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화 (2/255)

# 2

잠시 망설이던 마리아 수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천사원이 철거 될 수도 있단다.”

“네?”

예상을 뛰어넘는 말에 한지호가 눈을 크게 떴다.

마리아 수녀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 동네가 재개발 지역으로 확정되면서 주인분이 건설 회사에 땅을 파셨다는구나.”

“그래도 법으로 임차인이 보호를 받을 수 있을 텐데요. 무조건 나가라고 하지는 못 할 겁니다.”

“법이야 그렇지만… 어디 세상 일이 법대로만 되겠니. 건설회사에서 한 달 안에 나가라고 했고, 벌써 그 기한을 넘겼단다.”

“한 달……. 이사할 곳은 못 구하셨죠?”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어디든 임대료가 워낙 비싼 걸 잘 알잖니.”

“일단 어디든 적당한 곳을 구하세요. 모자라는 임대료는 제가 보탤게요.”

한지호가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상황이 어렵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요양병원에서 월급을 받으면 천사원을 도우려 했었다.

한지호는 그나마 자신이 전역을 한 뒤에 이런 일이 터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한 달 안에 나가라는 건설회사의 처사가 불만스러웠다.

아무리 재개발 지역이 됐어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

하지만 지금도 대한민국 곳곳에서는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괴롭힘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법은 언제나 가진 사람들의 편에 서있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법과 사회가 손을 내미는 경우는 드물다.

한지호는 누구보다 어렵게 대학교를 다니며 깨달았던 사회의 냉정함을 다시 한 번 체감했다.

쿠당탕탕-!

그때였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네 명의 천사원 아이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홍일점인 유초아의 목소리가 안방까지 들려왔다.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으아아앙……!”

막내인 초등학생 민우가 울음을 터트렸다.

마리아 수녀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한지호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야?”

마당으로 나온 한지호는 검은 정장을 입은 덩치들이 서있는 걸 확인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한 남자 세 명이 우악스럽게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 오빠…….”

유초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나머지 아이들도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한지호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뒤이어 방에서 나온 마리아 수녀가 입을 열었다.

“이사할 집을 구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드렸잖아요.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이렇게까지 하시면 안 되지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마리아 수녀가 남자들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동네 건달처럼 보이는 남자 셋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마리아 수녀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몇 번을 말해, 몇 번을! 기한 지나갔으니까 짐 빼라고, 안 빼면 강제로 내보내겠다고 했지?”

“아무리 그래도 갈 곳도 못 정했는데 이렇게 급하게…….”

“그거야 우리가 알 바 아니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남자가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유초아와 세 명의 아이들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보다 못한 한지호가 앞으로 걸어 나가 사내들을 제지했다.

“이렇게 겁주고 협박해도 되는 겁니까?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세요.”

“넌 또 뭐하는 새끼야? 뭔데 참견이냐고!”

“여기서 자란 사람입니다. 책임지고 빠른 시일 안에 이사할 테니 아이들 앞에서 소란 그만 피웠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자랐다고? 너도 고아 새끼구만.”

“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닙니까?”

한지호가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는 고아라는 말에 무척 민감했다.

어린 시절부터 심한 차별을 받았고, 보육원 출신이라면 다들 색안경을 끼고 봤기 때문이다.

면제 사유가 있음에도 굳이 공중보건의로 근무를 한 건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병원 이력서에 공중보건의나 군의관 경력이 없으면 질문을 받을 것이고, 그럼 고아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그게 싫어 3년을 국가에 바친 한지호에게 사내의 모욕은 참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한 덩치씩 하는 남자 셋은 낄낄거리며 한지호에게 다가왔다.

“말이 지나친데 뭐?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이 고아 새끼야!”

“나는 고아지만 너네처럼 힘없는 사람 괴롭히며 살지는 않아.”

“뭐라고? 이 새끼가!”

꽈악!

앞장선 남자가 한지호의 멱살을 잡았다.

지켜보는 천사원 아이들은 겁에 질려 소리도 내지 못했고, 마리아 수녀 역시 어쩔 줄을 몰랐다.

남자 세 명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이제 어쩔 건데?”

“수녀님, 경찰에 신고하세요.”

한지호는 멱살이 잡힌 상태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사실 경찰에 신고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리아 수녀가 급히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진짜로 경찰을 부르자 사내들은 그제야 물러갈 것 같았다.

한지호의 멱살을 풀어준 남자가 눈알을 부라리며 엄포를 놓았다.

“앞으로 사정 안 봐줄 거니까 알아서들 해. 나갈 때까지 매일 찾아올 테니까!”

한창 연장자인 마리아 수녀에게 끝까지 반말로 협박을 한 남자들이 등을 돌렸다.

갑작스런 불청객들의 난동은 이렇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천사원에서 나가던 남자 셋 중 한 명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유초아를 쳐다봤다.

“흐흐흐, 갈 곳 없으면 말해. 이 오빠가 넌 특별히 재워줄 테니까.”

떡대 같은 남자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유초아의 뺨을 어루만진 순간, 꾹 참고 있던 한지호도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부웅-

한지호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유초아의 뺨을 만진 남자에게 무작정 달려든 것이다.

1장, 더럽고 치사한 세상 (2)

쿠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어났다.

한지호는 유초아를 만지며 헛소리를 한 사내를 붙잡고 뒹굴었다.

