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 절대 장벽은 없다 (3) >
파투아는 본래 절대 장벽에 도전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바보같은 짓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같은 무리를 하지 않았어도 지금껏 그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없었다.
각성한 천마조차도 그의 안배 하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각성자 중에서 그를 위협할 만한 이가 나타났다.
심지어 그 각성자는 황당하게도 절대 장벽의 한계마저 깨뜨렸으니.
다름 아닌 강재윤이라는 인간이었다.
‘그놈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누군가 했다면.
누군가 갔던 길이라면.
바로 그 사실이 파투아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 길이 무조건 소멸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
한낱 인간 따위가 갔던 길이라면 자신도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공교롭지만 그같은 확신은 파투아가 벽을 돌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위협이었다.
비록 제1거점 프리뭄은 점령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여섯 개의 거점을 점령한 그는 지금껏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만큼 위협적인 존재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절대 장벽을 넘어선 괴물같은 녀석이 나타난 이상 이대로라면 그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요인이 극적으로 작용해 지금껏 불가능이라 여겼던 장벽을 허물어뜨렸다.
‘큭! 이런 경지가 존재했다는 건가…….'
그는 방금 전에 비해 적어도 두 배는 자신이 강해졌음을 느꼈지만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니 왠지 허탈한 마음에 실소를 흘렸다.
이런 길이 있는지도 모른채 오래도록 허송세월을 보낸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더 큰 경지를 향한 시작일 뿐.’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을 나와 세상을 본 기분이 이럴 것인가?
지금껏 절대적인 영역이라 여겼던 경지가 방대한 세상 속의 일개 우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파투아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럼 저놈은 어디까지 이른 건가?’
절대 장벽을 넘어선 천외천의 세계.
그 세계에서 과연 재윤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그는 궁금했다.
장벽만 넘어서면 재윤과 동등한 수준에 이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경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자 그는 재윤을 확실히 이긴다는 자신을 할 수 없었다.
한편 재윤 또한 파투아의 기세가 달라진 걸 보고는 단번에 그가 벽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필이면 지금?’
뭐 이런 공교로운 경우가 다 있나 싶었지만, 사실 그 역시 이런 식으로 절대 장벽을 돌파했던 터라 실소가 나왔다.
‘결국 내가 도움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군.’
재윤이 오늘 끝장을 내기 위해 오지 않았다면 파투아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 테고, 지금처럼 절대 장벽을 극적으로 돌파하는 행운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파투아가 재윤을 향해 말했다.
“한 가지 제의를 하고 싶은데 들어줄 용의가 있느냐?”
그가 말을 하는 순간 주변의 모든 사물이 사라졌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오직 재윤과 파투아만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만들어낸 결계였다.
절대 장벽을 넘어선 두 초월자의 전투는 주변의 모든 걸 파괴하고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무슨 제의를 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굳이 싸울 필요가 있느냐 해서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생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공생을 하자?”
“그렇다.”
파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결계를 펼쳐 놓았지만 막상 전투를 벌이면 이 따위 결계는 금세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럼 그 여파는 너와 나의 부하들은 물론 운명의 공역 전체에 미치게 된다. 우리 중 누가 이긴다 해도 실익은 없다는 뜻이야.”
이겨봤자 상처 뿐인 승리다.
싸우지 말고 서로를 인정하자는 것.
“어차피 네가 원하는 건 지구가 아니더냐? 이번처럼 불완전한 회귀가 아니라 완전한 회귀가 이루어지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그렇게 되면 지구는 각성자가 나타나기 직전의 시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결국 지구를 본래 상태로 돌려줄테니 서로 동맹을 맺자는 얘기.
“우리의 동맹이 영원히 유지될 거라 생각하나?”
“물론 언젠가는 깨어지겠지. 결국 우리는 다시 싸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당연한 법칙이다.”
“당연한 법칙?”
파투아는 오연히 웃으며 끄덕였다.
