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화 (1/255)

# 1

프롤로그(prologue)

붉은 비단과 빛나는 황금으로 장식된 드넓은 대전에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서있었다.

애꾸눈의 대장군 하후돈, 철혈의 무장으로 불리는 조인, 천하제일의 명궁으로 추앙받는 하후연까지.

한 사람만 나서도 천하를 벌벌 떨게 만드는 장군들이 같은 자리에 모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그들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대전 중앙에 앉아있는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사내가 감히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의 주군인 조조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기 때문이다.

“규호라고 했던가? 화타의 제자로서 의술에 도가 텄다고 들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걸쳐 앉은 조조가 입을 열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에서 천하를 움직이는 효웅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웬만한 사람은 마주보기만 해도 숨이 턱 턱 막힐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규호라고 불린 젊은 사내는 조조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대답했다.

“일천한 재주에 불과합니다.”

“그 일천한 재주로 주태를 고치고, 관우의 팔을 낫게 만들었다고 들었건만. 사실이냐?”

“사부님의 말씀을 따라 수족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규호가 조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神醫)로 알려진 화타는 나이가 들어 직접 의술을 펼치기 힘들다.

그를 대신해 제자인 규호가 주태를 고치고, 독화살이 박힌 관우의 팔에서 뼈를 긁어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눈앞의 규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유능한 의원인 셈이었다.

조조는 묘한 표정으로 규호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너의 사부인 화타는 내 머리를 열어야 지긋지긋한 두통이 낫고 천수를 누릴 수 있다하였다. 나를 죽이려 수작을 부린 것이냐, 정말로 머리를 열어야만 두통을 고칠 수 있는 것이냐?”

“머리를 열어 가득 찬 화기를 빼내는 것만이 승상의 두통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정말인가?”

“의술을 익힌 자로서 환자에게 거짓을 말하진 않습니다.”

“환자라? 하하하, 하하하하!”

규호의 당돌한 말에 조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규호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더 솔직히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머리를 열거나 말거나 승상은 천수를 누리지 못 할 겁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을 규호가 내뱉었다.

황제를 꼭두각시 삼아 천하를 다스리는 승상 조조에게 천수를 누리지 못 할 거라니, 그의 뒤에 서있던 장군들이 격분해 칼집을 잡았다.

“이놈이 감히-!”

“승상, 저놈의 목을 베겠습니다!”

하후돈과 조인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다.

하후연은 말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규호의 목젖을 노려봤다. 화살로 목을 꿰뚫고 싶은 모양이다.

수십만의 군사를 지휘하는 대장군 세 명의 살기가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하지만 조조는 나서지 말라는 듯 팔을 뻗었다.

그의 눈빛은 규호에게 고정 돼 있었다.

“재미있구나. 너의 얼굴이 호랑이 상이니 의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내가 장수로 발탁했을 것이다.”

“…….”

“천수를 누리지 못 할 거라 했느냐? 나는 하늘이 정해주는 수명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저 군략을 짜는데 방해되는 두통을 없애고 싶을 뿐.”

참으로 조조다운 말이었다.

이 시대에 하늘을 부정하고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조조밖에 없다.

규호는 일개 의원(醫員)의 신분으로 그런 조조와 맞부딪친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님을 풀어 주십시오, 승상.”

“아랫것들이 화타의 목숨을 원한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내 머리를 열라고 하였는데 살려둘 수 없는 노릇 아니더냐?”

“하오나-!”

“너는 자유롭게 천하를 주유해라. 화타와 함께 죽이기에는 너무 재미있는 놈이지 않은가.”

조조는 화타의 제자인 규호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뒤에 서있는 세 명의 장군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작 자유를 얻은 규호도 만족한 표정은 아니었다.

뜻 모를 미소를 짓는 조조와 당당하기 그지없는 규호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

“아-! 또 개꿈이잖아.”

침대에서 일어난 한지호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새벽 3시, 더 자야하지만 너무 생생한 꿈 때문에 잠이 달아났다.

시골 보건소에서 근무하며 책장에 꽂힌 삼국지를 여러 번 읽어 꿈에서도 삼국지 영웅들이 나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상한 꿈을 자주 꾸는 건지도 모른다.

한의대에서 6년을 공부하고, 공중보건의로 군복무를 시작한지 3년.

20대를 다 보내고 29살이 된 한지호가 사회로 돌아갈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제 며칠이면 느리게 돌아가는 병무청 시계를 쳐다보는 생활도 안녕이다.

한지호는 사회로 나가서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다.

그는 요즘 부쩍 자주 꾸는 생생한 꿈 내용을 뒤로하고 현실의 고민에 파묻혔다.

전역 할 기대에 부푼 한지호는 아직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1장, 더럽고 치사한 세상 (1)

“와! 서울 공기가 이렇게 맑았었어?”

길거리에서 두 팔을 쫙 뻗은 한지호가 탄성을 터트렸다.

인구 천만 명이 몰려있는 대도시 서울의 공기가 맑을 리 없다.

중국에서 건너온 황사와 미세먼지까지 더해져 서울의 공기를 탁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막 3년의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치고 병무청 소속에서 벗어나 민간인이 된 한지호에겐 서울 공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군부대에서 고생하는 장병들에 비하면 공중보건의는 무척 편한 보직이다.

의대와 한의대 출신만 누리는 특권에 가깝다.

하지만 비교적 편하다고 해도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시골 보건소에서 보내는 건 힘든 일이다.

오랜만에 도시의 공기를 만끽한 한지호는 거리에 지나다니는 여자들이 모두 예뻐 보였다.

