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8화 (8/255)

# 8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의식하지 않고 오금희에 빠졌었다.

마음 같아선 호공에 이어 곰, 원숭이, 사슴, 새의 기운을 담은 웅공, 원공, 녹공, 조공까지 수련하고 싶었다.

하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한지호의 육체는 29살 먹도록 거친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부터 열심히 오금희를 수련하면 조각 같은 몸매와 강철 체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무리 할 처지가 아니었다.

“벌써 한 시간 반이나 지났다고?”

시계를 본 한지호는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호공의 기본 동작을 따라했을 뿐인데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흐른 것이다.

시간과 정신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한 시간 반을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추리닝과 티셔츠가 땀으로 범벅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한지호는 공터 바닥에 놓아둔 스마트 폰을 챙겼다.

수련에 방해가 되기에 주머니에서 빼 바닥에 놔뒀던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스마트 폰을 집어든 한지호는 또 다시 놀라고 말았다.

수련을 하는 동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부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와 메시지였다.

“이거 설마?”

4장, 청우단(靑牛丹) (2)

한지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벌써 청우단 때문에 입질이 온 것 같았다.

가장 먼저 확인한 메시지 내용은 간결했다.

- 청우단 추가로 구입하고 싶습니다. 연락 부탁합니다. -

무료로 청우단을 받았던 직장인 중 한 명이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나머지 메시지의 내용도 비슷했다.

- 청우단, 진짜 효과 최고군요. 더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

- 메시지 확인하시는 대로 전화 주시길 바랍니다. 청우단이 필요합니다. -

이런 식의 메시지가 세 명에게서 와있었다.

공교롭게도 한지호가 오금희를 수련하는 동안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부재중 전화도 두 통이나 찍혀 있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메시지 대신 전화를 걸고 본 것 같았다.

한지호는 기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자신이 만든 청우단의 효능이 입증 된 것이다.

세 통의 메시지와 두 통의 부재전화.

겨우 다섯 명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충분히 기뻤다.

청우단 100알을 다 뿌린지 하루밖에 안 됐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할 거라 확신했다.

우선 청우단의 효과를 체험하고 선뜻 연락을 해온 다섯 명을 확실하게 사로잡아야 한다.

한지호는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일단 자취방으로 돌아가 땀을 씻어내고 싶었다.

어차피 서두를 필요는 없다.

청우단의 효과를 느끼고 손을 뻗은 사람들은 한지호의 답장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출근길에서 청우단을 나눠줄 때와는 입장이 뒤바뀐 셈이었다.

한지호는 약간 애를 태워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금희 첫 수련도 잘 됐고, 청우단이라는 씨앗도 싹을 틔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천릿길도 한 걸음 부터라고 했는데, 그 한 걸음을 아주 멋지게 내딛은 것 같았다.

+++

주문이 밀려들어 왔다.

TV 홈쇼핑의 쇼 호스트들이 입만 열면 말하는 것처럼 구입 문의가 폭주하고 있었다.

청우단은 숙취 해소에 탁월한 효능을 보인다.

과음을 하면 해장국을 먹어도 쓰린 속이 쉬이 달래지지 않는다.

하지만 청우단 한 알이면 금방 속이 편해진다.

뿐만 아니라 레드불처럼 각성 효과까지 품고 있어 일시적으로 눈과 머리가 맑아지게 된다.

카페인을 넣지 않고 천연 약초만으로 각성 효과를 내는 건 천하제일 의원이었던 규호의 비법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한지호는 일주일 동안 무려 서른 명에게 연락을 받았다.

청우단을 받은 100명 중에서 실제로 복용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중에서 효능을 체험하고 우연이 아니라 청우단 덕분임을 자각한 사람의 수는 더 적을 것이다.

30%가 추가로 청우단을 원한다는 건 대단한 성과였다.

한지호는 사람들의 연락을 받고 더욱 배짱을 부렸다.

청우단 가격을 제법 비싸게 책정한 것이다.

진심으로 약의 효능을 인정한 사람들에게만 팔고 싶었다.