“이 무한한 세상에서 완전한 평화는 없다. 너 또한 우리가 그저 우물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내 말에 실감할 것이다. 우물 밖의 세상에는 우리보다 강한 존재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다시 싸우게 될 거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너와 나, 둘 중의 하나만 살아남는다 해도 결국 언젠가 다른 적이 나타난다. 그때 가서 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나, 우리의 동맹이 깨어져 다시 싸우게 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재윤은 담담히 웃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
“내 말을 알아듣는 듯하니 다행이구나. 과거는 묻어버리고 동맹으로서 협력해 외부의 적과 싸워나간다면 우리는 이곳 운명의 공역을 영원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파투아는 재윤이 동맹을 수락했다 생각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재윤이 문득 물었다.
“그보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지구를 그꼴로 만든 이유가 뭐냐?”
물론 이미 테네르를 통해 듣긴 했다.
소량의 운명력을 투자해 대량의 운명력을 회수하기 위해서라고.
그래도 그는 파투아로부터 그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물론 운명력 때문이다.”
“역시 그런 것인가?”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니야.”
“또 다른 이유가 있었나?”
그러자 파투아가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지구는 내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순간 파투아가 손을 슥 휘저었다.
스스스.
그러자 사방 공간이 뒤바뀌며 거대한 환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지구였다.
마치 SF 영화를 보듯 환상은 거대한 지구를 멀리서부터 비추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새 환상은 한국의 서울을 비추고 있었다.
수많은 빌딩들 사이로 차량들이 빽빽이 늘어선 채 움직이고 있는 모습.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서울의 광경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상공에 정체불명의 거대 우주선들이 나타났다.
번쩍! 번쩌쩍-
그리고 그 우주선에서 번개와 같은 광선이 내리비추는 순간 지상에 있던 모든 것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콰아앙! 쾅!
아무런 통보도 없었다.
날벼락이라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게다가 우주선들의 공격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동시에 자행되고 있었다.
“지금 대체 뭐하는 거지?”
지구를 공격한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하더니 갑자기 웬 SF 영화를 보여준다는 건가?
재윤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묻자 파투아가 큭 웃었다.
“이건 그냥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다. 네가 아직 가보지 않은 지구의 미래다. 그것도 불과 수일 정도에 불과한 가까운 미래 말이야. 그렇게 지구의 인류는 저 녀석들에 의해 멸종을 하게 된다.”
“지금 그 따위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믿거나 말거나 너의 자유다. 하지만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시간대에서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니까.”
파투아는 오연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즉, 지구는 어차피 끝장날 상황이었던 거지. 나는 그 시간대를 며칠 거슬러가 어차피 망할 지구에서 운명 에너지를 조금 얻으려 했을 뿐이야.”
재윤은 잠시 침묵했다.
정말로 그게 지구의 또 다른 운명이었다는 말인가?
황당하긴 하지만 과학자들이 예측한 지구 멸망 시나리오에 보면 항상 단골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외계인의 공격이었다.
우주의 어딘가 존재하는 지구보다 훨씬 고도의 과학 문명을 가진 외계인들.
그들이 지구를 식민지로 삼거나 혹은 어떤 에너지원으로 삼기위해 공격을 해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벌어졌다는 건가?
그것도 지구가 운명의 힘에 의해 괴상하게 변하지 않았다면 그 시점을 기준으로 불과 며칠 이내에 벌어질 일이었다니.
“그렇다면 왜 그놈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은 거냐?”
파투아가 시간을 며칠 거슬러와 운명의 힘으로 장난을 쳤다 치자.
그렇다 해도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다면 우주선들이 나타나 지구를 공격했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거야 그놈들을 내가 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야말로 지구를 구해준 영웅이라 할 수 있다.”
파투아는 뭔가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재윤은 실소를 흘렸다.
“천만에! 너는 그저 너의 먹잇감을 노리는 다른 맹수를 쫓아버린 것이겠지.”
