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환신술을 펼치다 (3) >
“시작하라!”
곧바로 재윤과 마족 칼로우의 결투가 시작됐다.
칼로우는 미간 위에 있는 제 3의 눈을 이용해 상대에게 강력한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암멸(暗減)의 눈!
그 눈과 마주치면 적어도 상급 마족 정도가 아니면 순간적으로 시각을 잃게 된다.
단순히 시야만 차단되는 것이 아니었다.
암흑의 공포 속에서 온갖 환상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 사이 칼로우는 여유롭게 다가와 상대를 끝장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칼로우보다 전투력이 뛰어난 마족이라고 해도 암멸의 눈이 발하는 저주에 걸려들면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화악!
칼로우는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암멸의 눈을 뜨고 재윤을 노려봤다.
붉은 안광이 직선으로 뻗어나가 재윤의 눈을 찔렀다.
그 순간 재윤의 두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을 본 칼로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방금 전 대왕 삼두적린사를 너무도 쉽게 해치운 재윤을 보며 잠시 꺼림칙했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재윤이 암멸의 눈에 걸려든 이상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크큭! 네놈은 그걸로 끝이 났다.”
그는 지금쯤 재윤이 암멸의 눈이 주는 악몽과 같은 환상 속에 빠져있을 거라 생각하며 여유롭게 접근했다.
서걱!
그러나 한 걸음 걷기도 전에 붉은빛 검신이 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재윤은 마치 저주에 빠져든 것처럼 방심을 유도한 뒤 곧장 기습을 날려 단번에 칼로우의 목을 날려버린 것이다.
쿠웅!
이번에도 소환진의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칼로우가 죽었다.
이에 슈테나는 인상을 굳혔다.
“마물은 그렇다치고 마족까지 죽인 건 심하지 않으냐?”
“누가 됐든 저에게 도전하는 놈은 죽입니다. 결투라고 예외는 없지요.”
재윤의 입가에 피어난 싸늘한 미소.
슈테나도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무서운 놈이군.’
그는 방금 전 재윤이 일부러 칼로우를 죽이기 위해 저주에 당한 것처럼 방심을 유도한 것을 알고 있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죽이지 않으면 소환진의 마법이 발동된다.
아니, 사실 눈깜짝할 사이에 죽인다고 해도 본래라면 그 직전에 밖으로 소환되어 살아났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이는 재윤의 능력이 소환진의 결계가 가진 능력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혹시나 했는데 저놈은 절대 하급 마족이 아니다. 특별한 기연을 얻어 각성한 게 분명해.’
마물을 죽였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마족까지 죽인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상급 마족이 아니고서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전투력인 것이다.
“나룬, 네 실력은 그 정도면 충분히 증명됐다. 이후로는 너의 용맹을 아군이 아닌 적에게 보여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군단장님.”
“크크크, 좋다. 그럼 결투는 이 정도로 됐다. 이틀 후 있을 마왕 하이루스와의 전쟁에서 네 활약을 기대하마.”
“바로 출전입니까? 바라던 바입니다.”
슈테나는 결투가 계속되면 마족들이 몇이나 죽어나갈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즉각 중단시켰다.
전쟁을 앞둔 상태였기에 더욱 아군의 손실이 없게 해야 했다.
한편으로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뜻밖의 보물이 내게 굴러들어왔구나.’
유능한 마족 하나가 들어오면 군단의 전투력이 대폭 올라간다.
군단장인 그에게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나룬에게 상급 마족에 걸맞는 대우를 하도록 하겠다. 상급 부대장으로 임명한다.”
그 말에 모두들 경악했다.
현재 슈테나의 군단에 마족들은 꽤 많지만 대부분 하급이나 중급 마족이고, 상급 마족은 불과 다섯뿐이다.
슈테나가 그 중 하나고, 나머지 넷은 군단의 최상위 지휘관들.
그런데 하급 마족인 나룬이 그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그것도 단 두 번의 결투로 말이다.
그러나 소환진이 작동되기도 전에 마족을 죽여버리는 재윤의 가공스러운 전투력을 목격한 이상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렇다.
이제 재윤은 더 이상 하급 마족이 아니었다.
상급 마족이자 슈테나 군단의 상급 부대장!
