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 운명의 군주 (3) >
한지성은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지구가 갑자기 괴상하게 변했을 때 그의 가족은 운 좋게 안전지대를 발견했지만, 곧바로 안전지대 보호막이 사라지며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안전지대의 각성자라고는 이민철 뿐.
그런데 하필 그는 밖에 나가 있었다.
한지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민철을 찾아 나섰지만 좀비들의 습격에 죽을 상황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 나타나 당시에는 무척이나 귀했던 생명력 회복 물약을 아낌없이 선뜻 건네준 존재.
그가 바로 재윤이었다.
그리고 그는 위기에 처한 한지성의 가족들도 모두 구해줬다.
그 이후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한지성은 재윤으로부터 가장 처음 받았던 그때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았다.
“당연히 지원해야지요. 재윤이 형! 보잘 것 없는 저의 힘이라도 필요하다면 달려가겠습니다.”
재윤이 긴급히 도움을 요청한다는 알림이 뜨는 순간 한지성은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한지성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한태진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이정숙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그렇게 한지성의 가족들은 모두 재윤을 지원했다.
한때 안전지대 기적의 관리자였던 이경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재윤이 아니었다면 오재석 패거리로부터 엄마와 누나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재윤은 가족을 지켜준 영원한 은인이었다.
[이나연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채시은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최지석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이어서 채시은과 최지석을 비롯한 희망 성의 생존 공동체 일원들.
도시 초승달의 각성자들 뿐 아니라 비각성자들도 재윤을 향해 자신들의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신지영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전수영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이나라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
47개 도시 연맹의 각성자들도 가세했다.
운명력이 쌓인다는 알림이 끝도 없이 재윤의 귀를 울렸다.
[데카투스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데사오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리타니아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뜻밖에도 흑룡 데카투스와 마왕 데사오의 이름도 보였다.
게다가 최상급 마족인 리타니아까지.
기대하지 않았던 이들도 재윤에게 기꺼이 힘을 보태주고 있었던 것이다.
[전상훈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자크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카론이 당신을 지원합니다.]
[랴그라드가 당신을 지원합니다.]
......
그 사이에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들의 이름이 계속 울렸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재윤은 가슴이 진정으로 벅차 올랐다.
이렇게까지 많은 이들이 자신을 믿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와아! 대단해!”
테네르는 이 상황에 경악하면서도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죄수로 있는 이들까지 모두 본래의 능력을 회복하게 될 거야."
가장 먼저 수용소의 간수장 테르툼이 운명의 공역 제3거점 테르티움의 관리자로서의 능력을 회복했다.
거대 크로거 형상이었던 테르툼의 주위로 빛의 폭풍이 휘돌더니 그의 모습이 점차 작아지며 금발의 청년으로 변했다.
[제3거점 관리자 테르툼이 당신의 휘하에 들어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간수장들 중 다섯 명이 각각 운명의 거점 관리자로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제4거점 콰르툼의 관리자 카리나스가 당신의 휘하에 들어왔습니다.]
[제5거점 퀸툼의 관리자 레둠이 당신의 휘하에 들어왔습니다.]
[제6거점 섹스툼의 관리자 사루나가 당신의 휘하에 들어왔습니다.]
[제7거점 셉티뭄의 관리자 셉티우스가 당신의 휘하에 들어왔습니다.]
동시에 수용소에 갇혀 있던 1만여 괴물 죄수들도 운명의 거점을 지키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대부분 느껴지는 기세를 보니 최상급 마족 이상의 전투력이었다.
일부는 마왕 못지 않은 기세가 느껴졌고, 극소수이지만 상마왕 정도의 기세를 뿜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 정도면 해볼만하겠군.’
그때 테네르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파투아가 이곳의 위치를 발견했어. 조만간 이곳을 공격할 거야.”
“지구가 전장으로 변한 건가? 완전히 엉망이 되겠군.”
“운명의 공역이 이곳까지 확장된 상태라 프리뭄의 전장이 생성될 거야.”
“프리뭄의 전장?”
테네르는 끄덕였다.
“운명력에 의해 생성된 전장을 의미해. 방대한 결계가 펼쳐지는 만큼 전쟁의 여파가 전장 밖으로 미치지 않아.”
“그건 다행이네.”
“그보다 이 전쟁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으니 조심해.”
“지켜보는 이들이라니, 그들이 누군데?”
