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0화 (20/255)

# 20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작들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내공이 쌓이며 온몸의 근육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부웅- 부우웅-

한지호의 팔과 다리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위압적인 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나무를 꺾고, 단단한 바위를 박살내는 위력이 실려 있다.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천하를 호령했던 삼국시대 장수들도 이런 무공을 익혔을 터, 한지호는 전설 속 영웅들의 능력을 따라가고 있었다.

쿠웅!

웅공을 수련할 때는 한 마리 곰이 된 것처럼 동작마다 묵직한 힘이 묻어나왔다.

움직이는 속도는 느리지만 가장 파괴적인 기운이 넘실거렸다.

쉬익- 쐐애액!

호공을 수련하자 그는 이내 맹수의 왕인 호랑이로 변했다.

정확하게 임팩트를 주며 잔인할 정도로 상대의 급소만 노리는 공격은 호랑이의 습성과 닮아있다.

원공을 펼치면 누구보다 날래고 민첩해질 수 있었고, 녹공을 펼친 상태에서는 감각이 레이더처럼 예민해져 모든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조공은 한지호를 하늘을 나는 새로 만들어줘 무시무시한 속도를 부여해줬다.

단거리 달리기에서는 조공을 펼친 한지호가 스포츠카보다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새의 모습을 따서 만들어진 조공은 일종의 경공법인 셈이었다.

“허억- 허억-!”

오전 내내 오금희를 수련하니 거친 숨이 절로 나왔다.

한 번씩 맛보기만 했는데도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한지호는 무협 소설 속 주인공들이 폐관 수련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폐관 수련을 하면 무공이 엄청나게 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폐관 수련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금희를 수련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진짜 시간 빨리 간다.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힌 것도 아닌데.”

한지호는 시계를 확인하고 혀를 내둘렀다.

오금희 수련을 하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지경이 된다.

무공 수련 자체가 중독성이 있기에 점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내공이 쌓이고 몸이 단단해지며 강해지는 느낌.

그 느낌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모르는 마약과도 같다.

한지호는 땀범벅이 된 채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는 길에 길거리에서 파는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울 요량이었다.

가볍게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샤워를 한 다음 유건영을 만나러 가야 한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정을 상기한 한지호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청우단이라는 씨앗이 그를 유건영과 연결 시켰고, 유건영은 황만금을 소개해줬다.

한지호의 미래 계획을 새롭게 수정하게 만든 황만금 치료는 유건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각양각색의 상류층과 VIP들을 관리하는 유건영.

그가 지닌 인적 자산을 활용해야 계속해서 승승장구 할 수 있다.

‘유 팀장님, 당신의 인맥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습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말리며 걸어가는 한지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낯설기만 했던 여의도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청우단을 홍보하기 위해 처음 여의도로 왔을 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다.

시간은 겨우 한 달 조금 넘게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거리에서 청우단을 나눠주며 관심을 바라던 한지호의 처지는 급변했다.

청우단을 대량으로 파는데 성공했고, 구매자들도 만족스러워 하고 있다.

50알 씩 받아간 청우단을 다 먹고 나면 추가 주문이 쇄도할 것 같았다.

게다가 황만금이라는 거물을 치료하며 1억 원을 받았고, 확실한 신뢰를 얻었다.

때문에 유건영도 한지호를 아주 대단한 명의로 생각하고 각별히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조금 늦었지요?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한 선생님.”

약속 장소인 카페로 들어온 유건영이 고개를 숙였다.

고작 5분 남짓 늦었을 뿐인데 다소 과하게 사과를 했다.

그만큼 한지호를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한편으로는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금융계의 룰이 몸에 배인 탓이었다.

한지호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내셨죠?”

“네, 덕분에 아주 바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았다.

유건영은 황만금의 태자병이 완치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만금이 계속 자금 관리를 일임한 것은 한지호의 조언 덕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청우단 1000알을 추가로 구매한 것도 고마움을 표하는데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황 회장님께서 아주 정정해지셨더군요. 전화 통화로 들리는 목소리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한 선생님 같은 명의를 만난 걸 보면 황 회장님이 복이 많은 분인 것 같습니다.”

“워낙 원칙을 잘 지키면서 치료를 받으셔서 차도가 빨랐습니다. 앞으로도 관리를 철저히 하시면 똑같은 병으로 고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요.”

“그보다 유 팀장님, 사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한지호는 대담하게 본론을 꺼냈다.

유건영은 시간을 금처럼 쓰는 사람이고, 말을 빙빙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이미 둘 사이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가 쌓여 있다.

황만금을 매개로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관계다.

그렇다면 시간을 끌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선생님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 드려야지요.”

유건영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고, 웬만한 부탁은 들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미리 기대를 하면 실망도 커진다.

한지호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황만금 회장님을 치료하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유 팀장님이 급히 연락을 해왔고, 엉겁결에 황 회장님을 뵙게 됐었죠.”

“그때 흔쾌히 나와 주신 것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게도 좋은 기회가 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네.”

“유 팀장님이 관리하는 VIP 고객들께 저를 소개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으음…….”

한지호의 부탁에 유건영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된다,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생각에 잠긴 유건영을 보며 한지호가 말을 덧붙였다.

“청우단의 효능을 경험하고, 태자병을 완치시키는 걸 봤으니 제가 실력 없는 한의사가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유 팀장님의 VIP 고객들에게 실망을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한 선생님이 대단한 명의라는 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VIP들은 눈에 보이는 경력이나 스펙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황 회장님은 급박한 경우였지만 다른 VIP 고객들께 소개를 해드리기엔 한 선생님의 경력이…….”