청우단은 저렴한 약초를 사용하지만 한지호가 아니면 누구도 만들 수 없는 약이다.

한약 중에서 가장 비싼 공진단의 가격이 한 알에 3만 원 정도로 형성 돼 있다.

한지호는 청우단 한 알의 판매 가격을 만 원으로 정했고, 50알 단위로만 판다고 밝혔다.

한 번에 50만 원 단위로 주문을 받으려는 것이다.

비싸다면 비싼 가격이지만 서른 명 중에서 스무 명이 망설이지 않고 돈을 보냈다.

그들 대부분은 큰 회사에서 과장 이상의 직함을 달고 있었다.

그렇기에 웬만한 한약이나 보약은 다 먹어봤고, 진짜 몸에 좋은 것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체험한 청우단의 효능은 다른 값비싼 한약보다 확실했다.

이로서 한지호는 50알 씩 20명에게 청우단을 팔게 됐다.

100알을 무료로 나눠주고 단번에 1000알의 주문을 따낸 것이다.

한지호가 K대 한의학과 출신이라는 확실한 신분을 보여준 점, 그리고 무엇보다 청우단의 효능이 탁월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하루아침에 천만 원 매출을 올리게 된 한지호의 입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는 이미 명징약초 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약초를 주문해 놓았다.

한지호의 특이함에 끌렸던 최 사장은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했었다.

명징약초 입장에서도 깨끗한 약초의 진가를 알아보고 대량으로 구매하는 큰손 고객이 생긴 셈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약초 값으로 200만 원 정도를 결제해도 천만 원 매출을 올리면 800만 원이 남는다.

한방 병원에 취직하면 한 달 내내 일하고 400만 원에서 500만 원을 월급으로 받을 수 있다.

그에 비해 한지호는 벌써 800만 원의 순이익을 확보한 것이다.

800만 원은 절대 작은 액수의 돈이 아니다.

한 달에 꼬박꼬박 800만 원만 벌어도 꿈의 연봉이라는 1억을 넘길 수 있다.

연봉 1억 월급쟁이들이 실제로 수령하는 돈은 매달 700만 원 정도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봉 1억을 꿈꾸는 세상에서 시작부터 800만 원을 벌게 된 한지호의 출발은 무척 산뜻해 보였다.

그러나 한지호가 미소를 짓고 있는 건 단순히 청우단을 천만 원 어치 팔았기 때문이 아니다.

청우단은 그에게 있어 씨앗일 뿐이다.

50알 씩 주문한 20명의 고객이 계속 청우단을 구입하고, 또 주위에 입소문을 내주면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청우단만 만들어서 한 달에 몇 천만 원의 수입을 올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지호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청우단으로 번 돈은 시드 머니(seed money)가 되어 줄 것이다.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한의원을 열거나 스케일이 다른 사업에 투자할 계획이었다.

뿐만 아니라 청우단이 널리 알려지면 예상하지 못한 인맥이 생길 수도 있다.

청우단 구입 고객은 회사의 중역들이다.

만약 그들이 한지호를 확실히 신뢰하게 되면 더 높은 사람을 소개해줄 것이다.

단순히 청우단을 파는데 그치지 않고 상류층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기회를 얻는 게 한지호의 진짜 목표였다.

우선은 주문 받은 청우단 1000알을 똑같은 퀄리티로 만들어야 한다.

사흘 뒤 명징약초에서 재료를 건네받기로 했다.

이미 천만 원을 선입금 받았기에 재료값 걱정도 없었다.

연남동 자취방 월세도 밀릴 걱정이 없었고, 생활도 한층 윤택해질 것 같았다.

한지호는 자기 힘으로 이뤄낸 성과를 누릴 자격이 충분했다.

물론 이 소박한 성공에 만족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녔으면서도 한계를 깨지 못했던 규호의 삶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는 기적처럼 찾아온 전생을 바탕으로 세상을 마음껏 주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이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돈을 벌어본 한지호에게 세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정글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험한 정글을 헤치고 잔인한 맹수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미약한 시작, 그러나 창대한 끝을 꿈꾸는 한지호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한지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도 구면이라고 처음 봤을 때보다는 모든 게 익숙했다.

