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그가 오고 있다 (2) >
순간 재윤은 머리가 하얗게 비는 듯했다.
혈마가 온다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물론 혈마가 조만간 찾아오겠다고 말은 했다.
그 조만간이 이토록 빠른 시간이 될 줄은 몰랐다.
분리된 세계의 동굴에 스스로를 봉인했던 혈마가 밖으로 나온 것도 모자라 이 머나먼 환계에 벌써 들어와 있다니.
물론 혈마라면 충분한 가능한 일이리라.
“나는 환계라면 손바닥 보듯 할 수 있다. 어떤 경유로 그가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환계에 들어온 건 분명한 것 같구나.”
환선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전에 네가 말한대로 혈마가 기억을 찾기 위해 네게 오는 것이라면 이 일은 단순히 너만의 죽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혈마가 천마가 될 경우 내가 아는 한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재윤은 환선공을 전수받을 당시 자신과 혈마의 관계에 대해서 그녀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천마의 기억이 담긴 구슬을 그녀가 보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혈마 못지 않은 능력을 가진 그녀라면 구슬을 빼앗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환선은 재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마의 부활을 저지하는 방법은 단 하나.
재윤이 혈마보다 강해지는 것 뿐이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요?”
혈마가 작정하고 나왔다면 희망 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디건 혈마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도주해야 할 것이다.
“어디로 가게 될 지는 나도 모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알게 되면 혈마도 그것을 알게 될 터, 너는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을 가지기 전까지 가능하면 너의 존재를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환선은 공중에 환술진(幻術陣)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처 그것이 완성되기 전.
근처의 상공에 강렬한 돌풍이 형성되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눈에서 칼날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한 명의 중년인.
‘저 자는?’
재윤은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봤다.
혈마였다.
본래 노인이 아니라 중년인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변신한 것이 아니라 신체 자체가 젊어진 것이다.
‘기세가 더 강해졌다.’
재윤은 혈마의 기세가 이전보다 강력해진 것을 알아봤다.
설마 기억을 회복한 것일까?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혈마가 재윤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재윤은 공손히 인사했다.
어쨌든 혈마는 그의 사부였다.
그가 천마로 각성할까봐 피하려는 것이지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 그동안 꽤 성취가 있는 것 같구나.”
“아직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먼곳까지 어떻게?”
재윤은 눈으로 보면서도 혈마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믿기지 않았다.
혈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긴 말 하지 않겠다. 네가 가진 구슬을 돌려받으러 왔다. 어차피 그 구슬이 없어도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긴 했다만, 그래도 완벽한 것이 좋겠지.”
재윤은 길게 탄식했다.
‘역시 구슬 때문이었군.’
이미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아니었으면 했다.
그냥 이전처럼 사부가 혈마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살아갔으면 했는데.
그런데 지금 혈마는 단순히 구슬을 찾겠다는 욕구에 불타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미 대부분의 기억을 회복한 것 같았다.
“당신의 눈에 나는 보이지도 않는가? 혈마. 아니 천마라고 해야 하나?”
그때 환선이 싸늘히 웃으며 외쳤다.
그러자 혈마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생명의 기운이 얼마남지 않아 보이는데, 굳이 내 손으로 그대를 죽이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쓸데없이 나의 일에 간섭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내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작정하면 당신을 한동안 오도가도 못하게 가둬둘 수는 있지.”
“그때나 지금이나 무모한 것은 다를 바 없군. 감히 나를 상대로 협박인 것인가?”
조금은 귀찮다는 듯한 눈빛.
재윤은 순간 혈마의 오연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환선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았다.
‘환선 사부님의 몸이 정상이라고 해도 지금의 혈마 사부님을 대적하기란 불가능하다.’
재윤이 내린 판단이었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나서기로 했다.
자칫하면 환선이 매우 위태한 지경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 정말 천마가 되기로 결심하신 겁니까?”
재윤이 물었다.
그러자 혈마가 재윤을 쳐다보며 끄덕였다.