마왕이 직접 임명하는 군단장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빨라서 좋군.’
인간 사회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갖가지 절차와 관행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여긴 그런 것 따윈 없었다.
실력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오직 강자가 모든 걸 지배하는 마계이니 가능한 일이리라.
* * *
도시 카르타스 내 위치한 재윤의 저택 별채.
채시은과 로사엔이 머물고 있는 이곳을 향해 알록달록한 빛깔의 슬라임 메이드 하나가 큼직한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식량이다, 노예들.”
그러자 로사엔이 슬라임 메이드가 내민 쟁반을 받아들었다.
“고맙다, 슬라임.”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하찮은 노예들에게도 음식을 주라 명령하신 마스터 나룬 님께 고마워해라.”
머리가 꼭 개구리처럼 생긴 슬라임 메이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쳇, 저 슬라임 녀석 왠지 기분 나쁘네요. 눈빛도 음침하고. 마물들은 다 싫지만 그중에 슬라임은 특히나 마음에 들지 않아요."
채시은의 말에 로사엔도 공감한다는 듯 끄덕였다.
“하필이면 저런 녀석이 메이드가 됐는지. 앞으로 자주 봐야 할 텐데 큰일이네요.”
그녀는 쟁반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그래도 신선한 과일과 야채, 잘 익힌 고기, 그리고 물과 우유 등이 담긴 병이 있었다.
채시은은 그제야 그것들을 보며 놀랐다.
"노예에게 주는 것치고는 꽤 훌륭하네요.”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잘 익은 고기에서 나는 냄새를 맡자 식욕을 참기 힘들었다.
“일단 먹어요, 우리.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댔어요.”
“그런 말도 있나요?”
로사엔이 픽 웃었다.
채시은이 고기를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며 끄덕였다.
“그런 속담이 있어요.”
“재밌는 말이군요.”
“어떻게든 먹고 힘을 내야 여기를 탈출할 수 있어요. 슬라임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음식이 무슨 죄가 있나요?”
“그건 그래요. 우리 먹고 힘을 내요.”
엘프인 그녀는 고기는 먹지 않는다.
그러나 과일과 야채는 먹을 수 있었다.
“자, 잠깐만요. 먹지 마세요.”
로사엔이 돌연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채시은이 움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막 고기 한 점을 잘라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삼킨 상태였다.
“무슨 일이죠?”
“착시 마법이 펼쳐져 있을 뿐, 이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네요.”
로사엔은 탄식하더니 뭐라 주문을 외우며 손을 슥 휘저었다.
그러자 먹음직한 고기 구이가 알 수 없는 괴물의 눈알로 변했다.
익힌 것이 아닌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생눈알.
마찬가지로 야채와 과일도 자그만 식충식물처럼 생긴 괴물들이었다.
우유 또한 핏물이 섞여 있어 무슨 괴물의 젖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멀쩡한 건 물 뿐이었다.
“으웩!”
채시은이 밖으로 뛰어나가 토악질을 했다.
그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으아앙! 저 그냥 죽을래요. 눈알 조각을 한 입 삼켰어요.”
“죽으면 안 돼요! 어서 마저 토해내요.”
로사엔은 채시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잠시 후 로사엔은 쟁반을 밖에 내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채시은도 간신히 진정된 표정으로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정말 앞날이 막막하네요. 하긴 마족과 마물들만 득실거리는 이 도시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게 어디 있겠어요?”
“일단 물이라도 마셔요. 이건 신선한 물이 맞아요.”
로사엔이 먼저 마시고 끄덕이자 채시은도 안심하고 물을 마셨다.
그러다 채시은이 말했다.
“그보다 그 마족 놈이 무슨 꿍꿍이로 우리를 이곳에 뒀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로사엔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놈의 엉큼한 속셈이야 뻔하겠죠.”
“하! 역시! 우리 이제 어쩌죠?”
채시은이 수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족에게 능욕을 당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감감했던 것이다.
로사엔이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순순히 당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밖으로 나가면 온통 마족과 마물들 뿐인데요?”
“그래서 숲의 나무들에게 신호를 보냈어요. 우리를 아는 존재가 있으면 이곳으로 찾아올 거예요."
로사엔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스스.