“그대가 운명의 군주가 된 순간부터 그들은 그대를 죽이고 운명의 힘을 빼앗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어.”
재윤의 두 눈이 빛났다.
“어쩐지. 아까부터 알 수 없는 기운들이 어디선가 느껴진다 했더니 바로 그놈들인 건가?”
“잠시 후 프리뭄의 전장이 생성되면 먼저 그들이 그대에게 도전을 해올 거야. 그들에게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주지 않을 경우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어.”
“대체 어디에서 온 거지?”
“차원계를 누비며 약탈을 하는 사악한 초월자들이야. 어디서 왔는지는 나도 몰라.”
재윤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났다.
“한 마디로 강도들이네. 그런데 왜 그동안 잠자코 있었지?”
“파투아를 두려워하고 있어서야. 저들은 파투아에게는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운명의 공역 주변을 맴돌고 있었거든. 어쩌면 파투아가 먼저 그대의 힘을 빼놓기 위해 저들을 보냈을 수도 있어.”
그 말은 곧 파투아보다 약한 자들이라는 뜻.
재윤에게는 아주 좋은 경험치 덩어리임을 의미했다.
‘잘됐네. 잘하면 파투아가 오기 전에 레벨을 올릴 수도 있겠어.’
그는 레벨의 한계라 불리는 Lv99를 돌파했다.
Lv100이 된 순간 레벨의 한계는 사라졌고, 경험치가 쌓이면 레벨이 또 오를 수 있다.
물론 그러러면 상상을 초월한 많은 경험치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스스스스.
그 사이 수용소의 주변에는 방대한 크기의 전장이 생겨났다.
프리뭄의 전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장이 생성된 순간 일단의 무리들이 안으로 진입했다.
“오래도록 숨겨져 있던 신비의 거점 프리뭄의 주인이 드디어 나타났군.”
“하지만 하찮은 인간인 그대가 운명의 군주로서 운명의 힘을 지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프리뭄을 넘겨라. 그러면 우리가 그대를 보호해 주겠다.”
재윤은 그들을 담담히 노려봤다.
그중 가장 약한 자라 해도 상마왕 정도는 가볍게 쓰러뜨릴 만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러나 각성한 천마에 비견될 만한 이는 없었다.
이전의 천마 정도의 능력을 풍기는 자들은 몇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이제 막 운명의 군주가 된 재윤을 만만하게 보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재윤은 항상 습관적으로 자신의 기세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든 듯 기고만장한 표정이었다.
재윤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말이 긴 것 같군. 보호 따위는 필요없다. 이곳에 온 이상 너희들은 한놈도 살아돌아가지 못한다."
츠으읏!
곧바로 재윤이 쥐고 있는 플루토의 검신이 짙푸른 검강으로 휩싸였다.
쒸이이익!
그는 플루토를 신비한 은발을 가진 청년을 향해 던졌다.
“큭! 감히 이 따위 공격을?”
청년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마치 블랙홀과 같은 흑색의 구멍이 생겨났다.
그 구멍은 플루토를 빨아들이고는 사라졌다.
그는 순식간에 공간의 아득한 어딘가로 플루토를 날려버린 것이다.
“이제야 너와 나의 격차를 알겠느냐?”
은발 청년은 오연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앞으로 흑색의 구멍이 다시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짙푸른 광채를 가진 검이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피할 사이도 없었다.
촤아악!
청년의 몸은 순식간에 두 쪽이 나버렸다.
“으아아악!”
처참한 비명과 함께 연기로 변해 흩어지는 청년을 보며 다른 약탈자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놀랄 틈이 없었다.
어느새 그들 각각의 앞에도 짙푸른 광채에 휩싸인 검들이 나타나 공격을 해오고 있었으니까.
운명의 검 플루토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사실 재윤이 환선공(Lv100)을 통해 만들어낸 환검(幻劍)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전의 천마 정도의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면 받아낼 수 없는 재앙과 같은 공격!
그런데 재윤의 공격은 환검뿐이 아니었다.
그중 강력한 적들에게는 초월환령검(Lv100)의 무형검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크아아아악!”
“으아악!”
약탈자들은 맥없이 쓰러졌다.
뒤늦게 재윤의 전투력이 그들의 예상을 초월함을 깨닫고 도주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무형검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그들의 몸을 쪼개버렸다.
‘뭐냐? 레벨이 그대로네.’
재윤은 어이가 없었다.
‘초월자들을 백 명도 넘게 죽였는데.’