“네 말은 틀렸다. 나는 이미 천마다. 다만 아직 회복하지 못한 기억의 일부를 되찾기 위해 널 찾은 것 뿐이야.”
“천마로서의 삶에 환멸을 느껴서 혈마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또 다시 그 길을 가시려는 겁니까?”
“그것은 너 때문이다.”
혈마 아니, 천마의 말에 재윤은 어리둥절했다.
“저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뿐인 제자가 별 같잖은 녀석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걸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어서다.”
“같잖은 녀석들이라 하시면 설마 운명을?”
“그간 네가 운명이라 자칭하는 놈들과 어떤 관계로 변했는지는 모두 알고 있으니 굳이 설명할 것 없다. 나는 그 음흉한 녀석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부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말이야. 이참에 모두 쓸어버리기로 했으니 그리 알거라.”
천마의 말에는 약간이지만 진정성이 느껴졌다.
물론 그가 가진 천마로서의 회귀 본능을 이기지 못한 것이 더 큰 이유겠지만, 그에 대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 제자인 재윤 때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저를 진정으로 위하신다면 부디 혈마로 남아주십시오, 사부님.”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이전에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부님이 천마로 완전히 각성하시면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저에게 구슬을 맡기셨죠.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설령 사부님이 제게 구슬을 달라고 하셔도 내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랬다. 하지만 그 사이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운명이라는 놈들을 쓸어버릴 생각이다. 감히 내 제자의 앞을 가로막는 놈들을 스승인 내가 어찌 두고볼 수 있겠느냐?”
재윤은 감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부족한 제자를 그토록 위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이제 시간을 끌지 말고 구슬을 내놓도록 해라. 나는 두 번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네가 나의 제자인 터라 특별히 예외를 두었을 뿐,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든다면 너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천마는 매우 언짢아하는 눈빛으로 재윤을 쳐다봤다.
그러나 재윤은 순순히 내줄 수 없었다.
“지금 사부님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운명을 상대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러자 천마가 크게 웃었다.
“이 사부를 그리 높게 평가해준다니 가상하다만, 그놈들은 네가 생각하듯 그리 호락호락한 것 같지 않더구나.”
“운명에 설마 사부님을 대적할 만한 존재들이 있다는 뜻입니까?”
“거긴 도무지 그 음흉함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이다.”
천마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운명과 대적하고 있다 생각했겠지. 하지만 네가 오히려 운명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음을 알고 있느냐?”
그 말에 재윤은 깜짝 놀랐다.
“제가 운명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모를 것이다. 네가 알았다면 운명을 돕는 일은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천마는 싸늘히 웃었다.
“간단하게만 말하마. 환계에서 네가 벌인 활약으로 인해 이곳 환계까지 운명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운명이 피 그림자의 재앙을 내버려두고 널 마계로 파견한 건 바로 이런 노림수가 있었던 것이지.”
재윤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천마의 말이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환계로 들어온 것도 결국 운명의 노림수였다니.
“내 말이 믿기지 않는 것 같구나. 이제 내가 그것을 증명해보이겠다.”
그 말과 함께 천마는 손을 슥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나 엎드렸다.
공중이지만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드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존재.
‘저 자는?’
재윤은 깜짝 놀랐다.
전혀 뜻밖의 존재가 천마의 앞에서 숨조차 쉬지 못한채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다.
푸른빛의 날개를 가진 건장한 체격의 청년.
“당신은 혹시 세다넬?”
아루넬을 대신해 새로 운명의 탑 관리자가 된 세다넬이 분명했다.
세다넬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재윤을 향해 외쳤다.
“미천한 존재인 이 종이 감히 마존의 제자를 알아뵙지 못하고 크나 큰 결례를 범했사옵니다. 부디 이전에 범했던 저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세다넬은 운명의 탑에서 봤던 그 총기발랄하며 오만도도하던 그 관리자가 아니었다.
