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진정한 운명의 지배자 (2) [완결] >
이미 운명의 전사들을 은밀히 배치해 두었기에 사실 재윤이 나서지 않아도 외계인들은 나타나는 즉시 몰살당할 것이다.
그런데 천마는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내 말은 단순히 방어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왕들을 이끌고 그놈들을 박살낸 후 곧바로 본거지를 공격할 생각이다만.”
어딘지 모를 외계인들의 행성.
그들의 운명은 이제 재윤의 한 마디에 좌우될 것이다.
이 순간 재윤이 수락하면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비참한 종말이 펼쳐지고 말 테니까.
‘사부님의 말씀에 확실히 일리가 있어.’
재윤은 그냥 지구를 공격해오는 외계인 함대를 전멸시키는 방어적 태세를 취했지만, 외계인들이 이후에 또 다시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 번거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본거지를 완전히 박살내버려야 한다.
삭초제근 (削草除根).
지구를 선전포고조차 없이 멸망시켜버리는 그런 악한 종자들이라면 인정사정 따위는 봐줄 필요가 없으리라.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그러자 천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차원 포탈을 생성하도록 하마. 적당한 위치가 있겠느냐?”
마계와 지구를 연결하는 대규모 차원 포탈의 생성.
이는 수십 명의 마왕이 힘을 합쳐야 생성이 가능하지만, 천마는 손짓 한 번으로 가볍게 그것을 생성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에 대해서는 운명의 군주인 재윤의 승인이 필요했다.
차원 포탈이 마구 생겨나면 자칫 차원계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좀 그렇고 달이나 화성이 적당할 것 같군요.”
“어디든 상관없다. 어차피 그 정도 환경을 견디지 못하는 녀석이라면 외계인 녀석들과 싸우는 건 불가능할 테니 말이야.”
마계의 마물들 중에는 우주의 극한 환경 속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녀석들이 적지 않았다.
말 그대로 우주 괴물들.
천마는 그런 괴물급 마물들 위주로 대규모 군단을 편성한 후 화성에 차원 포탈을 생성시켰다.
곧바로 1명의 상마왕과 20여명의 마왕들, 그 휘하 우주 전투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수천여 명의 마족들과 수십만의 마물들이 차원 포탈을 통해 화성에 진영을 구축했다.
“곧 이곳 항성계로 우주선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주선들을 빼앗고 그놈들의 본거지 좌표를 알아내도록 해라.”
“명을 받듭니다.”
천마의 명이 떨어지자 마왕들은 즉각 지구는 물론이고 태양계의 곳곳에 광대한 스캔 마법을 펼쳐두었다.
비록 재윤에게는 한 방 거리도 되지 않는 마왕들이지만 그거야 재윤이 운명의 힘을 가진 특별한 존재여서일 뿐이다.
마왕이 달리 마왕이겠는가.
어지간한 세계는 하나의 마왕, 그것도 그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그의 권속 마족들 중 일부만 나서도 멸망시켜버릴 수 있다.
그런데 무려 20여 명의 마왕들이 나섰으니.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적을 순식간에 쓸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천마가 선호하는 전투 방식이었다.
며칠 후.
지구를 향해 워프를 해온 일단의 우주 전함들은 지구의 대기로 진입하기 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강제 소환되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외계인들 대부분이 몰살당했고, 그마나 살아남은 이들은 마왕들의 권속이 되어야 했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주 전함들은 마왕군을 태우고 외계인들의 본진을 박살내기 위해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다.
***
한편 재윤은 조용히 평온한 일상을 즐겼다.
이민철, 장예찬과 함께 삼겹살 파티도 했고 부모님과 산책을 하기도 했다.
지구를 멸망시키려던 외계인들에 대한 문제는 천마가 알아서 처리하고 있는 터라 더 이상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천마가 외계인들의 행성으로 출격하기 전 전리품이라며 우주 전함 한 대를 재윤의 아공간으로 보내왔다.
현재 지구의 과학 기술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간 이동이 가능한 우주선.
