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화타가 창안한 전설의 도인술이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다.
이대로 몇 달 더 오금희를 수련하면 TV에 나오는 남자 연예인들 못지않은 몸이 될 것 같았다.
단순히 보기만 좋은 몸이 아니라 근력을 바탕으로 내공을 쏟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한지호도 자신의 변화를 느꼈는지 거울을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180cm 가까운 키에 근육이 붙으니 사람이 달라보였다.
키만 큰 마른 멸치에서 조각 몸매를 지닌 훈남이 되는 중이었다.
원래부터 뚜렷한 이목구비는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무표정하거나 인상을 쓰면 사나워 보인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다.
몸이 받쳐주기 시작하니 얼굴도 한층 빛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나르시스트도 아니고, 됐다.”
한지호는 거울 속을 빤히 들여다보다 웃음을 흘렸다.
혼자 있지만 괜히 쑥스러워진 그가 샤워기 밑에 섰다.
쏴아아아아아-
뜨거운 물이 온몸에 흐른 땀방울을 씻어 내려갔다.
수련을 하고 돌아와서 샤워를 할 때의 상쾌함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들다.
한지호는 오금희 중에서 웅공을 집중적으로 익히느라 단단하게 뭉친 어깨 근육을 부드럽게 풀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건영을 만나야 한다.
그는 평소보다 오래 뜨거운 물로 마사지를 하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
부우웅-
연남동 골목에 심상치 않은 자동차 배기음이 울렸다.
한지호는 본능적으로 유건영이 운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매끈하게 잘 빠진 벤츠 CLS클래스가 멈췄고, 내려진 창문 사이로 유건영의 얼굴이 보였다.
“타세요, 한 선생님.”
한지호는 평생 타본 자동차 중에서 가장 비싼 모델의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석에 앉은 유건영이 잘 나가는 외국 금융권의 팀장이라는 게 실감 됐다.
벤츠 CLS는 1억이 넘는 자동차다.
이런 걸 타고 어디로 가려는지 궁금증이 깊어졌다.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흔쾌히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전혀 바쁘지 않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한지호는 살짝 웃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유 팀장님 부탁인데 들어 드려야죠.”
“전에 청우단을 받으며 드렸던 말씀 기억하고 계십니까?”
“어떤…….”
“조만간 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했었습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 고객 중에서 오랜 지병으로 힘겨워하는 분이 계십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와 한의사들도 특별한 방법을 찾지 못했지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한 선생님을 소개해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청우단 같은 명약을 만들 정도면 실력은 충분하리라 판단했으니까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벤츠 CLS는 연남동을 벗어나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벤츠의 편안한 승차감에 감탄할 틈도 없이 유건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제 고객의 지병이 죽을병은 아닙니다. 그래도 병을 달고 사는 게 얼마나 불편한 일이겠습니까?”
“그렇죠. 감기만 걸려도 난리가 나는 게 사람이니까요.”
“바로 그겁니다. 게다가 거액을 쓰며 초청한 최고의 의료진도 손을 못 쓰는 상황이니……. 그러던 중 며칠 전부터 고객의 병세가 심각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히 한 선생님께 연락을 드린 겁니다.”
본론이 나왔다.
유건영에게 자금 관리를 맡긴 상류층 고객이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증세가 악화됐다는 게 핵심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들도 손 쓸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한지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만세삼창을 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입 밖으로 환호성이 튀어 나올 뻔 했다.
그토록 갈구하던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유건영의 고객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기회는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진도 실패했다는 걸 보면 손쉬운 병은 아닐 게 분명했다.
화타를 능가하는 천하제일 의성 규호의 기억을 갖고 있어도 약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은 인생의 진리다.
위험이 커질수록 돌아올 이득도 커진다.
한지호는 걱정을 접어두고 눈앞의 기회에 온몸을 내던지기로 작심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의 말에 유건영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명한 의사와 한의사들도 포기한 지병이니 해결책이 없어도 크게 책임지실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혹시 어떤 지병인지 알 수 있습니까?”
“정확한 병명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저와 자금 관리 문제로 상담을 하실 때도 가끔 증상이 나타나긴 합니다.”
“어떤 증상이죠?”
“갑자기 숨이 가빠지면서 안색이 붉어지셨고, 온몸에 통증이 번지는데 5분에서 10분 정도면 또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발작이군요. 의사들이 답을 못 찾았으니 간질은 아닐 테고.”
한지호는 조수석에 앉아 머리를 굴렸다.
발작과 통증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다.
며칠 전부터 증세가 심해졌다니 지금쯤 당사자는 몸보다 마음이 더 피폐해졌을 것 같았다.
한지호가 고민에 빠지자 유건영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일단은 환자를 봐야 알 수 있겠어.’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을 통해 온갖 희귀병을 떠올리고 있었다.
몇 가지 감이 잡히는 병이 있지만 단언할 수 없다.
환자를 대면하고 직접 맥을 잡아보면 실마리가 보일 것 같았다.
그사이 둘을 태운 벤츠는 낯선 동네로 진입하고 있었다.
고민에서 빠져나온 한지호가 핸들을 잡은 유건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 팀장님, 우리가 지금 어디쯤 와있는 겁니까?”
“미처 말씀을 못 드렸네요. 평창동입니다.”
“아…….”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평창동은 드라마에서 재벌들이 사는 곳으로 자주 등장하는 동네다.
최근에는 가수 서태지의 자택이 들어선 지역으로 유명세를 탔다.
서울에서 살면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던 동네라 창밖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언덕길로 올라가자 평범한 빌라와 주택 대신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담벼락 너머로 우뚝 솟아있는 저택들이 위풍당당해 보였다.