천마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마치 마왕 앞에 굴복한 마물과 같은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극도의 복종심만 남아있는 듯했다.
“보았느냐?”
천마가 재윤을 쳐다봤다.
재윤은 끄덕였다.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천마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세다넬이 다 실토했을 테니 말이다.
각성자, 그것도 특별한 조건이 되는 자만 들어갈 수 있는 운명의 탑을 깨부수고 들어가 세다넬을 끌어낼 수 있는 무지막지한 존재. 그가 바로 천마였다.
이전에 안전지대 보호막도 무시하고 들어가더니, 그에게는 운명의 탑에 걸린 제한도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놈을 통해 적지 않은 것을 알아냈다만 운명은 그조차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놈 또한 이미 버리는 패였다는 뜻이지.”
천마는 인상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느냐? 너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그놈들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놈들은 감히 나를 바둑판 위의 돌처럼 그놈들이 만든 알 수 없는 판 위에 놓고 이용하려 했다.”
재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 역시도 충분히 이해했다.
사실 그가 운명에게 가장 화가 난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고도 내가 어찌 그놈들을 그대로 둘 수 있겠느냐? 나는 운명과 일말의 관계라도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없애버릴 생각이다. 문제는 이 세다넬이라는 놈조차 그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빙산의 일각뿐이라는 것이다.”
천마의 두 눈이 강렬히 빛났다.
“따라서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필요하다. 분명 봉인된 나의 기억 속에는 그놈들이 누군지에 대한 어떤 단서가 있을 터, 너는 이제 거부하지 말고 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라. 내 아무렴 모든 기억을 찾는다 해서 제자인 너를 해하겠느냐? 더 이상 운명 따위가 널 좌지우지하는 일은 없게 만들어 주마.”
솔직히 재윤은 천마 사부의 말을 믿고 싶었다.
정말로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더 이상 재윤은 운명과 고투를 벌이느라 기를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냥 천마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직감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천마가 그의 모든 기억을 되찾는 순간, 지금 남아있는 약간의 인성조차 사라진 채 완전한 악마가 되어버리고 말 테니까.
그때는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재윤이 이상한 건 운명의 의도였다.
어쩌면 진정한 천마의 부활조차 운명의 노림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천마는 무척 분노하며 운명을 쓸어버리고자 하지만 만약 그조차도 운명이 이미 안배한 것이라면?
‘대체 그들이 원하는 게 뭘까?’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천마가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크윽! 감히!”
그는 무엇때문인지 환선을 잡아먹을 듯 사납게 노려봤다.
그러나 이내 낭패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갑자기 천마가 자취를 감추자 재윤은 어리둥절했다.
“운명이란 집단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천마가 모든 기억을 되찾으려하는 것조차 그들의 안배에 들어 있음이 분명한 것 같구나.”
환선의 말이었다.
그녀 또한 재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놀랄 것 없단다. 네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천마를 환계의 미로 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금방 그것을 뚫고 나올 것이다.”
재윤을 바라보는 환선의 눈빛이 부드럽게 빛났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가거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너는 네가 무엇을 해야할지 잘 알고 있을 터, 천마의 재앙을 막아내고 운명이란 집단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너 뿐임을 잊지마라.”
그와 함께 환술진이 형성한 게이트가 재윤의 몸을 휘감았다.
재윤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외쳤다.
“사부님! 어찌 저 혼자만……."
“나는 염려하지마라. 그리고 그 환선구를 사용해 환선공의 환신술을 펼치면 천마라 해도 너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다. 그걸로 운명이라는 집단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 외에는 네가 살아날 길이 없는 것 같구나.”
재윤의 손에는 어느새 신비한 백색의 구슬이 하나 쥐여져 있었다.
환선이 가진 보물인 환선구(幻仙球)였다.
“사부님 ! 저 혼자만 갈 수 없습니다.”
재윤은 환선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했지만 그 사이 그는 이미 환계가 아닌 알 수 없는 장소로 이동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