“어찌됐든 나로 인해 지구의 인류는 완전히 멸종되지 않고 일부가 살아남았다. 너 또한 내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지구가 외계인들에 의해 멸망할 운명이었다면 재윤은 파투아로 인해 살아남은 것이니까.
또한 그가 운명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파투아가 시간을 거슬러와 지구의 운명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파투아의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시간을 거슬러와 외계인들을 쫓아버리고 지구를 구해주기만 했다면 정말로 고마운 일이겠지만, 그 또한 외계인들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즉, 파투아에게 지구는 탐스러운 먹잇감이었을 뿐이다.
재윤은 파투아를 노려봤다.
“그보다 대충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게 어때?”
“본색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애초부터 넌 나와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운명의 군주들은 병존하지 못한다. 둘 중 하나가 죽거나 혹은 굴종해야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야.”
순간 파투아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재윤이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즉, 나의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해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었지. 지금쯤은 그 판단이 끝났을 테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두 개의 선택지.
재윤을 이길 수 있다면 싸우는 것이고, 승산이 없다면 굴복하는 것이다.
“크하하하하! 역시나 눈치가 아주 빠른 녀석이로군.”
파투아가 크게 웃었다.
“네 말대로다. 나는 처음부터 너 따위 녀석과 동맹을 맺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너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봤을 뿐이야.”
“그래서 결론은?”
재윤이 담담히 웃으며 묻자 파투아는 두 눈을 섬뜩하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똑같이 절대 장벽을 돌파한다고 해도 그 경지는 천차만별이다. 나는 네가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해도 진지하게 동맹을 생각해봤을 것이다. 아무리 운명의 군주가 병존할 수 없다 해도 말이야.”
곧바로 그의 오른 손에 태양과 같은 광채가 뿜어져나오는 붉은 소검이 생겨났다.
“하지만 너는 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비록 내가 너보다 늦게 벽을 돌파했지만, 그 깨달음의 경지는 너 따위가 따라올 수 없는 지고한 수준에 있기 때문이지.”
“과연 그럴까?”
“이제 그 격차를 보여주마.”
파투아가 소검을 앞으로 뻗는 순간 재윤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녹기 시작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녹아버린 것이다.
“보았느냐? 이게 바로 너와 나의 격차이니라.”
파투아는 단번에 재윤을 처치하자 기분이 유쾌한 듯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멈췄다.
그의 표정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네놈이 어떻게?”
녹아 사라졌던 재윤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놀란 것은 단순히 재윤이 다시 나타나서가 아니었다.
재윤의 기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도 강해졌기 때문이다.
“파투아, 내가 너의 쓸데없는 잡설을 들어준 이유가 뭐라 생각해?”
“그럼 네놈도?”
“물론이다.”
사실 재윤도 파투아가 절대 장벽을 통과하자 상당히 긴장했다.
그래서 짐짓 파투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며 그의 실력을 가늠해보았다.
물론 자신의 기세는 최대한 감춘 상태로 말이다.
츠츠츠츠!
재윤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그 자리에 푸른 광채의 검 한 자루만 나타났다.
물론 그것이 검의 형체와 흡사하긴 하지만 검이 아니었다.
재윤이 가진 모든 능력이 그같은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이니까.
초월자인 그에게 더 이상 검술이나 환술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것을 본 파투아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어떻게 저런?’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그는 전력을 다해 소검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소검을 중심으로 마치 초신성이 폭발하는 듯한 광채가 일어났다.
화아아아악!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소멸시켜버리는 파멸의 빛!
파투아가 자신의 모든 운명력을 끌어올려 펼치는 것인만큼 그 위세는 가공스러웠다.
그러나 그 빛의 폭풍은 마치 사과가 과도에 의해 갈라지듯 푸른 광채의 검 앞에 무력하게 쪼개졌다.
“크으으윽!”
붉은 빛의 폭풍이 꺼지듯 사라졌다.
동시에 만신창이 형상의 파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비통함과 허무함이 교차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먼지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