한지호는 자신이 만날 환자가 상류층이라는 게 피부에 와 닿았다.
유건영에게 자금을 맡긴 중요한 고객이자 평창동 저택에 사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새삼스럽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청우단이라는 씨앗이 싹을 틔운 건 분명했다.
이제 그 싹을 굵은 나무로 자라나게 만드는 건 한지호 자신의 몫이다.
‘침착하자. 내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천하제일 의원의 기억이 있어. 다 죽은 환자도 살려냈던 전생의 나를 믿는 거야.’
한지호가 스스로를 다독이는 동안 유건영이 저택 담장 아래에 차를 세웠다.
“내리시죠.”
한지호는 조심스레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1억이 넘는 유건영의 벤츠 CLS를 보고 놀랐던 건 약과였다.
족히 3M는 될법한 담장 뒤로 보이는 저택은 으리으리한 정도가 지나쳤다.
서울 시내에서 이런 저택에 살려면 돈이 얼마나 많아야 할지 계산이 안 됐다.
멍하게 저택을 쳐다보는 한지호의 귓가로 유건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선생님,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참고로 제 고객이자 환자인 분은 황만금 회장님이십니다.”
“네.”
황만금.
익히 들어본 이름은 아니었다.
다소 촌스러운 이름을 여러 번 곱씹은 한지호가 유건영 뒤에 섰다.
유건영은 저택에 자주 방문한 것처럼 초인종을 눌렀다.
곧이어 따로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 대문이 열렸다.
저택의 주인과 유건영이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다.
한지호는 정원으로 연결 된 계단을 올라갔다.
넓은 정원은 갖가지 나무와 꽃, 수석으로 가꿔져 있었다.
작은 연못과 벤치까지 있어서 산책을 하며 서울 시내를 내려 보기에 그만이었다.
가까이서 본 저택의 위용은 더욱 어마어마했다.
한지호는 정원을 가로질러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2층 저택 현관문에 다다랐다.
앞서 걸어간 유건영이 현관문을 열 필요가 없었다.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이다.
“유 팀장님,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에 말씀드린 한 선생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럼 이 분이…….”
중년의 집사가 한지호를 아래 위로 훑어봤다.
너무 젊어서 선뜻 믿음이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건영의 소개로 온 것이기에 토를 달지는 못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집사가 등을 돌렸다.
유건영과 한지호는 신발을 벗고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대리석과 크리스탈 샹들리에,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그림으로 장식 된 저택 내부는 궁전이나 다름없었다.
안내를 맡은 집사 외에도 가정부와 경호원들이 그림자처럼 저택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한지호는 태어나서 처음 구경하는 상류층의 저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넋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지병으로 고생하는 황만금 회장을 고쳐내야만 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한지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사의 뒤를 따라갔다.
“회장님께서는 2층 서재에 계십니다.”
집사의 말을 듣고 2층으로 올라가니 1층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대리석이 깔린 복도 좌우로 여러 개의 방문이 늘어서 있었다.
대체 이 저택에 방이 몇 개나 있는지 세고 싶을 지경이었다.
집사는 가장 가까운 방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회장님.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 팀장님과 손님이 왔습니다.”
“들어오라 그래.”
문 안쪽에서 메마르고 신경질적인 음성이 울렸다.
한지호는 황만금 회장의 목소리만 듣고도 상태가 좋지 않음을 감지했다.
끼이익-
집사가 서재 문을 열어줬다.
서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29살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올 것이다.
문은 이미 열렸다.
한지호는 과감하게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6장, 태자병(太子病) (1)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책으로 가득 찬 황만금의 서재는 방문객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개인의 가정집에 이만한 규모의 서재가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평창동 저택의 위용에 감탄했던 한지호는 다시금 황만금의 재력을 실감했다.
그러나 서재보다 책상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신경이 쓰였다.
비쩍 마른 몰골에 신경질적인 눈매, 70대임에도 염색을 한 듯 검은 머리를 지닌 노인이 서재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회장님, 좀 괜찮으십니까?”
유건영이 입을 열자 황만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인품이 좋은 사람도 병이 오래되면 성격이 나빠지는 법이다.
황만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질 턱이 있나. 늙으면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니 참 서글픈 일일세.”
“이쪽은 제가 전에 말씀드린 한 선생님입니다.”
“그 기가 막힌 한약을 만들었다던?”
“네.”
유건영은 짧게 대답한 후 한지호를 쳐다봤다.
알아서 소개를 하라는 뜻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소개였다.
황만금은 한지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저택의 집사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 젊어 보여 신뢰하기 힘든 눈치였다.
하지만 황만금이 믿는 몇 안 되는 사람인 유건영이 데려온 인물이다.
영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문전박대를 할 순 없었다.
“한의사 양반이라고?”
“K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를 마쳤습니다.”
“서울대 병원의 내과와 신경과 과장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영동 한의원의 원장도 답을 못 찾았지. 헌데 유 팀장보다 어려 보이는 자네에게 특별한 방도가 있겠나?”
“맥을 짚기 전에는 어떤 것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만. 아무런 자신감 없이 무작정 따라오지는 않았습니다.”
한지호는 과감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옆에 서있던 유건영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뜰 정도였다.
황만금 역시 한지호를 다시 쳐다봤다.
새파랗게 젊은 한의사가 위축되지 않고 자신감을 표출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게 시간은 곧 돈이지. 자네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네. 유 팀장을 향한 신뢰까지 걸려있는 일이니.”
황만금은 유건영을 걸고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