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물의 힘을 지닌 녹공을 일으켜 황만금의 신장에 기운을 전이시켜야 한다.
한지호의 녹공이 황만금의 신장 기능을 활성화 시키고, 몸 안에서 자연스레 수기(水氣)가 일어나서 들끓는 화기(火氣)를 잠재울 것이다.
스으으윽-
한지호가 두 팔을 추욱 늘어트렸다.
오금희 중에서 사슴을 본 따서 만든 녹공을 펼치기 위한 준비 자세였다.
마음을 먹고 단전에 쌓인 내공을 끌어올렸다.
오금희를 수련하며 생성된 내공은 어느덧 주먹만한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아랫배에 무궁무진한 힘을 주는 돌덩이가 꽉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한지호가 목을 길게 빼고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어린아이들이 사슴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녹공을 펼치면 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무공으로서 녹공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
그 기운만 일으켜 황만금에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지호는 사슴의 뿔처럼 머리 위로 올렸던 두 팔을 내리 꽂았다.
퍼억!
그의 양손이 누워있는 황만금의 복부를 가격했다.
마치 때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두 개의 신장을 자극한 것이다.
녹공의 힘이 실린 한지호의 손이 황만금의 신장으로 기운을 주입했다.
우우웅!
한지호의 손과 황만금의 복부가 맞닿은 지점에서 무형의 기운이 공명했다.
진동하는 스마트 폰을 붙여놓은 것처럼 황만금의 복부가 흔들거렸다.
무공으로만 여겼던 오금희를 의술로 사용하는 첫 시도다.
한지호는 정신을 집중한 채 녹공의 힘을 온전히 밀어 넣었다.
“후-!”
그가 숨을 내뱉으며 양 손을 뗐다.
심장 부근에 침을 놓은 것부터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법을 다 썼다.
이제 남은 것은 결과를 기다리는 일밖에 없다.
한지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황만금의 상세를 지켜봤다.
곧이어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쏴아아아!
황만금이 신장에서 퍼져 나간 물의 기운이 태자병으로 인한 불의 기운을 식히는 것 같았다.
온몸에 흥건하던 식은땀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고, 입술을 비집고 나오던 신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백하던 황만금의 혈색 역시 서서히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됐다!”
한지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높였다.
어려운 고비를 넘겨서인지 엄청난 희열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
침술과 오금희로 태자병의 회광반조 현상을 끝낸 것이다.
다른 의사나 한의사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을 자기 힘으로 해냈다.
이 순간 한지호가 느끼는 뿌듯함은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발작에서 해방 되어 빠르게 안정을 찾는 황만금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병마와 싸워서 이기는 기쁨은 전쟁터에서 적군을 물리친 기쁨과 비교 될 정도로 강렬하다.
황만금의 가슴에 꽂힌 침 세 개를 뽑은 한지호는 그가 편히 잠들도록 침실의 불을 껐다.
체력을 많이 소진했으니 내일 늦게까지 깊은 잠을 잘 것이다.
끼익-
한지호가 침실 문을 열고 나오자 집사와 경호원, 메이드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됐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집사가 부리나케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집사를 안심시켰다.
“발작은 끝났고, 푹 주무시다가 내일 늦게 일어나실 겁니다. 큰 고비를 넘겼으니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선생님.”
황만금의 집사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평소에는 차가운 인상으로 알게 모르게 한지호를 무시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집사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게 느껴졌다.
비로소 한지호를 황만금 회장의 은인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한지호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까지 마음 졸이느라 힘들었을 텐데 얼른 주무세요. 전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집사가 계속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거실에 서있던 경호원과 메이드들은 그렇게 고마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매일 가까이서 수행을 하는 집사처럼 황만금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황만금의 발작을 안정시킨 한지호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뿌듯한 마음을 안고 평창동 저택에서 나왔다.
시간이 늦었지만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오금희를 치료에 접목시켰다는 게 굉장한 성과였다.
황만금은 한지호를 성장시키며 전생의 능력을 터득하게 만드는 훌륭한 발판이었다.
한지호가 이 시기에 황만금을 만난 것, 그리고 태자병에 걸린 황만금이 한지호를 만난 것 모두 서로에게 더없는 행운이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평창동 언덕길을 내려가는 한지호의 걸음이 봄바람처럼 살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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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평창동으로 향했다.
지난밤 급하게 택시를 잡고 달려갈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긴장과 초조가 공존했던 어젯밤과는 달리 평화롭고 여유로운 상태로 택시 뒷좌석에 앉아 서울 도로를 가로질렀다.
평창동 초입의 랜드마크인 스타벅스를 지나면 언덕길이 나온다.
지하철 역도 멀고, 걸어 다니기도 까다로운 언덕이지만 이곳에 강북 전통의 부자들이 모여 있다.
“감사합니다. 잔돈은 괜찮아요.”
“아이쿠,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한지호는 택시 기사에게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천 원도 안 되는 잔돈을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될 만큼 통장 잔고가 두둑해졌다.
사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넉넉해졌기 때문이다.
딩동-
높은 대문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한지호가 황만금의 저택에 드나든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는 대문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평소 같으면 정원 너머 현관문에 집사가 서있어야 한다.
아주 특별한 귀빈이 아닌 이상 집주인 대신 집사가 손님을 맞이하는 게 상류층의 관습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정원 너머 현관 앞에 70대 노인이 서서 한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이자 억만장자인 황만금이 직접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다.
한지호는 정원 너머에 서있는 황만금을 쳐다보고 감격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호의에 감동한 게 아니었다.
