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만약 한지호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유건영의 점수도 깎이게 되는 셈이다.
무척 큰 부담이지만 한지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겨우 이 정도 부담감에 짓눌릴 거였다면 평창동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전생인 규호는 조조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낸 위인이었다.
한지호는 황만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맥을 짚겠습니다.”
“그래보게.”
황만금은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한지호는 성큼성큼 걸어가 책상 앞에 다다랐다.
대한민국 최고의 한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아본 황만금은 익숙한 동작으로 팔을 내밀었다.
그의 팔은 앙상하게 메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한지호는 손을 뻗어 황만금의 맥을 짚었다.
단순히 맥을 짚는 건 어느 한의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진맥이라고 해서 똑같은 진맥이 아니다.
한지호는 두 눈을 감고 황만금의 맥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둥- 두둥-
다소 불규칙적인 맥 소리가 확대되어 들려왔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맥을 짚은 한지호가 눈을 떴다.
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황만금의 목젖을 만졌다.
황만금은 당황했지만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목젖의 진동도 불안정해.’
한지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손목을 잡아 심장 박동을 체크하는 것은 기본적인 사항이다.
하지만 목젖을 만지는 건 잘 알려지지 않는 방법이었다.
목젖은 호흡뿐 아니라 침을 삼키는 행동과 연결 된 기관이다.
한지호는 목젖의 미세한 진동으로 환자의 상태를 가늠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예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방식이지만, 규호의 기억이 그를 전혀 다른 차원의 한의사로 만들어준 것이다.
“상의를 걷어 올리고 뒤로 돌아 앉아주십시오.”
“그것도 진맥의 일환인가?”
“황 회장님, 옛날부터 맥을 맡긴다는 건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제 말을 따라 주세요.”
의술을 펼칠 때 한지호는 누구보다 강직해진다.
실제로 과거에는 의원에게 맥을 맡기는 게 생명을 담보로 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의원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맥을 짚으며 손쉽게 암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러서지 않는 한지호의 말에 황만금은 툴툴 거리면서 돌아앉았다.
이윽고 그가 상의를 걷어 올렸다.
팔보다 더 깡마른 상체가 드러났다.
평창동에 대 저택을 짓고 사는 부자라도 늙음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한지호는 두 손을 뻗어 황만금의 등을 만졌다.
정확히 말하면 척추 옆의 혈도를 누른 것이다.
현대에는 기(氣)나 혈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사라졌다.
그렇기에 내공이나 무공도 전설 속의 이야기로 치부된다.
그러나 한지호는 실제로 내공과 무공을 익히는 중이었고, 기의 흐름과 혈도의 역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황만금의 혈도를 누른 채 조심스레 반응을 살폈다.
정확하게 혈도를 자극하면 몸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하기 마련이다.
움찔-!
황만금이 낚시 바늘에 걸린 생선처럼 몸을 떨었다.
한지호는 그 순간 손끝으로 전해진 감각을 잊지 않았다.
진맥, 목젖, 그리고 혈도 자극까지.
황만금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기본적인 절차가 끝났다.
“무슨 짓을 한 겐가?”
몸을 떤 황만금이 상의를 내리며 한지호를 쏘아봤다.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서재 입구에 서있는 유건영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괜히 한지호를 데려왔다고 후회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인 한지호는 차분한 얼굴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 회장님, 몇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진맥에 목젖에 등판까지, 이 난리를 떨어놓고 더 물을 게 있다고?”
“화를 가라앉히세요. 몸에 열이 차오르면 발작이 더 심해질 겁니다.”
한지호의 말에 황만금이 화들짝 놀라며 우물쭈물했다.
이어서 한지호가 질문을 던졌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에 스스로 느껴지는 증상이 있습니까?”
“그게…….”
“온몸에 순간적으로 열이 확 오르면서 발작이 시작되죠?”
“마, 맞네.”
“한 번 발작이 시작되면 몸이 불타는 것 같은 통증이 지속되고, 당연히 호흡도 불안정해지고.”
“그렇지.”
“정밀 검사를 받아도 원인을 찾을 수 없고, 좋다는 보약을 먹어도 낫는 게 없고.”
“그러니까 답답해 미칠 노릇 아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발작이 있고, 요즘에는 횟수가 더 많아졌으니.”
황만금은 어느새 한지호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한지호는 까칠하고 신경질적이던 황만금을 고분고분한 환자로 만들었다.
그가 황만금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회장님의 병명을 알아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황만금이 반색하며 한지호를 쳐다봤다.
뒤에 서있던 유건영도 숨을 죽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와 한의사들도 원인을 찾지 못한 채 혀를 내두르고 돌아갔었다.
그런데 내세울 경력 하나 없는 한지호가 병명을 찾은 것이다.
한지호는 또박또박 힘주어 병명을 말했다.
“태자병(太子病)입니다.”
“태자병?”
처음 들어보는 병명에 황만금이 인상을 썼다.
잔뜩 기대했는데 뭔가 빗나간 기분이 든 것이다.
한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예로부터 태자나 왕세자들이 자주 걸리는 병이었습니다. 황제내경에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지호가 의학오경 중 최고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황제내경을 언급하자 황만금이 인상을 풀었다.
아주 허튼 소리를 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한지호는 황만금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하진 않지만 조선시대 정조도 태자병에 시달린 징후가 있습니다.”
“그 태자병이란 게 뭘 말하는 건가?”
“태자나 왕세자들은 왕이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갖게 되며 화기가 몸에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쨌든 태자이기에 온갖 좋은 음식과 고기, 여러 미녀들을 마음껏 취하게 됩니다. 이는 모두 양(陽)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것과 온갖 좋은 것들이라…….”
황만금은 감이 오는 듯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지호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태자병의 핵심을 알려줬다.
