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5장, 새싹 (1)
“감사합니다.”
한지호는 잘 포장 된 청우단 50알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테헤란 로의 카페에서 만난 고객은 외국계 기업의 차장이다.
그는 청우단을 받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길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한약이니 기대도 안 했었는데 효과가 예사롭지 않더군요. 살면서 비싼 보약 수두룩하게 먹어봤는데 직접 몸에 와 닿는 건 청우단만한 게 없었습니다.”
깐깐한 인상의 외국계 기업 차장이 솔직한 소감을 말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공진단이나 녹용, 산삼을 쓴 비싼 보약처럼 몸의 체질을 바꿔주는 약은 아닙니다. 대신 숙취가 심하거나 각성 효과가 필요할 때 즉각적인 효과는 청우단을 따라올 약이 없을 겁니다.”
“몸으로 체험했으니 효과야 확실히 믿을 수밖에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중년의 차장은 한지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길거리에서 청우단을 나눠주던 날 한의사 면허증을 보여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에서 청우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소개를 해줘도 되겠습니까?”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체질과 크게 상관없이 복용할 수 있는 약이라 누구에게든 잘 맞을 겁니다.”
한지호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 번 효능을 체험한 사람들은 알아서 입소문을 내주는 법이다.
다시 길거리에서 무료로 약을 나눠주며 호객 행위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선생님 연락처를 알려 주겠습니다. 다들 숙취와 무기력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좋아할 것 같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좋은 약 얻어서 제가 더 고맙지요.”
마지막까지 매너를 지킨 차장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호는 청우단을 챙겨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돈을 벌고 인맥을 만들기 위해 청우단을 만들었지만, 복용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확인하니 무척 뿌듯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민초들을 살리려 애썼던 규호처럼 의성(醫聖)이 될 마음은 없었다.
한의사가 되려고 했던 것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었다.
전생을 깨달은 다음에도 특별한 능력을 바탕으로 돈과 권력을 얻길 원했다.
하지만 청우단을 받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니 자기 자신이 의원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는 슈바이처나 규호처럼 희생을 하는 성인은 못 되어도 의원으로서 기본은 지키자는 다짐을 했다.
적어도 의술로 남을 속이거나 해롭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직하고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하면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 그게 의술의 매력인 것 같았다.
삐빅!
그때 스마트 폰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렸다.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할 시간이 된 것이다.
20명 남짓한 고객들에게 청우단을 50알 씩 나눠주고 있어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다음 손님은 여의도 증권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한지호는 조금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에 털어 넣고 일어섰다.
카페 밖으로 나온 그는 얼른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여의도로 가주세요.”
목적지를 말한 한지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헤란 로와 강남 일대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동차로 북적이고 있었다.
동네가 동네이니 비싸 보이는 외제차가 소나타처럼 흔했다.
거리의 사람들도 세련된 옷차림으로 활보하고 있었다.
고객들에게 전해줄 청우단을 든 배낭을 메고 택시 뒷자리에 탄 한지호는 새삼 이질감을 느꼈다.
하루아침에 천만 원 매출을 올리니 금방 눈이 높아진 것 같았다.
“올라갈 거야.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밑바닥에서 하늘 높이까지 올라갈 거라는 각오가 진하게 묻어나왔다.
택시를 타고 고객을 만나러 가는 일도 오래 하진 않을 것이다.
한지호는 외제차를 탄 부자들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막히는 도로를 벗어난 택시가 여의도에 도착했다.
차 안에서 30분이 훌쩍 흘러갔다.
택시비를 낸 한지호는 여의도의 고층 빌딩 사이에서 길을 찾았다.
“저쪽인가?”
약속 장소인 금융사 건물을 발견한 한지호가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테헤란 로에서 커피를 마셨기에 따뜻한 녹차를 주문한 한지호는 창가 자리에서 고객을 기다렸다.
“선생님!”
이윽고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한지호를 불렀다.
한지호는 공중보건의 시절 내내 선생님으로 불렸기에 이런 호칭이 낯설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한지호가 남자와 악수를 했다.
이번 고객은 증권가에서 근무하는 비교적 젊은 남자였다.
주로 과장급 이상의 중년 남성을 타겟으로 삼았던 한지호가 그에게 청우단을 나눠준 이유가 있었다.
여의도 출근길의 누구보다 더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주저 없이 청우단 50알을 구입하며 50만 원을 단번에 입금했었다.
오늘 입고 나온 회색 정장도 왠지 모르게 비싸 보였다.
“저번에는 경황이 없었습니다. 유건영입니다.”
남자가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재빨리 명함을 스캔했다.
‘플래티넘 홀딩스 팀장?’
플래티넘 홀딩스라면 뉴스에서 몇 번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외국 금융사로 1% 상류층의 자금만 관리해주는 곳이라 들었다.
그런 회사의 팀장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한지호는 유건영을 다시 보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저를 믿고 청우단을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빈틈없이 포장 된 청우단 50알을 받은 유건영이 미소를 지었다.
부티 나는 분위기에 깔끔한 인상이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그가 한지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한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네. 한지호입니다.”
“K대 한의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약을 받긴 받았는데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일의 특성 상 술자리가 잦은 편인데…… 청우단 덕분에 한 시름 놓게 생겼습니다.”
“청우단이 도움이 되어서 기쁩니다.”
“사실 한 선생님께 연락을 하기 전에 다른 한의원에 문의를 해봤습니다. 청우단이라는 약이 있는지, 아니면 다른 약으로도 이만한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러셨군요.”