전생의 의술로 태자병을 치료하고, 콧대 높은 거물로 하여금 직접 마중을 나오게 만든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한지호는 성큼성큼 걸어가 황만금 앞에 다다랐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황 회장님.”
“간밤에 나를 살린 걸 알고 있네. 다 죽어가고 있었지만 자네가 나에게 침을 놓고 치료를 한 걸 어렴풋이 기억했지.”
“태자병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한 겁니다. 이제 사실상 완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두 자네 덕일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병명도 알아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갔겠지.”
황만금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한지호를 만나 태자병이라는 커다란 짐을 덜어낸 그는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집사 대신 직접 마중을 나온 게 단적인 증거였다.
“안으로 들어가세. 가서 더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한지호와 황만금이 나란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부자인 황만금과 한지호가 동등한 입장이 된 것 같았다.
비록 지금 가진 돈으로는 비교가 안 되지만, 대신 한지호의 의술은 억만금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태자병의 회광반조 현상까지 치료해낸 한지호는 분명 한 걸음 더 높이 올라선 게 분명했다.
9장, 리얼 머니(real money) (1)
한지호는 서재로 올라가지 않았다.
밤새 고비를 넘긴 황만금은 그를 부엌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통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식탁을 놓고 황만금과 한지호가 마주보며 앉았다.
식탁 위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깔려 있었다.
아침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각종 샐러드와 서양식 브런치 메뉴들, 그리고 생과일을 갈아서 만든 주스가 좋은 냄새로 한지호의 코를 자극했다.
“오늘은 천천히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지.”
“그럼 사양하지 않고 잘 먹겠습니다.”
한지호는 포크를 들고 다양한 샐러드와 브런치를 맛봤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로 버무려진 샐러드는 상큼하게 입맛을 돋게 만들었다.
따끈따끈한 브런치도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타르틴이라는 프랑스 스타일의 파이가 특히 일품이었다.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의 퀄리티는 여느 호텔 레스토랑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한지호는 호사스러운 아침을 즐기며 새삼 황만금이 자신을 다르게 대우한다는 걸 느꼈다.
겸상, 즉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생각 이상의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황만금처럼 나이 많은 부자들은 절대 아무나와 겸상하지 않는다.
그가 직접 현관으로 마중을 나오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는 건 한지호를 은인으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어젯밤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상하게 오늘 아침이 더 잘 넘어가는구만.”
황만금이 간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한지호는 키위 주스로 입가심을 하고 천천히 대답했다.
“체력을 많이 소진하셨으니 음식이 잘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태자병의 기운이 떠나갔으니 몸이 가벼우실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로 완치가 됐다는 말인가?”
“앞으로 계속 조심하셔야 하지만, 일단은 완치라고 말씀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허허허, 허허허허허!”
황만금은 포크를 내려놓고 길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괴롭혔던 태자병이 완치됐다고 하니 더없이 기쁜 모양이었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지긋지긋한 병마를 한지호가 낫게 해줬다.
뿐만 아니라 지난밤에는 부리나케 달려와 고비를 넘기도록 힘을 썼다.
한지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따스할 수밖에 없었다.
깐깐하고 신경질적인 황만금의 평소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꽤나 놀랄 것이다.
웃음을 멈추고도 기쁜 기색을 감추기 힘든 황만금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헌데 어젯밤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회광반조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사람이 죽기 전에 잠시 멀쩡해지는 걸 뜻하는 말 아닌가?”
“맞습니다. 어젯밤의 기나긴 발작은 태자병의 회광반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마지막 발악이라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 몹쓸 병이 낫기 전에 강짜를 부린 거로군.”
“그렇죠. 참 고약한 병이긴 합니다.”
“자네가 달려오지 않았다면 그 강짜에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네. 아무튼 오늘은 축배를 들어야 마땅한 날이야!”
황만금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주스 잔을 들었다.
술 대신 건강에 좋은 생과일 주스로 기분을 내고 있었다.
한지호도 그에 맞춰 키위 주스를 허공에 들고 미소를 지었다.
유쾌하게 주스로 분위기를 낸 한지호가 황만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회장님.”
“응? 말해보게.”
“완치가 됐어도 지금 같은 습관을 오래 유지하시는 게 좋습니다.”
“채식, 금욕, 그리고 돈 관리에서 신경을 끊으라는 원칙 말인가?”
“네. 당장 원래의 패턴으로 돌아가게 되면 또 다시 양기와 화기가 쌓일 수 있습니다. 태자병이 발병했다는 건 회장님의 몸이 양기와 화기가 쌓이기 쉬운 체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관리를 잘 하셔야 합니다.”
“크흐음……. 알겠네. 채식과 금욕을 100% 지킬 수는 없어도 최대한 유지해야겠구만. 돈 관리도 예전처럼 깐깐하게 안 하고 유 팀장을 믿어 봐야지.”
황만금은 한지호의 조언을 비교적 순순히 받아들였다.
태자병으로 크게 수난을 겪었기에 한지호가 하는 말이라면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웃으며 다른 말을 덧붙였다.
“제가 특별히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특별한 것?”
“러시아 산 녹용 분골로 약재를 지었습니다. 오늘부터는 기존의 한약 대신 녹용으로 만든 약을 드시면 됩니다.”
한지호의 가방 안에는 녹용 분골로 만든 한약이 들어 있었다.
명징약초 최 사장 덕분에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진짜 러시아 산 녹용 분골을 얻어 약을 지었다.
태자병이 완치된 후를 대비해 미리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