유건영이 말끝을 흐렸다.

한지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황만금도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와 한의사들이 병명을 못 찾았기에 한지호에게 진맥을 맡긴 것이었다.

그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K대 출신이라는 것 말고는 어떤 경력도 없는 한지호를 만났을 리 없다.

VIP로 불리는 상류층 사람들은 무척 깐깐한 기준을 갖고 있다.

특히 의사나 한의사처럼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엄격하게 분류한다.

한지호를 신뢰하고 고마워하는 유건영이 난색을 표하는 게 당연했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점,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어려운 부탁임에도 한 번 더 생각해달라는 뜻이다.

무작정 떼를 쓸 일은 아니었다.

한지호는 유건영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경력이 부족하지만, 황만금 회장님의 태자병을 진단하고 치료해낸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를 해주면 유 팀장님의 VIP 고객들도 저를 신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최소한 호기심에라도 한 번의 기회를 주려는 고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울대 병원의 과장과 영동 한의원 원장도 진단해내지 못한 병을 치료해낸 건 분명한 사실이니… VIP들 사이에서도 현물 부자로 알려진 황 회장님의 이름이 공신력을 지니고 있고.”

유건영은 한지호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한지호가 쐐기를 박았다.

“태자병처럼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청우단의 효능이 즉각적으로 발휘되는 걸 체험하셨죠? 어떤 VIP라도 바로 만족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한지호는 확신에 가득 찬 음성으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부탁을 하고 있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기회를 원하는 것이지 부정한 도움을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유건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황 회장님 치료와 관련해서 한 선생님께 받은 도움이 무척 큽니다. 태자병이 완치되는 걸 보고, 청우단의 효능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좋은 자리를 한 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어쩌면 황 회장님처럼 다른 VIP 고객들도 한 선생님 덕에 저를 더 신뢰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유 팀장님의 평판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한지호는 유건영을 줄기로 삼아 다양한 나뭇가지들로 뻗어나갈 계획이었다.

유건영의 VIP 고객들을 진료하고, 확실한 성과를 거둬 상류층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게 만들어야 한다.

병원을 열지 않고 더 큰돈과 명성을 쫓기로 결정한 이상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하는 법이다.

유건영의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낸 한지호는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는 한 걸음씩 성큼성큼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1장, 데자뷰(dejavu) (1)

한지호는 때를 기다렸다.

그가 겪은 유건영은 입 밖으로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적당한 기회에 플래티넘 홀딩스의 VIP 고객을 소개해줄 것이다.

유건영이 관리하는 상류층 고객 중 한지호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

경력은 부족해도 한의학 명문인 K대 출신이었고, 평창동 땅부자로 소문난 황만금 회장의 난치병을 치료했다는 말을 들으면 호기심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자리가 만들어졌을 때 황만금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임팩트를 주면 된다.

한지호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었고, 유건영이라는 연결 고리를 신뢰하는 까닭이다.

여유를 얻은 그는 북한산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요즘 유행이라는 값비싼 등산복 대신 가벼운 추리닝 차림으로 북한산 정상을 밟았다.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시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한지호는 가끔이라도 등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상에서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내려오니 도시의 모습이 너무 빡빡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과 경쟁하며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도시의 삶에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따금 산이나 바다를 느끼며 마음에 여유를 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어른들이 왜 등산을 다니는지 알 것 같네.”

북한산 초입으로 내려온 한지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중년 남녀들이 등산에 빠지는 이유가 이해됐다.

어떤 사람들은 등산을 빌미로 불륜을 저지른다지만, 대부분 산에서 탁 트인 경치를 보며 재충전을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출출한데…….”

북한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허기가 졌다.

단전에 쌓인 내공 덕분에 힘들지는 않았지만, 배가 고픈 건 무공으로도 어쩔 수 없다.

한지호는 자리에 서서 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는 불광동 부근의 등산로를 선택해 내려왔고, 불광역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깔려있다.

불광역 맛집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자 블로그 글이 줄줄이 나타났다.

요즘에는 블로거지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대가를 받고 거짓말을 하는 블로거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동네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블로그에 올라온 맛집 리뷰가 참고자료가 된다.

몇 번의 검색을 거친 한지호는 늦은 점심 메뉴를 결정했다.

불광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돼지국밥집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인 돼지국밥은 서울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메뉴다.

블로그 검색으로 불광동에 맛있는 돼지국밥집이 있다는 걸 알아낸 한지호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인터넷으로 지도를 확인하니 불광역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주택가 골목 사이에 국밥집을 비롯해 백반집 등 싸고 양 많은 식당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곳에 진짜 맛집이 숨어있는 법이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와 먹는 돼지국밥은 얼마나 맛있을까.

한지호는 입맛을 다시며 스마트 폰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걸어갔다.

깡- 까앙-!

고개를 숙인 채 지도를 따라 걸어간 지 15분 쯤 됐다.

한지호의 귓가로 기분 나쁜 쇳소리가 들렸다.

주택가에서 웬만하면 쇳소리가 날 일은 없다.

“어디 공사라도 하나?”

한지호는 대수롭지 않게 쇳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5분 정도만 더 움직이면 돼지국밥집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린 어떻게 하라고-!”

“사람이 먼저지 돈이 먼저야?”

그때 무시 못 할 소리들이 귓가를 때렸다.

쇳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고, 날선 외침이 오가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돼지국밥집을 찾아 가야 한다.

그런데 간간이 들려오는 외침이 한지호의 발을 잡았다.

“무턱대고 나가라고 하면 우린 어떻게 살라고 그래요?”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도 아니냐? 어?”

낯설지 않은 내용이었다.

천사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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