움을 주고받은 인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소교를 쳐다본 주유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소. 부디 안사람을 낫게 해주시오. 그리하면 공명이 무사히 돌아가도록 윤허하리다.”

주유의 결단에 규호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교의 구음절맥을 낫게 할 치료법을 떠올리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차 향기가 복잡했던 마음을 다독여주고 있었다.

+++

“아…….”

잠에서 깨어난 한지호는 장탄식을 흘렸다.

그는 김해수를 만나고 난 뒤 하루 종일 구음절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생의 기억 속에서 구음절맥과 관련이 있는 장면이 꿈에 나온 것이다.

단지 기억하는 것과 꿈으로 생생하게 보는 것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한지호는 규호와 주유의 대담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유가 제갈공명을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언제나 의문스러웠던 건 제갈공명이 너무 쉽게 오나라에서 빠져 나왔다는 점이다.

손오 역사상 최고의 천재인 주유의 역량을 생각하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주유가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제갈공명은 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실마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지호의 전생인 규호였다.

역사의 이면에서 그가 주유를 설득했고, 소교의 구음절맥을 치료한 대가로 제갈공명의 목숨을 구해냈다.

삼국지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눈이 빨개져서 몰입 할 이야기였다.

한지호 역시 전생을 각성한 후 위, 촉, 오의 삼국시대에 관심이 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지금 집중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구음절맥이다.

규호가 소교의 구음절맥을 치료한 방법을 참고해서 김해수를 고쳐야 한다.

한지호는 김해수에게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CF 촬영도 미루라고 말했다.

구음절맥이 본색을 드러낸 이상 안정을 취하며 치료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녀는 막대한 위자료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죽고 나면 돈과 인기가 무슨 소용인가.

가슴의 반점이 온몸으로 퍼져 곪으면서 죽어가도 활동을 할 거냐는 말에 김해수도 굴복하고 말았다.

우선 침술로 구음절맥의 기운을 억눌러야 했다.

김해수의 몸에서 뿜어지는 왕성한 음기를 진정시키고,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구음절맥은 기록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희귀한 질병이다.

그러나 치료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만 치료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고, 제때에 처치를 받을 확률이 낮아 대부분 목숨을 잃는 것이다.

치료법을 아는 의사도 거의 없으니 구음절맥을 타고나면 99% 이상 죽는 게 기정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유의 아내인 소교나 대한민국 최고의 섹스 스타인 김해수는 무척 운이 좋은 편이었다.

증상이 최고조로 심해지기 전에 규호와 한지호를 만났으니 말이다.

“최상품의 삼, 그리고…….”

한지호는 구음절맥의 치료법을 읊조리다가 얼굴을 붉혔다.

치료를 위해서는 특별한 약초로 약을 짓고, 강력한 양기로 구음절맥의 음기를 불태워야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이 민망하다면 매우 민망한 종류였다.

우선 일차적으로 음기를 억누르고, 알맞은 약을 짓는 게 급한 일이다.

나머지 치료법은 다른 준비가 끝났을 때 실시해도 늦지 않다.

그는 마침 얼마 전 명징약초 최 사장과 나눴던 대화를 기억했다.

후배 심마니가 아주 괜찮은 산삼을 캤고, 최 사장이 조만간 약속을 잡아 그 산삼을 보여주겠다고 한 것이다.

마치 김해수의 구음절맥을 위해 하늘이 미리 준비를 해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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