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나를 따르라! (1) >
갑자기 킨디노스 성의 상공에 나타나 운명의 힘이 감싸고 있던 아성을 단번에 날려버린 가공스러운 존재.
그는 다름 아닌 천마였다.
“다, 당신은?”
순간 상마왕 데라티오가 천마를 알아봤는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왕 데라티오! 마존을 뵈옵나이다.”
거대한 오크 전사의 형상을 가진 그는 그 즉시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바닥에 쿵 박았다.
그 뒤를 이어 수십 명의 마왕들도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졌다.
슥.
천마가 고개를 돌려 재윤을 내려다봤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느냐?”
마치 마신(魔神)과도 같은 가공스러운 기세.
재윤은 숨이 막혀 서 있기도 어려웠다.
‘이전보다 더 강해지셨다.’
설마 그가 본래의 모든 능력을 회복한 것일까?
‘그래도 다행히 내 정체를 알아보지는 못하시는군.’
마경심법을 활성화하기 직전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천마는 재윤을 마왕의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쿵.
재윤은 그대로 예를 취하며 외쳤다.
“마왕 나룬, 마존을 뵈옵니다.”
그 사이 데사오도 천마를 보고는 경악한 표정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마왕 데사오, 마존을 뵈옵니다.”
그러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마계에서 마왕들 간의 모든 전쟁을 금한다.”
순간 상마왕 데라티오가 크게 외쳤다.
“마존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유불문.
천마가 말하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
천마가 현신한 이상 마계는 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상마왕 데라티오를 비롯한 수십 명의 마왕은 그대로 엎드린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마존의 명을 받듭니다.”
재윤도 그렇게 외쳤다.
이 순간 천마의 뜻을 거스리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 마왕들을 죽이더라도 일단은 천마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일이 좀 묘하게 됐네.’
재윤은 이 상황이 아주 나쁘지 만은 않았다.
천마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이 모든 실력을 드러냄으로 천마에게 정체를 간파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천마가 등장해 마왕들 간의 전쟁을 금지시킴으로 인해 재윤은 천마에게 자신의 정체를 감출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천마의 의도였다.
그가 갑자기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
킨디노스 성은 천마에 의해 점령되었다.
사실 점령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재윤이 마왕 나룬으로서 천마의 부하가 되었기에 그가 점령한 킨디노스 성이 자연스레 천마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된 상황.
“이제부터 너희들이 싸울 상대는 파투아라는 놈들이다. 운명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건방진 녀석들이지. 자세한 상황은 제라뭄에게 듣도록 하라.”
천마는 재윤과 데사오, 그리고 상마왕 데라티오를 비롯한 수십 명의 마왕들에게 이같은 말을 한 후 사라졌다.
그리고 재윤 등의 앞에 흑색 후드를 눌러쓴 3미터 장신의 마왕 하나가 나타났다.
상마왕 제라뭄.
마계에 존재하는 4명의 상마왕 중 가장 강한 존재라고 알려진 전설적인 마왕이었다.
그가 이미 천마의 부하가 되어 그의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건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이미 마존께서 명하셨지만 다시 당부하겠다. 이제부터 너희 마왕들간의 전쟁은 금지된다. 사소한 분쟁이라 해도 마존의 분노를 받을 수 있음을 잊지마라.”
그러자 상마왕 데라티오가 물었다.
“대체 마존께서는 언제 현신하신 것이냐?”
제라뭄이 슥 고개를 돌려 데레티오를 쳐다봤다.
“그건 나도 모른다. 확실한 건 이제부터 우리는 마존께서 언급하신 파투아 놈들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파투아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군.”
“아까 마존께서 말씀하셨듯 운명을 자칭하는 단체의 이름이 파투아다.”
“그놈들이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간 나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놈들을 공격할 방법이 없어서 지켜보고 있던 중이었는데, 과연 마존이시군. 단번에 그놈들의 거점 하나를 날려버리시다니 말이야.”
제라뭄이 끄덕였다.
“이미 마존께서는 파투아가 있는 세계로 가는 차원 포탈을 생성하는 방법도 알아내셨다.”
“그놈들만 모여있는 세계가 있다는 건가?”
“그렇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그곳으로 이동해 그간 배후에서 운명이라 자칭하던 놈들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마존의 뜻이다.”
그 순간 재윤도 깜짝 놀랐다.
‘그놈들이 있는 세계로 가는 포탈이라고?’
아루넬이 말한 운명 시스템의 일부를 조종해 세상을 자신들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자들.
그들이 모여있는 단체의 이름이 파투아라는 사실을 재윤 또한 처음 알게 됐다.