“오행 중에서 불에 해당하는 화기가 쌓이고, 거기에 음양의 양기가 더해지니 탈이 나는 게 당연합니다. 일반적인 화병과는 다른 양상으로 의학에서는 물론이고 한방에서도 원인을 찾기 쉽지 않은 병입니다.”
“불과 불이 더해진 형국이란 뜻인가.”
“그렇죠.”
“허면 치료법은 있는가?”
황만금이 애타는 얼굴로 물었다.
불과 방금 전까지 한지호를 무시하며 짜증내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자신있게 병명을 진단하고 설명하는 한지호가 다른 의사들과 달라 보인 것이다.
이제껏 병명을 말해준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으로선 한지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죽을병은 아니라지만 매일 몇 번씩 발작과 통증을 겪다보면 삶이 피폐해진다.
황만금의 간절한 눈빛에 한지호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병명을 알았는데 치료법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저, 정말 치료가 된다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대신 황 회장님도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침을 놓고 약을 쓰는 것만으로 완전히 나을 병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하겠네. 이 병만 나을 수 있다면 못할 게 무엇이겠어.”
이로서 전세가 역전됐다.
아직 병을 치료한 건 아니지만 한지호가 주도권을 잡은 건 분명했다.
“저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겠네, 그러고 말고.”
한지호의 입가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유건영에게 청우단을 판 것, 황만금이 태자병을 앓고 있어 현대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했던 것, 이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어 커다란 기회가 됐다.
아주 맛있는 밥상이 잘 차려진 기분이었다.
황만금의 태자병을 치료해주고 밥상을 맛있게 먹는 일만 남았다.
“준비를 해서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힘들겠지만 오늘 하루만 더 참으세요.”
“치료에는 시일이 얼마나 걸리겠나?”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회장님이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 온다면 열흘 안에 차도가 보이고, 한 달이면 많이 좋아질 겁니다.”
“알겠네. 돈은 얼마든지 주겠네. 제발 낫게만 해주게!”
“치료비 이야기는 완쾌하신 후에 다시 하죠.”
한지호는 돈에 큰 관심이 없다는 듯 딱 잘라서 말했다.
그가 돈에 관심이 없을 리 만무했다.
다만 황만금과 같은 부자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내세울 게 돈밖에 없는 사람들은 돈의 힘이 절대적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돈에 관심을 안 보이면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린 한지호가 걸어 나갔다.
서재 입구에 서있던 유건영은 얼이 빠진 얼굴로 한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한지호를 데려왔지만, 그가 완벽하게 병명을 진단하고 황만금 회장을 어린 아이처럼 다룰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한지호는 고분고분해진 황만금과 넋이 나간 유건영 덕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누군가를, 특히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건 무척 유쾌하고 뿌듯한 일이다.
천하제일의 의술로 세상을 놀라게 만들 한지호의 행보가 평창동 저택에서부터 발동이 걸리고 있었다.
6장, 태자병(太子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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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침을 소독했다.
전생을 깨닫고 처음으로 실제 환자를 치료하게 됐다.
아무래도 마음가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청우단은 엄밀히 말해 치료를 위한 약은 아니다.
일시적으로 술기운을 물리치고 각성을 돕는 보조제였다.
다만 천연 한약으로 만들어 시중에 유통되는 숙취 해소제나 각성제에 비해 훨씬 몸에 좋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황만금의 태자병은 분명한 질병이다.
고치기 쉬운 질병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들이 원인조차 못 찾은 까다로운 병이다.
침을 소독하고 필요한 약재 목록을 정리한 한지호는 연남동 자취방을 나섰다.
어제는 유건영의 차로 이동했지만 오늘은 혼자 평창동으로 가게 됐다.
그는 마치 전투를 앞둔 장수처럼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의원이 병마와 싸우는 것이나 장수가 적군과 싸우는 것 모두 비슷한 일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끈질기게 버티며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는 점은 똑같다.
“평창동으로 가주세요.”
택시에 올라탄 한지호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황만금을 치료하게 된 것이 그토록 바라던 큰 기회라는 점도 잊어버려야 한다.
환자를 대하고 병마와 싸울 때는 오직 치료 자체에만 집중해야 하는 법이다.
손에 들어온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여부는 황만금을 완쾌시킨 후에 고민해도 충분하다.
택시 안에서 마음을 다스리며 심기일전한 한지호는 금방 평창동에 도착했다.
이른 오후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평창동 저택들이 어마어마하게 보였는데 오늘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한 번 봤다고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을 적응의 동물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딩동-
한지호가 황만금 저택의 대문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곧이어 아무런 말없이 대문이 열렸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집사가 바로 문을 열어준 것 같았다.
대문으로 들어선 한지호는 계단을 밟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저택 현관문에는 어제처럼 집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황만금의 저택에 방문한 손님은 누구든 집사의 얼굴을 먼저 보게 된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주인이 직접 마중을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상류층의 접객 룰이었다.
한지호는 태자병을 완치 시켜주면 황만금이 직접 버선발로 뛰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올라가죠.”
그는 여유롭게 집사의 말을 받았다.
휘황찬란한 저택 안에서 어디로 움직일지 뻔히 예상이 됐다.
어제 진맥을 하고 대화를 나눴던 2층 서재에 황만금이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집사는 저택 안의 계단을 거슬러 2층으로 올라갔다.
한지호는 집사를 뒤따르며 숨을 골랐다.
가정부와 경호원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부터 황만금의 태자병을 치료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을 것이다.
“회장님, 한 선생님이 왔습니다.”
서재 앞에서 집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한지호를 부르는 호칭이 어제와 달라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황만금의 치료를 담당하게 됐기에 집사도 격식을 갖춰 대우를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