특히나 이 전함에는 외계인 우주 함대의 사령부가 위치한 터라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재윤은 아공간을 얼마든지 확장시킬 수 있어 이런 거대한 우주 전함을 보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참 나, 내가 우주선을 다 가져보는군. 이걸로 심심할 때 우주 여행이나 해볼까?’
물론 우주선이 없어도 사실 그가 원하면 어디든 공간 이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것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이 우주 전함은 조종사나 승무원이 없어도 초고도 인공지능 시스템이 알아서 모든 걸 처리하는 식이었다.
귀룡처럼 그냥 명령만 하면 알아서 이동하는 터라 재윤이 조종에 일일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전에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가서 만나봐야겠다.’
스윽.
자신의 방 안에 들어온 재윤은 벽을 향해 손가락으로 자그만 문을 그렸다.
그러자 벽에 푸른빛의 신비한 문이 생겨났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존귀하신 로드를 뵈어요.”
“위대하신 군주 강재윤 님을 뵙습니다.”
광장에 있는 이들이 재윤을 향해 공손한 예를 취했다.
이곳은 운명의 공역 내 부유섬 중 하나에 새로 건설된 거대 도시 『희망』의 광장이었다.
아직 파괴된 세계가 복구되지 못해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이곳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애초부터 이들은 지구와는 다른 시공간의 세계에서 살고 있던 터라 이번 시간 회귀에서 제외되었다.
운명력의 한계로 인해 이들의 세계들까지 모두 시간 회귀를 통해 이전의 상태로 만들기란 불가능한 일.
그저 부서진 세계를 복구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세계를 복구하는 일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용사 루니스와 마법사 로벨은 물론이고 로사엔을 비롯한 엘프들, 재윤이 직접 만나보지 못했던 무수한 종족들도 이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런 만큼 이곳 도시에는 그들이 불편없이 지낼 수 있는 주거시설은 물론 각종 편의시설 등이 즐비했다.
“로드! 오셨군요.”
그때 아루넬이 백색 날개를 펼친 채 재윤 앞에 날아내렸다.
운명의 공역에서 중임을 맡게 된 그녀는 이전보다 활기차 보였다.
재윤은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이곳엔 별일 없지, 아루넬?”
“네. 로드께서 명하신 대로 각 관리자들은 파괴된 세계들을 복구하고 있어요.”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거점 섬들로 이동하실 건가요?”
“아니, 오늘은 이곳 도시에 있는 동료들을 만나보려고 왔어.”
“그럼 제가 수행하겠어요.”
“좋을 대로.”
“어디부터 안내할까요?”
“루니스의 집부터 가자.”
도시 희망에 위치한 용사 루니스의 집.
루니스는 재윤이 운명의 군주가 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공로가 있는 터라 관리자들이 특별히 신경써 그녀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집은 크고 화려한 저택이었다.
“군주 강재윤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러자 저택의 뒤뜰에서 검술 수련을 하고 있던 붉은 머리의 미소녀 루니스가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달려와 예를 취했다.
“루니스가 위대하신 운명의 군주 강재윤 님을 뵙습니다.”
“땀을 흘리는 걸 보니 수련 중이었나보군요.”
“네, 달리 할 일이 없어서요.”
“어디 불편한 점은 없나요?”
“전혀요. 배려해주신 덕분에 너무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아요.”
루니스는 울상을 지었다.
용사인 그녀는 편안한 도시 생활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괴물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긴장된 삶이 그녀의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긴장감이 없었다.
더구나 파투아가 파괴해버린 라넨 대륙의 복구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그녀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을 이곳 도시 희망에서 지내야 한다.
지루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수련 뿐.
그래서 밤낮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재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역시 예상대로군요. 이런 줄 알았으면 외계인들과 전쟁이 벌어질 때 합류시킬 걸 그랬어요.”
“네? 전쟁이 있었다고요?”
루니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러다 지구를 침략해온 외계인 우주 함대와 마계 군단 간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무척이나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또 그런 전쟁이 벌어지면 저도 불러주세요.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그보다 조만간 우주 여행을 떠날 생각인데 그때 같이 갈 생각이 있나요?”
