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7화 (7/255)

# 7

레드불은 음료수를 파는 회사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다.

수많은 스포츠 종목을 후원하며 심지어 우주정거장에서 낙하 이벤트까지 시도한 레드불은 하나의 문화를 만들었다.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청우단이 알찬 씨앗 역할을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마저 끝을 내볼까.”

두 팔을 쭈욱 펴고 기지개를 켠 한지호가 마무리 작업에 돌입했다.

청우단 1차 물량 100개를 다 만들었지만 포장이 남아있다.

그는 시작부터 돈을 받고 청우단을 팔 생각이 없었다.

누가 무엇을 믿고 달랑 한의사 면허만 들고 있는 한지호에게서 약을 사겠는가.

우선은 공짜로 청우단을 나눠주고, 효과를 본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면 그때부터 돈을 벌 계획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넣어 청우단을 포장했다.

직접 청우단을 만들고 포장하느라 하루가 다 날아갔지만 힘들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발판삼아 더 높이 날아오를 거라 생각하니 고된 일도 즐거웠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해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여전히 돈도, 빽도 없지만 천하제일의 의술이 머릿속에 담겨 있다.

한지호는 자취방을 가득 채운 소나무 향을 맡으며 신나게 청우단을 포장을 했다.

새로운 인생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기 직전이었다.

4장, 청우단(靑牛丹) (1)

출근길의 테헤란 로는 무감정한 표정의 사람들로 넘쳐났다.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 회사들의 사무실이 모여 있는 테헤란 로는 강남 직장인 세계의 중심이다.

테헤란 로에 사무실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위치가 되는 회사라는 뜻이다.

그만큼 정장을 차려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직장인들의 행색도 제법 그럴 듯해 보였다.

한지호는 대학 입학 기념으로 샀었던 낡은 정장을 입고 테헤란 로에 나왔다.

출근 시간이 임박해 한창 복잡한 테헤란 로에 나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바로 정성들여 만든 청우단 100개를 무료로 나눠주기 위함이다.

물론 아무에게나 무료로 나눠줄 수는 없었다.

저렴한 약초를 주로 사용했지만, 청우단을 만드는데 기울인 노력과 정성이 만만치 않았다.

한지호는 분명한 타겟을 설정하고 테헤란 로까지 나왔다.

최소한 과장 이상으로 보이는 직장인들만 노려서 청우단을 나눠줄 생각이었다.

구매력과 영향력을 골고루 갖춘 과장 이상의 인물이라면 청우단의 효과를 체험하고 얼마든지 지갑을 열 것 같았다.

‘먹고 사는 게 쉽지가 않다,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왔지만 막상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으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해도 호객 행위는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한의사씩이나 되어서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 비슷한 일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다.

맨땅에 헤딩하며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다.

훗날 높은 곳에서 지금을 돌아보면 좋은 추억으로 생각 될 게 분명했다.

당장의 부끄러움보다 화려한 미래를 향한 한 걸음이 더 중요하다.

한의원에 소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이름을 알리려면 다른 대안이 없었다.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힌 한지호가 먹잇감을 물색했다.

방금 앞을 스쳐 지나간 중년 남자.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회식을 하며 과음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청우단의 효능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언뜻 봐도 무척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최소한 대기업 과장 이상의 인물로 보였다.

한지호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K대 한의대에서 실습 나왔습니다. 숙취 해소와 각성 효과가 있는 한약인데 무료로 한 번 드셔보세요.”

중년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한지호를 쳐다봤다.

도를 아십니까, 부류였다면 말도 안 섞고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K대 한의대라는 것을 밝혔기에 최소한 개무시를 당하진 않았다.

이래서 대한민국에선 아직까지 학벌이 중요한 것이다.

한지호는 몇 없는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진짜 K대 한의대 출신 맞습니까?”

“네, 여기 보세요!”

한지호는 얼른 준비하고 있던 학생증과 한의사 면허증을 꺼냈다.

