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 강한 자가 모든 걸 갖는다 (1) >
재윤은 아루넬을 통해 운명이라 자칭하는 놈들의 정체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진짜 운명이 아니었다.
시스템처럼 이루어진 운명의 힘을 일부 통제해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세상을 주무르려고 하는 사악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재윤의 능력은 그들이 파악하지 못한다.
그 자신의 정보가 담긴 운명의 돌을 재윤이 소유하게 되었으니까.
‘아직은 섣불리 정체를 드러낼 때가 아니다.’
조급하면 진다.
단번에 끝을 내려면 확실한 승산이 있을 때 놈들을 공격해야 할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나룬 님.”
마법진을 타고 아성의 최상층 아래로 이동하자 차원 포탈 관리자 비라델 등이 재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
“더 이상 아루넬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대신 다른 조건으로 변경하려 합니다."
재윤은 속으로 놀랐다.
‘예상대로 이놈들은 아루넬이 죽은 걸 이미 알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번거롭게 하는군. 그래서 다른 조건은?”
“당신들에게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강재윤의 부모와 그의 지인들을 최대한 곤경에 빠뜨려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하지 않았나?”
“강도를 더욱 높여달라는 뜻입니다. 원하면 그들 중 태반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순간 재윤의 표정이 싸늘히 변했다.
‘아루넬이 죽은 이상 나를 찾기가 더욱 불가능해졌겠지.’
따라서 부모님과 지인들을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만들어 그로 하여금 그들을 돕지 않을 수 없게 만들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꿈에도 상상못할 것이다.
바로 그 재윤이 지금 그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면 돌아가겠다.”
“그럼 좋은 결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은 결과라고?’
재윤은 뒤돌아서며 묘하게 웃었다.
‘꿈꾸지 마라. 너희들이 원하는 좋은 결과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아성을 빠져나온 재윤은 리타니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시 말하지만 지구의 인간들은 손도 대지마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리타니아는 재윤이 따로 뭔가 뜻이 있어서 그렇게 명령한다 여길 뿐, 설마 그가 사실은 강재윤이어서 그들을 보호하려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하오나 염려되는 일이 있사옵니다.”
그녀는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말해봐라.”
“그리 되면 운명의 존재들과 척을 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알겠사옵니다.”
리타니아는 재윤의 심중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냥 무조건 따르는 것만이 그녀가 살길이었기 때문이다.
* * *
처소로 돌아온 재윤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그놈들의 조건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놈들은 결국 다른 마왕들을 끌어들여 이곳을 치려하겠지.’
마왕 데사오를 끌어들여 마왕 하이루스를 제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거야 말로 재윤이 바라던 바였다.
95레벨에 이른 지금은 마왕들을 해치워야 빠른 레벨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왕들이 알아서 이곳을 찾아온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이 어디 있을까?
다만 곧바로 그들을 도발하지 않은 이유는 시간이 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곳부터 완전히 장악한 후에 해야 한다.’
킨디노스 성을 지키는 수십 만 마왕군을 손가락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위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왕군이 재윤의 소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데사오가 있는 한 참모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재윤이 가진 모든 권력은 바로 그녀로부터 나온 것이니까.
‘해결책은 하나 뿐. 마왕 데사오를 죽이고 내가 마왕이 되는 거다.’
마왕이 별거인가?
마계는 강자가 지배하는 세계다.
재윤이 데사오를 패배시키면 그가 마왕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리타니아는 이미 그렇게 되리라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데사오가 나오려면 아직 열흘은 더 있어야 할 테니.’
데사오가 스스로를 봉인한 상태로 숨어있는 이상 재윤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나도 전투에 대비하고 있자.’
상대는 마왕이다.
아무리 승산이 높다 자신해도 방심은 금물.
‘그러고 보니 안 열어본 상자가 있었지.’
마왕 하이루스를 해치우고 날개와 함께 얻은 상자를 아공간에 넣어뒀다.
[생명력 완전 회복 물약 5병을 얻었습니다.]
[파투스 완전 회복 물약 5병을 얻었습니다.]
[마왕의 심장(신화)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꺼내 열어보니 진귀한 물약들과 함께 마왕의 심장이라는 것이 나왔다.
* 마왕의 심장
-등급 : 신화(★★★)
-설명 : 마왕 하이루스가 죽으며 남긴 심장. 이 심장을 장착하면 마왕의 신체로 변해 기존보다 훨씬 많은 마력을 얻을 수 있다.