그러자 루니스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반드시 저를 불러주세요.”
“알았습니다.”
우주 여행을 하는데 혼자서만 갈 수는 없는 일.
여럿이 함께 가야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다음은 로벨의 집으로.”
계속해서 재윤은 마법사 로벨, 흑룡 데카투스, 그리고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인 고블린 세붐, 엘프 로사엔, 라이칸슬로프 제칸 등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다.
물론 그들 모두 재윤이 우주 여행을 한다는 말에 반색했다.
잠시 후 재윤은 도시 희망을 떠 나 환계(幻界)로 이동했다.
아름다운 호수 근처에 위치한 바위.
그 위에서 신비한 백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귀엽게 생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앉아 있었다.
외모로만 치면 10대 후반의 소녀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물론 환선이었다.
“제자 재윤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재윤이 불쑥 나타나 인사를 하자 반색하며 미소 지었다.
“네가 한 번쯤 올 줄 알았다. 운명의 군주가 되었다니 정말 장하구나.”
“모두 사부님 덕분입니다. 무엇보다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천마가 내게 선과를 선물했단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덕분에 생명력이 회복되었지.”
“천마 사부님은 이제 더 이상 악마가 아닙니다. 완전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 마계를 통제하고 계시니 안심하세요."
재윤은 그간 있었던 일을 환선에게 상세히 얘기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나 또한 그 우주 여행에 함께 가자고 온 것이구나.”
“예, 사부님을 빠뜨릴 순 없죠.”
환선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흔쾌히 여행에 합류했다.
***
잠시 후 재윤은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방의 한쪽 벽에 환한 차원 게이트가 반짝이고 있었지만 보통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대충 우주 여행에 갈 일행은 다 모은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츠으으.
벽의 차원 게이트가 일렁이며 누군가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색의 머리 아래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
등 뒤로는 투명한 빛의 날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곧바로 그녀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운명의 공역 제1거점 프리뭄의 관리자 테네르, 위대하신 로드를 알현합니다.”
다름 아닌 테네르였다.
재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갑자기 말도 없이 테네르가 그것도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으니까.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러자 테네르가 일어나 뭔가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로드께서는 저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물론 그랬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근데 왜 저는 빼놓고 가시는 거죠?"
재윤은 순간 테네르가 무엇 때문에 속이 상했는지 짐작했다.
‘이런! 그러고 보니 깜빡했네.’
아무리 테네르가 파괴된 세계의 복구 임무를 맡았다지만, 그녀가 빠진다 해도 다른 관리자들이 있으니 한동안 우주 여행을 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재윤이 다른 동료들은 모두 데리고 우주 여행을 가는데 정작 테네르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자 무척이나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널 빼고 가긴.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어. 우주 여행 갈 거지?”
“물론이죠.”
테네르의 표정이 언제 토라졌냐는 듯 급격하게 밝아졌다.
“그나저나 기왕 왔으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게 어때?”
“그것도 좋아요.”
매일 초코바만 줬을 뿐 테네르에게 제대로 맛있는 음식을 줘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동안 고생 정말 많이 했으니 맛있는 것 좀 사주자.’
운명력을 이용해 만들어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밖으로 나가 그녀가 먹고 싶은 걸 실컷 사주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테네르는 신이 나는 표정이었다.
“그럼 어서 나가요, 로드.”
“잠깐! 너 그대로 나갔다가는 난리가 날 거야. 날개는 감추고 옷도 이곳 스타일로 바꿔봐. 그 후광도 좀 없애고."
“네, 잠깐만요.”
그녀는 즉시 운명의 공역 관리자 특유의 신비한 기운을 감췄다.
날개도 숨기고 캐주얼한 옷을 둘렀다.
그런데 그렇게 날개가 사라지자 늘씬한 몸매와 함께 특유의 미모가 더욱 돋보였다.
“어때요?”
“다들 네 얼굴만 쳐다보겠다.”
“그럼 얼굴을 가릴까요?”
“아니, 뭐 어때? 내 여자 친구라고 모두에게 자랑해야지.”
그러자 테네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