최소 한 단계의 레벨은 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뭔가 이상해.’
그는 이제 굳이 알림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경험치가 들어오는 건 확인했다.
초월자 하나를 해치울 때마다 초대량의 경험치가 계속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의 경험치라면 이미 레벨이 올랐어야 정상이었다.
《 큭! 제법이구나. 하지만 너는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을 몸에 흡수했다. 그 결과는 곧 파멸이지. 》
그때 누군가의 뜻이 재윤을 향해 전해왔다.
재윤은 직감적으로 그가 바로 또 다른 운명의 군주 파투아임을 알 수 있었다.
《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은 없다. 너 또한 곧 죽여주마, 파투아! 》
그러자 파투아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 어리석은 놈! 내가 왜 그놈들을 계속 놔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아무리 운명의 군주라 해도 그 힘의 한계는 존재하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소멸되어 버린다. 그게 바로 운명의 법칙! 너는 이제 스스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하다 소멸되게 될 것이다. 》
파투아의 조소가 귀를 울렸지만 재윤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츠으! 츠츠츳!
초월환령검을 터득한 그로서도 통제가 불가능한 불가사의한 힘!
지금까지 그의 의지에 의해서만 발동하던 마기와 환력이 갑자기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으윽!’
마기와 환력이 모두 칼날처럼 날카로운 물체로 변해 몸을 마구 찢어발기는 듯 했다.
그로부터 밀려드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으으윽! 버텨야 해.’
정신을 잃으면 끝장이었다.
그의 몸은 폭발할 것이고, 그것은 곧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니까.
그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 운명의 힘을 지원해 준 모든 이들도 소멸될 것이다.
또한 테네르를 비롯한 거점들의 관리자들과 힘을 되찾은 운명의 전사들은 모두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로써 파투아는 손하나 대지 않고 운명의 공역을 완전히 접수하게 될 것이다.
‘젠장! 그러니까 폭탄을 나에게 안겨준 것이었나?’
초월자들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 바로 파투아의 의도였다.
경험치의 폭탄!
100레벨이 되면 한계를 돌파해 무한하게 성장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인가?
《 큭! 이제야 눈치챘나 보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자들이라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절대 장벽이 있다. 그 누구라 해도 절대 장벽을 넘어서는 힘을 가지는 순간 팽창한 풍선이 터져버리듯 끔찍한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파투아는 매우 친절하게도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스.
곧바로 프리뭄의 전장에는 신비한 황금발을 흩날리는 멋들어진 용모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파투아.
또한 전쟁신을 비롯한 수많은 부하들이 그의 뒤로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그 상황을 지켜보는 테네르가 탄식하며 몸을 떨었다.
완전한 승리를 자신했는데 전혀 상상도 못했던 반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재윤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바닥에 쓰러진 채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었는데, 그의 몸은 거미줄처럼 균열이 일어나며 계속 갈라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불과 1분도 안 되어 처참하게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미 운명의 전사들은 힘을 거의 잃고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테네르 또한 운명의 힘을 통제할 능력이 사라졌다.
운명의 군주인 재윤이 쓰러진 순간 그녀의 능력도 흩어져버린 것이다.
“프리뭄의 관리자 테네르! 이제야 너를 찾았구나. 감히 끝까지 내게 대항한 죄를 물어 너에게는 아주 특별한 징벌을 내려주마.”
테네르를 노려보는 파투아의 눈빛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었다.
“테네르를 징벌하라!”
그러자 뒤에 있던 마왕 하나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로드.”
그는 본래 천마의 부하였지만, 지금은 천마의 능력을 흡수한 파투아의 부하였다.
“크크크! 각오해라.”
마왕이 키득거리는 수십 개의 촉수를 날려 테네르의 몸을 휘감았다.
촥! 촤아악!
“으윽! 놔! 이것 놓지 못해?”
시커먼 촉수들이 몸을 휘감자 테네르는 기겁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괴물이 바로 촉수 괴물들이었다.
툭! 투투툭!
그런데 그때 갑자기 테네르를 휘감은 촉수들이 무참히 끊어지더니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그녀를 향해 촉수를 날렸던 마왕이 뭔가에 의해 무참하게 부서졌다.
“크아아아악!”
처참한 비명과 함께 수십 조각의 고깃덩이가 되어 널브러지는 마왕의 사체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재윤이었다.
만신창이 상태였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 상태였다.
그는 몸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며 파투아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