학창시절에 썼던 학생증에는 K대 한의학과 마크가 찍혀 있었고, 한의사 면허증도 신뢰를 주기 충분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망설이는 중년 남자에게 쐐기를 박았다.

“무료로 드리는 거니까 한 번 드셔보세요. 전날 과음하셨으면 바로 효과가 느껴지실 겁니다. 공진단처럼 그냥 씹어서 삼키면 됩니다. 설마 K대 한의대에서 이상한 걸 드리겠어요?”

“그럼 어디 한 번…….”

중년인이 못 이기는 척 청우단을 받았다.

K대 한의대는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힌다.

게다가 무료로 한약을 준다는데 거부 할 이유가 없었다.

한지호는 새삼 학교 이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학력보다 능력이 훨씬 중요하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는 학교 이름이 신용 보증 역할을 하는 것이다.

“드셔 보시고 효과가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청우단을 받은 중년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막상 약을 받았어도 그리 호의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아침부터 길거리에서 호객 아닌 호객을 하는 사람에게 반응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첫 개시를 해서 만족스러웠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이다.

한지호는 지나가는 직장인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대상을 저했다.

일단 대상을 정한 뒤에는 무작정 돌진해서 말을 걸었다.

때로는 무시를 하고, 잡상인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K대 한의학과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한약에 관심을 보였다.

바쁜 출근길이라 오래 이야기는 못해도 청우단 한 알을 받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테헤란 로에 나와 1시간 넘게 뛰어다닌 한지호는 4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청우단을 건넸다.

그는 앞으로 이틀 동안 남은 60알을 다른 장소에서 나눠줄 계획이었다.

테헤란 로 말고도 직장인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몇 곳 있다.

광화문과 여의도.

두 곳에서 청우단을 각각 30알 씩 나눠주면 1차 목표 달성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여도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이 있다.

한지호는 창대한 미래를 꿈꾸며 미약하지만 알찬 걸음을 시작했다.

열심히 청우단을 나눠준 그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땀 흘려 노력한 사람만 보여줄 수 있는 뿌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

사흘에 걸친 씨앗 뿌리기가 끝났다.

테헤란 로, 광화문, 여의도의 멀끔한 직장인들에게 청우단 100알을 모두 나눠준 한지호는 노력을 할 만큼 했다.

이제 그가 만든 씨앗이 싹을 틔울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마 100명 중 대다수는 청우단을 받고도 복용하는 걸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됐건 청우단을 제대로 먹는다면 효능이 남다르다는 걸 느낄 게 분명했다.

그 효능을 우연이라 넘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청우단을 더 복용하길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지호는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물론 휴식이 자취방에 누워 뒹굴 거리는 게 아니다.

그는 전생의 기억 속 규호의 능력을 100%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릿속의 능력을 몸으로 익혀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오금희(五禽戱)다.

오금희는 화타가 창안한 전설적인 무공을 뜻한다.

다섯 가지 동물인 호랑이, 곰, 원숭이, 사슴, 새의 모습을 흉내 내서 만든 무공이다.

단순히 동물 흉내를 낸 것이라면 전설로 불릴 리 없었다.

오금희는 각기 다른 다섯 동물의 동작과 특징을 인체와 절묘하게 부합시킨 도인술이다.

오금희의 형태만 따라 해도 평생 잔병치레 없이 튼튼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한지호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작정이었다.

오금희는 본래 무공(武功)이다.

제대로 수련하면 삼국지의 쟁쟁한 장군들 못지않게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다.

부천 천사원에서 솟아났던 괴력도 오금희의 호공(虎功)이 본능적으로 발휘된 결과였었다.

호랑이 울음을 터트리며 덩치 큰 용역들을 제압했던 게 오금희 덕분이었다.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을 깨달은 김에 오금희를 본격적으로 수련하고자 했다.

