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마왕의 참모 (1) >
흑요정의 탑에 들어가자 테네르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어서와라, 인간. 그런데 오늘은 아주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구나.”
“지금 나는 환신술을 펼친 상태이니 이해 바란다. ”
재윤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테네르가 끄덕였다.
“그보다 난 그대가 언제 들어오나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환족왕이 몇 번이고 수련의 던전 결계를 공격했다. 지금까지는 결계의 힘이 그를 붙들어두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가 결계를 빠져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데? 혹시 부활이라도 하게 되는 건가?”
“부활은 불가능해. 다만 수련의 던전을 그가 지배하게 되니 그대가 그곳에서 경험치를 얻는 건 어렵게 된다. 그대의 능력이 환족왕을 능가한다면 모를까.”
재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최대한 빨리 해치워야 할텐데 골치 아프군.”
그러나 환선과 비등한 전투력을 지닌 환족왕을 해치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괴물들을 빨리 해치우는 게 좋아. 환족왕의 수하가 되어버리면 죽이기 힘들거든."
“그래야겠다.”
곧바로 재윤은 분신과 합체했다.
환신술을 펼친 상태라 분신의 힘이 합쳐져도 그는 여전히 나룬의 형상이었다.
대신 레벨은 92로 상승!
그의 전투력이 급증했다.
‘흐읍!’
마치 방금 전까지는 기어다니다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느낌.
레벨 87과 레벨 92의 차이였다.
‘언제쯤 이 힘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쓸 때가 오려나.’
운명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힘을 숨기고는 있지만 밖에서는 레벨 87 상태에 머물러 있으니 답답했다.
‘방법은 빨리 레벨을 올리는 것 뿐이지.’
항상 그렇지만 답은 하나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번 공성전에서도 막타로 마족들을 최대한 많이 죽이려고 노력했으니까.
‘이제 경험치를 거두러 가볼까?’
재윤은 플루토를 꺼내 손에 쥐고 던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테네르가 알려준 던전의 지도를 참고해 마족과 마물들을 해치웠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물들은 수두룩 했지만 마족들의 숫자도 생각보다 많았다.
공성전에서는 일일이 세어보지 않았다.
그저 닥치는 대로 막타를 치며 마족이 눈에 보이면 죽였으니까.
[레벨이 올랐습니다.]
덕분에 레벨이 2단계나 상승!
전투력이 또 다시 급증했다.
한 단계씩 레벨이 오를 때마다 전투력이 한계를 돌파했다.
94레벨이 되고나니 92레벨도 어린 아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마왕과 싸워보자.’
이제 수련의 던전에 남아있는 괴물은 환족왕과 마왕 하이루스 뿐.
재윤은 하이루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네놈은?”
검은 기운으로 휘감겨 있는 거대한 악마 형상의 존재.
그 누가 봐도 그가 마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만한 외모였다.
암흑 속에서 두 개의 눈이 붉은 초승달들처럼 번쩍였다.
“큭! 네놈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만 이제 네놈에게 지옥이 펼져지게 해주마.”
“지옥은 너에게 펼쳐진다, 마왕.”
순간 플루토의 검신이 찬란한 광채로 물들었다.
검강의 길이가 검신보다 몇배는 더 길어졌고 그 폭도 넓어져 마치 검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츠츠츠츠!
그 기세 앞에 하이루스는 경악하더니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놈이 어떻게 그런 경지에?”
“네가 아까 봤던 나는 본래 실력의 극히 일부만 보였을 뿐이다. 지금 보는 것이 바로 진짜 나의 힘이지.”
그 말을 하는 도중 푸른빛의 도가 생겨나 전방의 공간을 거미줄처럼 갈랐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그저 환상처럼 느껴졌는데.
하이루스의 몸을 휘감고 있던 암흑의 보호막이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졌다.
환선도법이었다.
환선공에 의해 생성된 환도(幻刀)가 전방의 공간을 재윤의 의지에 따라 가르며 하이루스의 보호막을 흩어버린 것이다.
“큭! 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으냐?”
재윤이 쥐고 있는 거검도 아닌 난데없이 생겨난 정체불명의 칼에 의해 보호막이 찢겨지자 하이루스는 더욱 경악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재윤을 향해 돌진해왔다.
그가 손을 앞으로 뻗자 흑색의 기운이 화염처럼 일어나 거대한 창의 형상으로 변해 재윤을 향해 작렬했다.
“쓸데없는 짓이다.”