약재상 안에서 주섬주섬 약초들을 정리하던 최 사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도 한지호를 확인하고 반색했다.

“정말 왔구먼.”

“그럼요. 예약금까지 보냈는데 안 올 리가 있나요.”

“그때 사간 약초들로 덕을 본 건가?”

“네. 깨끗해서 좋더군요. 그걸로 환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럼 추가로 주문한 물량은 모두……?”

“복용해본 사람들이 구입을 원해서 주문 한 겁니다.”

“우리 약초를 이백만 원 어치나 살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많이 주문을 받았다는 말인가. 무슨 환단을 만들었기에…….”

“궁금하면 한 알 드릴까요?”

“오! 정말인가?”

“지금은 없고, 만드는 김에 몇 알 더 만들어서 다음에 올 때 챙겨 드릴게요.”

“고맙네. 내 꼭 기대하고 있겠네.”

한지호의 약속을 받은 최 사장이 환하게 웃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부리부리한 인상의 아저씨가 해맑게 웃는 모습이 왠지 순박해 보였다.

그는 한지호가 원하는 약초들을 운반하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무려 200만 원 어치 약초라서 물량이 워낙 많지만 콜택시를 부르면 된다.

한지호는 살짝 허리를 숙여 최 사장이 준비한 약초들을 확인했다.

일일이 포장을 뜯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코는 무엇보다 정확하게 약초를 판가름한다.

코끝으로 저번처럼 깊은 소나무 향이 묻어나왔다.

최 사장이 이번에도 경동시장에서 보기 드문 깨끗한 약초를 골라 온 것이다.

“으음- 좋군요. 아주 좋아요.”

“그렇지? 허허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린 최 사장은 잔금을 받았다.

기분 좋게 현금을 낸 한지호는 콜택시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최 사장이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리게. 처음 와서 제대로 된 약초를 알아본 것도 그렇고, 이렇게 큰 고객이 됐으니 내가 차나 한 잔 대접하겠네.”

“안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아닐세, 금방 내올 테니 잠깐만 앉아 있게.”

최 사장이 간이 의자를 내밀고 약재상 안쪽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그가 찻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아끼던 찻잎으로 끓인 듯 찻잔에서 그윽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마셔보게.”

“감사합니다.”

한지호는 최 사장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분명했다.

따뜻한 차를 음미하니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최 사장은 찻잔을 내려놓게 한지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차는 핑계였고, 그와 대화를 더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의원에 들어가지 않고 개인적으로 약을 만들어 파는 것 치고는 수완이 아주 대단하구만. 벌써 이렇게 많은 약초가 필요할 정도면 금방 큰돈을 벌겠네.”

“운이 좋았습니다.”

“세상에 운으로 되는 일이 있던가. 그리고 운도 실력이지.”

“네. 그러고 보니 명징약초를 발견한 것도 행운이었네요.”

“허허허, 나야 말로 행운일세. 사실 평생 약초쟁이로 살면서도 보람을 느끼기 힘들었네. 중국산 약초와 농약 쳐서 키운 질 떨어지는 것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약을 만드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좋은 걸 구분하지 않으니 어찌 보람이 생기겠나. 그러던 차에 자네가 나타난 것 아닌가!”

한지호는 말없이 최 사장을 쳐다봤다.

아버지뻘인 최 사장은 소년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묵묵히 들어주는 게 최선이다.

“다른 약재상에는 없는 깨끗한 약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 것부터 범상치 않았네. 왜 옛날 사람들도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지? 그렇게 거창하진 않아도 약초쟁이로서 자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구만.”

“감사합니다. 벌써 큰 힘이 되고 있는걸요. 약을 만드는데 깨끗한 약초를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죠.”

한지호는 진심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최 사장의 투박하지만 솔직한 마음이 그를 감동시켰다.

그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자신을 믿어주는 아군이 생긴 것 같았다.

최 사장도 뜻밖에 찾아온 한지호라는 인연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도 한지호와 최 사장의 만남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훗날 대한민국 한의학계의 판도를 바꾼 사건으로 기록 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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