-장착 제한 : 레벨 95
‘마왕의 신체로 변한다고?’
[당신은 마왕의 심장을 장착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당신이 가진 마족의 심장은 마왕의 심장에 흡수되어 사라집니다.]
[마왕의 심장을 장착하겠습니까?]
‘이건 심장이 강화되는거라 보면 되겠군.’
본래라면 운명에게 본 실력을 감추느라 레벨 95 제한인 마왕의 심장을 장착하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잘됐어. 마족보다는 마왕의 신체가 훨씬 편하겠지.’
재윤은 즉시 마왕의 심장을 장착했다.
[당신의 신체가 마족체에서 마왕체로 바뀝니다.]
[당신은 마왕이 되었습니다.]
[특화 능력 마기 축적(A)이 마왕의 마력(S)으로 바뀝니다.]
[마왕의 마력이 Lv95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마기가 대폭 증가합니다 ]
하급 마족 나룬의 신체가 최상급 마족의 신체로 변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마왕의 신체가 되었다.
마왕의 마력(Lv95)은 마기 축적(Lv95)에 비해 마기의 위력도 강할 뿐 아니라 양도 몇 배는 더 많았다.
역시나 달리 마왕이 아닌 것이다.
‘마기의 양만으로 따지면 마경 심법 못지 않아.’
물론 그렇다 해도 그 위력은 마경 심법을 따를 수 없었다.
즉, 같은 S급 특화 능력이라고 해도 마경 심법(S)이 마왕의 마력(S)보다 훨씬 상위의 능력.
임의로 등급을 표시한다면 마경 심법은 SSS급 정도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진짜 마왕이 될 줄은 몰랐군.’
그냥 마왕을 해치우고 그 자리를 빼앗으면 마왕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운명의 힘에 의해 종족 자체가 마왕으로 변하고 말았다.
사실 마계에서는 후자의 경우만 진정한 마왕으로 인정된다.
마족이지만 마왕보다 강해져서 마왕의 자리에 오르면 그를 더 이상 마족이 아닌 마왕이라 칭하긴 하지만, 그래도 태생이 마족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종족 자체가 마왕인 존재들은 태생부터 마왕이니 설령 어딘가로 쫓겨가도 그들이 마왕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한편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스스로를 봉인한 상태로 마력을 회복 중인 마왕 데사오였다.
봉인 결계 속에서 그녀는 마력 회복에만 집중하고 있는 터라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마왕군이 위태한 상황에 처할만큼 강력한 적 즉, 다른 마왕이 나타났을 때는 즉시 감지하게 된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
‘분명 방금 전 마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도 참모인 나룬에게서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녀는 태생부터 마왕인 존재.
다른 마왕이 근접해 있으면 그것을 즉시 감지할 수 있었다.
마왕이 가진 특유의 마기.
그것은 마족의 마기와는 차원이 다르니 그녀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나룬이 갑자기 마왕이 되었지?’
마족이 마왕보다 강해질 수는 있어도 종족 자체가 마왕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마왕을 죽인 후 심장을 파먹는다고 해서 그의 신체가 마왕처럼 변하는 건 아니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은 채 킨디노스 성에서 벌어진 일들을 떠올렸다.
‘대체 지난 하루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녀의 권역이 된 곳이니 그녀는 시간을 회상하듯 상황을 살피는 것이 가능했다.
마족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누가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나룬 근처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이는 나룬이 가진 마기가 그녀를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주변 모든 상황을 통해 그녀는 나룬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놈은 운명과 협의한 것과 달리 인간들을 오히려 보호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는 리타니아가 다른 마족과 마물들에게 재윤의 명령을 전했던 상황을 그녀가 볼 수 있었기에 알아낸 내용.
리타니아는 무조건 명령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라 의문을 갖지 않았지만,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또한 아루넬이 리타니아에게 붙들려 나룬의 처소로 이동한 후 사라졌다.’
데사오는 여러 가지 의문점의 조각들을 연결해 하나의 퍼즐을 완성했다.
‘정말로 믿기 힘들지만 나룬이 그 인간 놈 아니면, 그놈의 하수인일 수도 있어.’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추측.
그러나 이는 그 사이 킨디노스 성에서 벌어진 모든 상황을 읽어들여 그녀가 추측한 것이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시간이 좀 더 주어지면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
재윤이 이미 그녀의 결계 밖에서 대기중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면 그는 분명 결계의 틈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놈의 마기가 나를 훨씬 능가하고 있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정면으로 붙으면 승산이 희박했다.