재윤은 플루토를 좌우로 사선을 교차하듯 휘둘렀다.
순간 두 개의 광채가 각각 사선을 그리며 전방으로 쏘아져나갔다.
검강파(劍至波)였다.
검강을 쏘아내 일정거리 내에 있는 모든 걸 파괴해버리는 가공스러운 공격.
쾅! 콰아앙!
검강파와 격돌한 암흑의 창은 그대로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하이루스의 몸체에 십자(十字) 형상의 검상이 비스듬하게 생겨났다.
그 검상은 점점 더 확대되었다.
94레벨의 마경 심법에 의해 생성된 검강!
그것은 마왕의 단단한 신체도 두부처럼 갈라버리는 가공스러운 위력을 발휘했다.
“쿠으으윽! 대체 네놈은 누구냐?”
하이루스의 몸체는 완전히 갈라진 상태였다.
그는 최후의 마력을 동원해 간신히 몸체가 분리되는 것을 막으려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몸은 토막나듯 분리되어 흩어졌다.
"크카카카캇! 나 혼자 죽을 것 같으냐?”
그의 두 팔이 순간이동을 하듯 번쩍 날아와 재윤의 목을 움켜쥐려 했다.
동귀어진의 최후 필살기!
마왕 데사오도 꼼짝없이 죽을 뻔했던 무서운 공격이었다.
그러나 재윤은 이미 그 수법에 대비하고 있던 터라 검강을 휘둘러 막았다.
파스스!
두 개의 팔이 먼지가 되어 부서졌다.
그러자 하이루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재윤을 노려보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그의 죽음으로 마력이 흩어지자 허공에서 둥둥 떠 있던 그의 토막난 사체들도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전쟁신의 검술이 Lv95가 되었습니다.]
[마경 심법이 Lv95가 되었습니다.]
[환선공이 Lv95가 되었습니다.]
[환선도법이 Lv95가 되었습니다.]
마왕이 주는 초대량의 경험치 덕분에 레벨이 또 상승했다.
각 특화 능력이 모두 레벨 95로 상승!
마기 축적(Lv95)과 다크 스네이크 소드(Lv95)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폭발적으로 상승한 전투력의 경지에 재윤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런 경지가 존재하고 있었구나.’
무수히 벽을 돌파했다고 생각했는데, 레벨 95가 되자 또 다른 경지에 올라섰다.
쒸익!
재윤이 돌연 플루토를 앞으로 던졌다.
거대한 검강으로 휩싸인 플루토가 전방으로 날아가더니 주변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플루토는 자아를 가진 특별한 병기라 그냥 알아서 두면 저렇게 날아다닐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아니었다.
재윤의 의지로 플루토를 조종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경 심법과 전쟁신의 검술이 주는 지식을 통해 재윤은 지금의 경지가 바로 말로만 듣던 어검술(默劍術)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환도를 생성해 환선도법은 어검술과 비슷한 형태로 펼치긴 했지만, 진정한 어검술의 경지에 이르자 그 위력은 차원이 달랐다.
콰아앙! 쾅! 콰콰쾅!
사방을 누비는 플루토에 의해 주변의 지형이 초토화되고 있었으니까.
‘이게 바로 어검술.’
그러나 레벨 95가 되어 터득한 건 이것만이 아니었다.
환선공도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다.
그가 가진 막강한 특화 능력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
본래라면 그저 꿈에 불과하지만 환선공(Lv95)에 의해 그 꿈이 현실로 변한 것이다.
스스스.
곧바로 그의 옆에 그와 동일한 모습의 분신이 생겨났다.
짙푸른 광채의 환도를 쥐고 있는 분신은 전방을 향해 환선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재윤은 플루토를 휘둘러 전쟁신의 검술 동작을 펼쳤다.
본신은 마경 심법 (Lv95)에 전쟁신의 검술(Lv95)!
분신은 환선공(Lv95)에 환선도법(Lv95)!
그 뿐이 아니었다.
그 사이 생겨난 두 번째 분신.
그것은 마기 축적(Lv95)을 활용해 다크 스네이크 소드(Lv95)를 펼치고 있었다.
그 위력이야 재윤의 본신과 첫 번째 분신에 비하면 형편없이 약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본신과 앞의 분신이 너무 강해서이지 두번 째 분신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이 두 번째 분신의 능력만으로도 마왕과 능히 대적할 수 있다.’