용케 덩치 큰 사내를 쓰러트린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사내 말고도 두 명의 덩치들이 남아있었다.

“뭐여?”

“이 미친놈의 고아 새끼가!”

두 명의 덩치들은 동료와 뒤엉켜 구른 한지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동료를 끌어내고 한지호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퍽! 퍼억!

말 그대로 구둣발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두 팔로 얼굴을 감쌌지만 어깨와 등이 발에 차이며 참기 힘든 모멸감과 통증이 몰려왔다.

“지호야, 지호야-!”

“오빠!”

“으아아아앙!”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하는 한지호의 귓가로 마리아 수녀, 유초아, 천사원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무조건 천사원을 비우고 나가라는 건설회사, 그 회사를 등에 업고 난동을 피우는 양아치들.

그리고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발길질보다 더 뼈아팠다.

세상은 늘 힘없는 사람에게 냉정하고 잔인하다.

어엿한 한의사가 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도 그는 아이들과 수녀님을 지키지 못하고 양아치들에게 밟히고 있었다.

투둑-

평생 쌓인 울분이 심장을 건드린 것일까.

가슴에서 뭔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하얀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혼자 움직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 호랑이 같았다.

갑자기 그 남자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 오금희(五禽戱)를 잊었단 말인가! -

그 호통을 듣는 순간, 대책 없이 밟히고 있던 한지호가 두 팔을 뻗으며 일어났다.

“으허허헝!”

한지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호랑이 울음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깜짝 놀란 덩치 한 명의 뺨을 후려쳤다.

퍼엉!

콰당타타탕-

뺨을 맞는 덩치가 끈 떨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괴력의 펀치를 날린 한지호가 남은 한 명을 노려봤다.

“어… 이, 이게… 도, 돌았나!”

예기치 못한 일에 사내가 말을 더듬었다.

한지호는 손가락을 쫙 펴고 사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호랑이가 사냥감을 발톱으로 내리 찍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꽈아악-

“으아아악!”

사내가 어깨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걸 보니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다.

“허억! 허억!”

덩치 세 명을 모두 쓰러트린 한지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돌아봤다.

울먹이던 천사원 아이들과 마리아 수녀도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한지호 본인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는 운동이나 싸움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대체 어떻게 덩치를 세 명이나 쓰러트렸는지 믿어지지 않았고,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그때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경찰들이 천사원 안으로 들이닥쳤다.

한지호가 덩치들과 싸우기 전에 마리아 수녀가 신고를 했고, 절묘한 타이밍에 경찰들이 도착한 것이다.

“신고 받고 출동했습니다. 무슨 일… 아니?”

덤덤한 얼굴로 들어온 경찰이 천사원 마당에 널부러진 덩치들을 발견했다.

뒤따라 들어온 경찰도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살펴봤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분명 무서운 사람들이 행패를 부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상황은 정반대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깍두기 머리 세 명이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고, 평범한 체격의 한지호가 그 사이에 혼자 서있었다.

설마하니 50대를 넘긴 수녀와 천사원 아이들이 덩치들을 쓰러트렸을 리 없다.

경찰 두 명은 한지호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협박을 해서…….”

한지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쓰러졌던 사내가 한지호의 말을 끊었다.

“우리는 그냥 건설사의 지침을 통보하고 가려는데 저 사람이 막무가내로 두들겨 팼습니다. 제 동료들 턱 돌아가고, 어깨 나간 것 좀 보십시오!”

양아치들이 경찰에게 호소하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사내의 말을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실제로 덩치 한 명은 턱이 돌아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어깨를 부여잡고 끙끙거렸기 때문이다.

폭행의 흔적이 있는 이상 조사를 해야 한다.

경찰은 한지호와 사내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일단 여기 있는 남자 네 분 모두 서로 가서 조사를 받으셔야 될 것 같습니다.”

한지호는 졸지에 폭행 가해자가 되게 생겼다.

괴력이 솟아나 덩치들을 때려눕힌 건 맞지만, 전후사정을 보면 누가 나쁜 사람인지는 명확하다.

그러나 경찰들은 자세한 사정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저 사람들이 먼저 위협을 하고 우리 초아에게 음흉한 말을 했어요. 그래서 지호가 나선 겁니다, 경찰분들.”

마리아 수녀가 다급하게 설명을 했지만 경찰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자세한 사정은 서에 가서 조사하겠습니다. 일단 폭행 사건이니 연루된 당사자들은 모두 동행해야 합니다.”

“아아…….”

마리아 수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천사원 아이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만 유초아는 자기 때문에 한지호가 나서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호 오빠…. 어떻게 해요, 이제…….”

“괜찮아. 조사만 받고 올게. 아이들 잘 다독이고, 수녀님 모시고 있어.”

한지호는 짐짓 의연하게 말했다.

아직도 쓰러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덩치들과 같이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 모양이다.

일이 복잡하게 꼬였지만 그의 머리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얀 도포를 입고 호통을 친 남자는 누구였고, 갑자기 솟아난 괴력은 또 무엇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갑시다.”

한지호는 경찰에게 팔을 잡혀서도 머릿속에서 호랑이처럼 움직이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가 자신에게 호통을 친 순간 온몸에서 힘이 차오르던 느낌이 생생했다.

“오금희…….”

한지호는 오금희를 잊었냐는 호통을 곱씹으면서 경찰차에 탔다.

예기치 못한 일이 연달아 터진 오늘 하루가 어떻게 끝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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