빡센 공부의 연속이었던 6년의 한의대 생활에 이어 3년간 남자의 의무까지 털어냈으니 홀가분한 게 당연했다.

스물아홉.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20대의 끝자락을 새롭게 맞이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홍대 근처 연남동에 작은 원룸도 구했고, 전역하기 전부터 지원서를 넣었기에 다음 달부터 요양병원에서 한의사로 근무하게 됐다.

경기가 어려워 한의사 월급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일반 직장인보다는 낫다.

학자금 대출을 갚으면서 착실하게 돈을 모으고, 그동안 즐기지 못했던 소소한 취미 생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푼 마음으로 거리를 가로지른 한지호는 빵집 간판 앞에서 멈춰 섰다.

“어서 오세요, 손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빵집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한지호는 짐짓 호기롭게 말했다.

“소보루 빵 있는 거 다 주세요.”

“네?”

“여기 있는 소보루 빵 다 살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굴에 화색이 돈 빵집 주인이 서둘러 움직였다.

한지호는 주인이 소보루 빵을 커다란 봉투에 담는 동안 다른 빵을 이것저것 집었다.

소보루 빵을 포함해 온갖 종류의 빵을 한가득 사서 나온 한지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오뚝한 콧대로 잘 생겼다는 소리 꽤나 들은 한지호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다소 사나워 보일 수도 있는 인상이 유쾌한 미소에 가려져있었다.

빵집 근처의 정류장에서 경기도로 가는 버스를 탄 한지호는 내내 기분이 좋아보였다.

통장 잔고도 얼마 없는데 빵을 잔뜩 사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를 태운 버스는 꽉 막힌 도로를 뚫고 서울의 경계선을 벗어났다.

빵이 든 봉투를 움켜쥐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한지호가 내릴 준비를 했다.

버스가 목적지인 부천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부천에서도 약간 외곽 지역에 내린 한지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여러 번 와본 것처럼 길을 찾지도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낡고 외진 건물을 발견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은 사람처럼 얼굴에 설렘이 묻어났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바로 이곳, 부천 천사원이 한지호의 고향집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수녀님, 저 왔어요!”

제대로 된 현관문도 없는 낡은 단독주택의 마당으로 들어간 한지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윽고 허름한 주택 안에서 네 명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 나왔다.

“지호 형? 지호 형이다!”

“오빠-!”

가장 어린 초등학생 남자 아이가 한지호의 한쪽 팔에 매달렸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다른 아이들도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잘 있었어? 많이들 컸네.”

한지호는 빵이 든 봉투를 건네주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 곱게 나이 든 수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지호 왔니?”

“네, 수녀님! 3년 동안 시골 어르신들께 봉사하고 민간인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래, 그래.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50대로 보이는 수녀가 기특하다는 듯 한지호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마치 아들에게 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사실 한지호는 수녀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비롯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천사원에서 자라났다.

마리아 수녀가 없었다면 다들 비뚤어진 길로 갔을 것이다.

“지호 형아, 이제 자주 볼 수 있는 거야?”

한지호의 팔에 메달린 초등학생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이제 자주 놀러 올 테니 기대해.”

“아싸-! 맨날 맨날 지호 형아랑 놀아야지!”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한창 사춘기인 중학생 남자 두 명과 예사롭지 않은 외모의 여자 고등학생도 한지호가 마냥 반가운 모양이었다.

“빵 많이 사왔으니까 먹고들 있어. 소보루 빵 좋아하지? 엄청 사왔어. 나는 수녀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나올게.”

“네, 오빠. 수녀님이랑 이야기 하고 오세요. 애들 데리고 빵 먹고 있을게요.”

천사원에 사는 네 명의 아이 중 홍일점인 여고생이 차분하게 말했다.

한지호는 여자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준 후 수녀를 쳐다봤다.

“수녀님, 직접 타주시는 유자차가 마시고 싶어요.”

“얼마든지 타줘야지. 그동안 지난 이야기도 나누자꾸나.”

수녀와 한지호가 안방이라 부를만한 곳으로 들어갔다.

남은 아이들은 갖가지 다른 빵을 꺼내 소박한 파티를 즐겼다.

드르륵-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미닫이 문을 닫은 한지호가 방바닥에 앉았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수녀와 마주앉은 그는 따뜻하고 푸근한 기운을 느꼈다.

수녀가 직접 타온 유자차의 향기가 넓지 않은 방을 감쌌다.

“정말 고생이 많았어. 이제 진짜 사회인이 된 걸 축하한다, 지호야.”

“요양병원에서 일 시작하면 매달 조금이라도 수녀님께 보내 드릴게요.”

“말이라도 고맙구나.”

“진짜에요. 마리아 수녀님이 안 계셨다면 제가 지금처럼 한의사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천사원에 남은 네 명이 전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조금씩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요.”

한지호의 진심어린 말에 마리아 수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때 천사원에는 열 명 넘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후원이 끊겼고, 천사원 운영 자체가 힘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몇 몇 아이들은 제 발로 나갔고, 또 몇 명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시설로 보내야만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갓난아기 때부터 마리아 수녀의 품에서 자란 한지호가 어느새 한의사가 됐다.

어엿하게 성장한 한지호의 진심은 힘들게 천사원을 지킨 마리아 수녀를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마리아 수녀의 얼굴에서 깊은 근심이 엿보였다.

눈치 빠른 한지호가 수녀의 얼굴에 깃든 근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수녀님?”

“아니다. 네가 이렇게 잘 커서 도움을 준다니 감격해서 그러는 거야.”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아서요. 저한테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한지호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사나우면서도 강단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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