“나름 인맥이 있는 편인데…… 다들 청우단 같은 효능을 내는 약은 없다고 했습니다. 혹시 한 선생님께서 직접 개발하신 한약인 건가요?”
“네, 제가 만든 약입니다. 청우단이라는 이름도 직접 붙였습니다.”
“역시! 범상치 않은 분이셨군요.”
유건영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좋은 주식을 발견한 사람처럼 한지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국내 최고의 한의대인 K대 출신에 이런 한약을 직접 만드신 분이라면……. 혹시 약을 짓는 것 외에 다른 진료도 하십니까?”
“지금은 병원에 소속돼있지 않고 혼자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침술 치료도 가능합니다. 전공을 따지자면 약을 만드는 것보단 침술에 더 자신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한 선생님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 것 같네요.”
유건영이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말을 했다.
그러나 한지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청우단을 만들어 팔면서 돈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목표가 있었다.
바로 청우단을 통해 상류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유건영은 한지호에게 다양한 상류층 사람들을 소개해 줄 수 있는 인물이다.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 거라는 유건영의 언급은 아주 큰 기회를 주겠다는 말로 들렸다.
한지호는 기쁜 기색을 속으로 감추고 태연한 얼굴로 화답했다.
“제 의술이 도움이 되는 곳이라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확실히 한 선생님은 제가 만나본 다른 의사나 한의사들과는 다른 분인 것 같습니다. 청우단도 주변에 알려서 더 주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 팀장님.”
한지호는 고객이나 손님이라는 말 대신 명함에 나온 직함을 따라 유건영을 불렀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사뭇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은 호칭이었다.
유건영은 그레이 수트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또 뵙겠습니다, 한 선생님.”
유건영의 인사가 으레 하는 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한지호는 묵묵히 손을 맞잡고 그의 눈을 마주봤다.
청우단을 챙긴 유건영이 먼저 일어났고, 한지호의 눈동자에는 야망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청우단이라는 씨앗이 쏠쏠한 돈 외에도 다른 싹을 틔우려는 것 같았다.
한지호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번의 기회다.
그는 기회를 낚아 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명의 싹이 트는 순간, 전력을 다해 굵고 거대한 나무로 키워낼 작정이었다.
여의도에서 가능성을 본 그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당장 주어진 일을 착실히 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의 전생인 규호는 삼국시대의 수많은 군주와 장수들을 만났었다.
당시에도 섣부른 판단과 흥분으로 일을 그르친 군주와 장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한지호는 과거의 기억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우선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에게 청우단을 잘 전달하면 유건영처럼 기회를 줄 인물이 또 나타날 것이다.
그는 반쯤 남은 녹차에 미련을 두지 않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틀 안에 20명을 만나 청우단을 전해줘야 하기에 쉴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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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명 남짓한 사람들에게 청우단을 50알 씩 건네주고 일주일이 지났다.
50알이면 결코 작은 양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고 해도 아직 추가 주문을 할 시기는 아니었다.
특히 청우단은 매일 먹는 보약이 아니라 숙취 해소나 각성 효과가 필요할 때만 복용하는 환단이다.
그렇기에 50알을 가지고 몇 달을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한지호는 추가 주문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았다.
20명의 고객은 청우단을 한 알만 먹고도 효능을 체험하고 50만 원을 선입금한 사람들이다.
그만한 믿음을 가졌으면 청우단이 떨어질 때쯤 반드시 재주문을 할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위에 청우단을 알려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가능성도 높다.
며칠 만에 천만 원 어치 주문을 받았던 것처럼 청우단으로 몇 천, 몇 억을 벌게 될 거라 확신했다.
한지호는 지난 일주일 동안 느긋한 마음으로 수련을 거듭했다.
인적 드문 공터에서 오금희를 수련하는 게 일상의 낙이었다.
무공 수련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지만, 한지호는 모든 과정을 즐겼다.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인이 되어가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호랑이, 곰, 원숭이, 사슴, 새.
오금희의 바탕이 되는 다섯 동물의 형태를 익힌 한지호는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체감했다.
운동 한 번 해본 적 없는 약골이었지만 이제 밤길에 누구를 만나도 두렵지 않았다.
단전에 내공이 쌓이며 기초 체력과 근력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던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이 전화를 건 것이다.
한창 공터에서 수련을 하던 중에 스마트 폰이 울렸다.
둔중한 곰이 되어 웅공(熊功)을 수련하던 한지호는 땀범벅이 된 채 전화를 받았다.
“네, 한지호입니다.”
“한 선생님, 오늘 만날 수 있겠습니까?”
유건영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다짜고짜 만나자는 말에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기회의 여신이 화살을 쏘았음을 직감했다.
오금희를 수련하느라 달아오른 몸이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5장, 새싹 (2)
“계신 곳을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저는 연남동에 있습니다.”
“그럼 1시간 뒤에 연남동으로 가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둘은 간단히 용건만 주고받고 전화를 끊었다.
한지호는 오금희 수련이 중단됐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기회의 여신이 쏘아 보낸 화살을 낚아챌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는 간단한 호흡으로 수련을 마무리했다.
샤워를 하기 위해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아직 유건영이 연락을 해온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그래도 사람에겐 촉이라는 것이 있다.
촉이 좋다, 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깃털을 밟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자취방에 도착한 한지호는 곧장 옷을 벗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몸은 예전과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원래 한지호는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른 체형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아직 부족하지만 작은 근육들이 몸에 결을 내고 있었다.
오금희를 꾸준히 수련하면서 육체가 단련된 까닭이다.
헬스장에서 웨이트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오금희는 형태를 따라하는 것만으로 육신을 단련시키고 내공을 쌓게 만드는 무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