갑자기 별채의 정원으로 뭔가가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워낙 은밀한 움직이었지만 로사엔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정원 쪽을 쳐다봤다.
'누구?'
그 순간 공간이 살짝 흔들리더니 한 명의 푸른머리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쉿."
청년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하라 말하고는 재빨리 별채 안으로 들어와 밖에서 보이지 않게 문을 닫았다.
“후! 간신히 들어왔네요.”
“로벨 님! 여기는 어떻게?”
그렇다.
지금 들어온 청년은 다름아닌 마법사 로벨이었다.
로벨은 미소 지었다.
“당신의 구조 신호를 감지했습니다. 다행히 저의 마법을 간파할 만한 상급 마족이 이곳에 없어서 무사히 잠입할 수 있었죠.”
“아!"
채시은과 로사엔은 반색했다.
정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드디어 살 희망이 생긴 것이다.
로벨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인지 그녀들은 잘 알고 있다.
마법만 따지면 흑룡 데카투스 못지 않은 실력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런데 대체 이곳은 어디죠? 우리가 어쩌다 이곳으로 이동된 걸까요?”
채시은이 물었다.
“그건 저도 아직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곳이 마계의 일부지만, 중심 마계가 아닌 외곽 마계의 한 곳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냈죠."
“외곽 마계라는 곳도 있나 보군요.”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보다 혹시 당신들 외에 다른 분들은 보지 못했습니까?”
“네, 저희 둘 뿐이에요. 로벨 님은요?”
그러자 로벨이 밖의 동정을 살피며 다시 나직히 말했다.
“저는 강재윤 님의 부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말에 로사엔이 깜짝 놀랐다.
“마스터의 부모님을요? 그분들도 이곳으로 이동하셨나요?”
“다행히 제가 있는 곳으로 함께 이동해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에 모셔둔 상태이니, 서둘러 저를 따라 이동하도록 하죠.”
로벨은 그 말과 함께 투명화 마법의 주문을 로사엔과 채시은에게 펼쳤다.
그들은 모두 투명화 상태로 변했다.
“여긴 마나의 흐름이 매우 불규칙해 공간 이동 마법을 섣불리 펼칠 수 없습니다. 투명화 상태로 이동해야 하니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네, 로벨 님.”
“염려마세요.”
그렇게 그들은 별채의 정원으로 나간 후 다시 저택의 정문을 향해 슬금슬금 이동했다.
정원에는 마물 카치카들과 미노타우루스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아무도 로벨 등이 이동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명 눈치챈 존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재윤이었다.
그는 방금 전 집에 도착했다가 별채에서 로벨 등이 나직히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로벨이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니. 정말 천만다행이구나.’
이 괴상한 세계로 부모님도 이동해 왔다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마법사 로벨이 지켜준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부모님을 찾아가 함께 있고 싶었지만, 환신술로 마족으로 변신한 상태인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정말 안전한 곳에 계시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재윤은 은밀하게 로벨 등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투명화 상태로 움직이고 있지만 재윤의 기감은 그들의 움직임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주변의 위협 요소가 있으면 제거한다.’
재윤은 혹시라도 자신 말고 다른 마족이나 마물이 로벨 등의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저놈은?’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있었다.
마족 중 하나가 막 자신을 스치듯 지나가는 채시은의 기척을 감지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붙은 것이다.
‘운이 나쁜 녀석이군.’
재윤은 번개처럼 그 마족을 습격해 목을 잘라버렸다.
'끅!'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로벨 등은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투명화 상태로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러기를 한참 후.
로벨은 숲의 한 커다란 바위 앞에서 뭐라 주문을 외웠다.
스스스.
순간 그곳에 마법진을 통해 숨겨진 동굴의 입구가 나타났다.
“이곳입니다.”
동굴 안에는 50대 부부가 있었는데 다름아닌 강두성과 김지현이었다.
로사엔과 채시은이 나타나자 그들은 반색했다.
"어서들 와요.”
"마스터의 부모님을 뵈어요.”
"두 분 모두 무사하셨네요.”
그때 재윤은 멀리서 동굴 안을 쳐다보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가 희망 성을 떠나온지 몇 개월.
그런데 희망 성이 아닌 이 괴상한 마계에서 부모님을 보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