재윤이 현재 밖에서 보여주고 있는 마족 나룬의 능력은 이 두 번째 분신, 그것도 레벨 87에 제한된 상태다.
그 상태로도 최상급 마족의 전투력을 발휘했는데, 레벨 95가 된 지금은 마왕 데사오나 마왕 하이루스를 상대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하물며 본신이나 첫 번째 분신의 전투력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 앞에서는 마왕들은 그저 한낱 평범한 마족 수준으로 전락해버릴 테니까.
‘하지만 아직도 환족왕을 상대하기는 무리겠지.’
재윤은 왠지 지금이라면 한 판 붙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서두르지 말자. 실패하면 레벨이 하락할 수도 있어.’
오늘 정말 대단한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환족왕은 무리일 것이다.
물론 추정일 뿐이었다.
사실 재윤도 환족왕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혈마나 환선도 마찬가지.
그들이 엄청나게 강한 건 알지만 그들과 직접 싸워본 적이 없었으니 정확히 어떤 경지인지 아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환선과 환족왕이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의 전투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보았던 정도로만 따지면, 왠지 지금 수준으로도 승산이 있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어.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예전에 생각했던 대로 레벨 100은 되어야 할 거야.’
재윤은 당장 환족왕과 싸우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억눌러 참았다.
‘레벨을 100으로 올리는 게 우선이다.’
곧바로 그는 심호흡을 한 후 분신들을 본신과 합체시켰다.
그리고 테네르에게 돌아오자 그녀는 시간을 재윤이 이 탑에 들어온 시점으로 되돌렸다.
물론 레벨 95까지 강해진 힘은 재윤의 분신이 되어 남았다.
“환족왕이 결계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노력해보겠다만 나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대가 최대한 빨리 그를 처치하도록 해라.”
“염려 마라. 그럼 또 보자, 테네르."
“건투를 빌겠다, 인간.”
재윤은 흑요정의 탑을 나왔다.
그리고 즉시 귀룡을 전용 아공간으로 소환 해제했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지만, 설령 누가 있어 봤더라도 귀룡이 잠깐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 이제 올라가볼까?’
재윤이 아성으로 들어가자 부참모인 리타니아가 기다리고 있다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나룬 님?”
“차원 포탈 관리자들이 있다는 최상층으로 올라가보겠다.”
“아성의 최상층으로는 올라갈 수 없고 그 아래층에서 그들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마법진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마법진을 통해 바로 해당층으로 공간이동이 가능했다.
재윤은 즉시 마법진 위로 올랐다.
화아악!
환한 빛과 함께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새로운 마법진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오십시오, 나룬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합 3명의 신비로운 존재들.
모두 이전의 아루넬처럼 하얀 날개를 가진 천사와 같은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중 중앙에 있는 금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본래 마왕 하이루스와 협의 중이었던 내용이 그가 죽임을 당함으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이제 그 협의는 이곳 킨디노스 성을 점령한 당신들과 해야할 것 같군요.”
협의는 무슨.
그가 말을 듣지 않자 마왕 데사오를 이용해 하이루스를 처치해놓고 말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마치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말하다니.
‘하여간 마왕 못지 않게 음흉스러운 자들이군.’
그러나 재윤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어떤 협의를 말하는 거냐?”
“지구에 있는 인간 각성자 중 하나가 실종되었습니다.”
“인간 각성자?”
“강재윤이라는 인간입니다.”
순간 재윤은 깜짝 놀랐다.
‘여기서 왜 내 이름이 나와?’
그러고 보니.
‘역시 운명에서는 내가 실제로는 마족 나룬이 아닌 변신한 상태라는 걸 눈치채고 있는 건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강재윤에 대해서는 우리가 설명하지 않아도 당신들이 매우 잘 알 것입니다. 아, 물론 나룬 당신은 그간 떠돌이 마족이었으니 모를 수도 있겠군요.”
그러자 옆에 서있던 부참모 리타니아가 말했다.
“나룬 님, 강재윤이란 인간 녀석은 우리에게 매우 골칫덩이입니다. 그 녀석 때문에 로드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리타니아는 인간 강재윤이 그동안 얼마나 마왕 데사오에게 방해꾼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재윤은 짐짓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인간 한 놈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호들갑인지 모르겠군. 골칫덩이라면 실종된 것이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그러자 금발의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당신들이 인간 강재윤의 행방을 찾아내준다면 지구로 향하는 포탈 이용을 더욱 자유롭게 해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순간 재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운명이 내 정체를 전혀 몰라보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