‘정말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그러나 그녀는 특유의 오연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결계의 틈을 열었다.
순간 재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마왕답게 대결을 피하지 않는구나, 데사오.”
재윤은 데사오를 제거하기로 작정한 터라 더 이상 그녀를 향해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데사오가 싸늘히 웃었다.
“내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너를 이 안으로 들였을 것 같나?”
“무슨 대비를 했다 해도 네가 죽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재윤의 좌수에서 붉은빛 거검이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동시에 날개의 촉수들이 방사형으로 퍼져나왔다.
각 촉수들의 끝도 이글거리는 광채가 생성되어 있었다.
‘맙소사! 저것은?’
그것을 본 데사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왕인 그녀도 그저 막연히 추측만 하고 있는 상위의 경지를 나룬이 지금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정말 기막힌 놈이구나.’
역시나 승산이 희박하다는 판단이 서자 그녀의 몸이 뒤로 빛살처럼 이동했다.
재윤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가 움직이는 속도 또한 빛살과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쫓아도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마치 데사오와 재윤이 일정 거리를 두고 서 있는데 공간이 계속 이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재윤이 노려보며 묻자 데사오는 특유의 도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무슨 대단한 행운을 얻어 나조차도 능가하는 마왕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그리 쉽게 당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란다.”
“그래봤자 결국은 시간 문제일 뿐. 너는 내게 죽는다, 데사오.”
“하지만 그때가 언제일까? 인간들의 시간으로 따지면 최소 몇 달은 걸릴 것이다.”
‘몇 달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마왕의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 안 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으로 따지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긴 시간.
특히 지금의 재윤에게는 이 정체불명의 결계 안에서 데사오 하나 죽이자고 몇 달이란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건 미친 짓이다.’
그 몇 달이면 운명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기 충분한 시간일 테니까.
‘그런데 이 결계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재윤이 운명의 힘을 통해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마왕이 되긴 했지만, 애초부터 마왕이었던 데사오에게는 마계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존재했다.
특히 마계 특유의 지형과 마기를 이용해 펼치는 결계진을 구사하는데 있어서 데사오는 특출난 능력이 있었다.
재윤이 결계의 흐름을 파악할 만하면 그녀는 그 즉시 결계를 변형시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고, 그러다보니 재윤은 그녀와의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너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나를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그러나 나 하나를 죽이기 위해 그 긴 시간을 들일만큼 네게 여유가 있을까, 강재윤?”
순간 재윤은 흠칫 놀랐다.
‘내 정체를 어떻게?’
데사오는 확신조로 말을 이었다.
“실로 대단해. 나를 속인 것도 모자라 운명 놈들까지 속이다니 ! 넌 정말로 그놈들과 싸울 생각이구나.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무모한 짓이다.”
“무모한지 아닌지는 두고봐야 알겠지.”
재윤은 담담히 대꾸했다.
순간 데사오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녀는 잠시 고심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무모한 일이긴 하다만 사실 나 또한 그 무모한 짓을 꾸준히 준비해왔다, 강재윤. 우리에게는 공동의 적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지금 동맹이라도 맺자는 거냐?”
“이전에는 네가 별것 아닌 인간일 뿐이라 너를 그저 하찮게 보았지만 지금은 나와 동등한 마왕이 되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마왕 대 마왕으로 동맹을 맺는 건 손해보는 일이 아닐 것이다.”
데사오는 뒤로 계속 이동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나의 동맹을 받아들이면 이후로 너는 물론이고 지구의 인간들에게 영원히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너는 지구에서, 나는 마계에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는 거지. 약속한다면 네가 운명과 싸우는데 나도 협조를 하마."
재윤은 전혀 뜻밖의 상황에 놀랐다.
“나보고 지금 마왕의 말을 믿으라고?”
그러자 데사오가 큭 웃었다.
“누가 보면 너는 마왕이 아닌 줄 알겠구나.”
“사정상 잠시 마왕이 되었을 뿐이다. 계속 마왕으로 지낼 생각은 없어.”
“그렇겠지. 애초부터 너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니까.”
“그건 잘 아는군.”
“그동안 우리가 서로 오해가 있어 싸우긴 했지만 계속 그럴 필요는 없잖아.”
데사오는 특유의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마음을 열면 우리는 얼마든지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어. 이미 우린 키스도 한 사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