‘그러고 보니 파투스와 비슷한 이름이군.’
재윤이 각성자가 되어 얻은 전투 능력은 오직 파투스를 통해서만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파투아라는 단체가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천마가 그곳으로 향하는 차원 포탈을 열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천마 사부님의 능력은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게 분명해.’
이곳 킨디노스 성에 위치한 운명의 거점을 단번에 박살내버린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재윤도 작정했으면 진작 그 거점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운명을 무시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위력을 가진 병기 플루토가 있으니까.
그러나 천마는 그런 병기가 없이도 그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그게 가능했다.
‘어쨌든 앞으로 이 상황을 잘 이용해야 한다.’
천마의 명령으로 마왕들간의 전쟁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는 부모님을 비롯해 이곳 마계로 이동된 지구의 생존자들을 지키기가 더욱 수월해졌음을 의미했다.
지금은 재윤의 관할 하에 두고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상태인데, 외부의 다른 마왕들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때 제라뭄이 재윤을 향해 말했다.
“나룬! 네가 점령하고 있는 이곳 킨디노스 성은 이제 운명과의 전쟁에 대비한 주요 거점이 되었다. 또한 파투아의 거점이 박살난 이상 여기 있는 차원 포탈은 더 이상 지구라는 세계가 아닌 파투아가 있는 세계로 연결될 것이다.”
이곳 성의 차원 포탈이 파투아와 연결된다니 놀라운 일.
‘그럼 지구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건가?’
이미 데사오로부터 지구가 인간이 살 수 없는 극한 환경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전해 들었다.
따라서 지구의 생존자들이 그 전에 마계로 이동한 건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놈들이 장난을 친 거니 그놈들만 없애면 본래로 돌아가겠지.’
재윤은 파투아를 박살내고 나면 다시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만약 지구가 영원히 그 상태라면 어쩔 수 없이 마계에서 살아야겠지만.
***
며칠 후 천마가 다시 킨디노스 성에 나타났다.
그는 재윤이 환계에서 봤을 때보다 더 젊어진 상태로 지금은 30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붉게 변했고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색.
다만 눈빛은 혈마였을 때처럼 맑았다.
간혹 탁하게 이글거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의 눈빛은 담담함을 유지했다.
츠으으으!
그는 킨디노스 성에 오자마자 차원 포탈을 향해 마기를 발출했고, 그 순간 포탈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안정되더니 높이 50미터, 폭은 20미터 정도되는 거대한 게이트가 생겨났다.
파투아로 향하는 차원 포탈 게이트가 생성된 것이다.
그 사이 킨디노스 성에는 상마왕 제라뭄과 데라티오뿐 아니라 상마왕 마크나스, 상마왕 이베르칸도 도착했다. 아
울러 수백 명의 마왕들이 속속 킨디노스 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투아와의 전투에서는 최소 상급 마족 이상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각각의 마왕들은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상급 마족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제 모두 나를 따르라.”
천마가 차원 포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상마왕들을 필두로 모든 마왕들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재윤과 데사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재윤은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최상급 마족 리타니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리타니아, 너는 이곳에 남아서 내가 시킨 임무를 계속 수행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로드.”
리타니아는 이제 재윤 휘하 마왕군의 참모가 된 터였다.
그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지구의 생존자들을 잘 지켜주라는 것.
이유불문하고 명령을 받은 이상 그녀는 최선을 다해 그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츠으으읏! 화아아악!
차원 포탈 게이트를 통과하자 나타난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땅이 존재하지 않는 공역(空域)의 공간.
뒤쪽으로는 방금 전 빠져나온 거대한 차원 포탈 게이트가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다.
“제라뭄! 데라티오! 너희들은 각각 1군단과 2군단을 이끌고 차원 포탈이 파괴되지 않도록 철저히 방어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천마는 상마왕 제라뭄과 데라티오를 비롯한 1백여 명의 마왕들을 차원 포탈 근처에 잔류시켰다.
그들 각각의 마왕들이 끌고온 마족들까지 포함하면 대략 2만여 명의 병력이었다.
“그리고 마크나스와 이베르칸! 너희들은 3군단과 4군단을 이끌고 나와 함께 파투아의 기지를 공격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공역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섬과 같은 곳에 파투아의 기지가 한 곳 있다고 했다.
천마가 미리 이곳에 들어와 정찰을 해둔 모양이었다.
천마는 각 4명의 상마왕들을 군단장으로 해서 4개의 군단을 편성했는데, 모든 마왕들은 부대장이 되어 그 4개의 군단 중 하나에 소속 되어야 했다.