천하제일의 의술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게 목표지만 무공도 익혀둘 필요가 있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냉정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라는 건 천사원의 일만 봐도 알 수 있다.

양아치 같은 건설회사 용역들의 횡포 앞에서 법은 절대 약자들의 편이 아니었다.

한지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사건을 대비해 오금희를 수련하려는 것이다.

전생의 규호는 의원이었기에 오금희를 깊이 익히지 않았었다.

전쟁터에서 가끔 호신술의 용도로 사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한지호는 최대한 높은 경지까지 수련해보고 싶었다.

현대의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꾸는 무공을 익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고 기대됐다.

“그럼 몸이나 풀러 나가볼까.”

허름한 추리닝을 입은 한지호가 자취방 밖으로 나왔다.

청우단을 다 나눠줘서인지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자취방이 있는 연남동 부근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무공을 수련할 장소가 꽤 많았다.

24시간 북적이는 홍대와 가깝지만, 연남동 인근은 어둠이 드리워지면 굉장히 조용해지는 동네다.

한지호는 복잡한 골목을 지나쳐 공사장 근처의 공터에 도착했다.

아파트 기초공사 현장 부근의 공터라서 인적이 드문 곳이다.

다른 생각에 빠져 동네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공터인데 무공을 수련하기 딱 알맞았다.

조명 하나 없는 공터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불량 학생들이 모여들어 몰래 담배를 피우면 어울릴 공간이지만, 이런 후미진 공터에는 학생들도 발길을 두지 않는 모양이다.

“후우-.”

한지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공터 중앙에 섰다.

깊은 숨을 마시고 내뱉는 것이 모든 무공 수련의 출발점이다.

호흡이 안정되면 몸도 안정되기 마련, 한지호는 잡념을 던지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 우두커니 서서 숨쉬기에 집중한지 10분 쯤 지났을까.

드디어 몸의 기운이 단전으로 착 가라앉으며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한지호는 두 손의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발톱처럼 만들었다.

호랑이의 앞발을 흉내 낸 채 자세를 낮춘 그가 오금희 수련을 시작했다.

다섯 동물 중에서 호랑이의 모습을 따서 만든 호공(虎功)부터 익히려는 것이다.

부천 천사원에서 본능적으로 펼쳤던 적이 있기에 동작이 낯설지 않았다.

‘한 마리 호랑이가 된 것처럼……. 지금 이 순간, 나는 맹수의 제왕이다!’

마인드 컨트롤을 한 한지호가 오른팔을 뻗었다.

부우웅-

허공을 휘저은 팔에서 바람 소리가 울렸다.

머릿속에는 오금희의 모든 수련 과정이 뚜렷하게 각인 돼 있었다.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을 따라 한 마리 호랑이로 변화하는 중이었다.

중심을 낮춘 자세는 진짜 맹수인 호랑이와 닮았다.

호랑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경박하게 날뛰지 않는다.

대신 한 번 앞발을 휘두르면 걸리는 모든 것을 박살내는 흉폭한 제왕이다.

오금희의 호공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위압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보법(步法)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한 순간에 근력을 폭발시켜 상대를 제압하는 게 호공의 원리다.

어슬렁어슬렁 공터를 돌던 한지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빠박!

종아리 근육이 딱딱해지면서 양 발로 땅바닥을 박찼다.

순식간에 튀어 오른 몸이 먹이에게 달려드는 호랑이 같았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보여준 한지호의 오른팔로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집중됐다.

일시적으로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이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한지호는 모든 힘을 싣고 팔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허공이 갈리며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만약 사람이 맞았으면 뼈도 못 추릴 파워였다.

‘힘이 샘솟고 있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작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단전에 기운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오금희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섯 가지 성질의 내공이 쌓이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내공도 깊어지고, 오금희의 파괴력도 더해질 것 같았다.

한바탕 호공을 수련하며 땀을 쏟아낸 한지호가 자리에 멈춰 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