재윤은 3군단 소속의 부대장.
3군단장은 상마왕 마크나스였다.
머리에 소와 같은 두 개의 뿔이 박혀 있고 엉덩이 뒤로 상당히 흉물스러워 보이는 촉수 꼬리가 있는 걸 빼면 눈이 번쩍 뜨이도록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외모였다.
다만 가슴과 성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기괴한 복장을 하고 있어 재윤으로서는 쳐다보기 당황스러웠다.
물론 마족들 중에는 그보다 더한 녀석들도 많아서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긴 했지만, 마크나스는 표정 또한 야릇하게 짓고 있었는데 특히 재윤을 보면 한쪽 눈을 찡긋 거리기도 해 도무지 부담스러워 견디기 힘들었다.
‘하여간 마계에는 별 변태같은 녀석들이 많다니까.’
그에 비하면 데사오는 그래도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또한 자존심도 상당히 강한 편인 터라 재윤이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 역시 이성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나룬! 데사오! 이리 오너라.”
그때 마크나스가 재윤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3군단에는 도합 48명의 마왕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재윤과 데사오도 그 중의 하나였다.
“마존의 명령에 의해 우리 3군단이 선봉이 되어 파투아의 기지를 공격할 거야. 너희들이 먼저 가서 놈들의 기지를 정찰하고 와라. 정찰을 훌륭히 마치면 너희들에게 아주 특별한 포상을 주도록 하마.”
마크나스는 특히 재윤을 향해 아주 야릇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특별 포상을 운운하는 걸 보며 재윤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정찰을 대충 대충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일단은 알았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재윤은 부대장이지만 부하 마족들이 따로 없었다.
혼자 움직이는 것이 편해 데사오에게 모두 일임시켰기 때문이다.
“가자, 데사오.”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하 마족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 출발한다. 적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라.”
“예, 로드.”
수많은 강한 마왕들 앞에서 풀죽어 있던 데사오는 재윤과 함께 따로 정찰을 나오자 기가 살아난 듯 표정이 밝아졌다.
“후! 숨막혀 죽는 줄 알았다. 이제 좀 살겠구나.”
그와 달리 재윤은 숨이 막히거나 하는 건 없었다.
작정하면 그는 상마왕들을 제치고 군단장이 될 수 있었지만 천마 앞에서 실력을 숨기기 위해 조용히 있던 것 뿐이니까.
‘세상 일은 정말 예측할 수 없다더니 내가 사부님과 함께 운명의 세력을 공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어깨의 짐이 많이 가벼워졌다.
혼자서 운명의 세력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나룬? 정찰을 하려면 저쪽이야.”
한편 데사오는 재윤이 멀리 있는 파투아의 기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어차피 정찰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미 공격은 시작되었으니까.”
재윤의 말대로였다.
그 사이 3군단과 4군단의 모든 병력이 파투아의 기지를 향해 진군중이었다.
“그럼 왜 정찰을 하라고 한 걸까?”
“그냥 그걸 빌미로 마크나스가 우릴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거겠지. 그러니 정찰을 대충하면서 상황이나 지켜보는 게 좋겠어."
그러자 데사오가 큭 웃었다.
“우리가 아니라 너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던데?”
“너도 눈치챘나 보군.”
“척보면 알지. 그냥 포기하는 게 좋아. 일단 마크나스의 눈에 찍히면 당하지 않을 수 없다고 들었거든.”
“나는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다.”
“강한 자가 모든 걸 지배하는 게 마계의 법칙. 네가 마크나스보다 약한 마왕인 이상 감내해야 할 거야. 나 또한 네게 그래야 하는 것처럼. 아니면 네가 마크나스보다 강해지면 돼.”
데사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지극히 마왕스러운 생각.
재윤은 만약 자신이 데사오보다 약했으면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싶었다.
한편 그 사이 파투아의 기지에서 대량의 병력이 쏟아져나왔다.
마왕들과 마족들로 이루어진 천마의 군대와 파투아의 운명 전사들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재윤은 파투아 세력의 선봉에 있는 거대한 전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 모습은?’
전신을 뒤덮은 신비한 갑주.
거검을 움켜쥔 채 오연히 서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미증유의 기세가 느껴졌다.
예전에 운명의 탑에서 재윤에게 천 번이 넘는 죽음을 경험하게 만들며 특별 수련을 시켜준 존재.
덕분에 재윤은 그때 전쟁신의 투혼을 배웠다.
‘설마?’
틀림없었다.
고대의 전쟁신(戰爭神).
그가 파투아 군단의 선봉에 나와 천마와 대치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