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운명을 속이다 (2) >
슬슬 운명으로부터 연락이 올 거라 예상했다.
‘하긴 이쯤이면 내가 굴복할 거라 예상했겠지.’
재윤의 레벨이 실제로는 90이라는 사실을 운명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또한 분신의 아공간에 코인과 각종 아이템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아직은 힘을 드러낼 때가 아니야.’
90레벨이 되는 순간 갑자기 전투력이 급증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재윤은 혼자다.
물론 동료인 데카투스와 용사 루니스가 있다지만, 그들만으로 운명의 탑과 맞서 싸우는 건 무모한 일.
힘을 숨길 수 있게 된 이상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운명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을 때까지 힘을 계속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재윤이 운명의 탑으로 들어가자 이전에 봤던 세다넬이 담담한 미소를 흘리며 서 있었다.
“어서오라, 각성자 강재윤.”
“날 부른 이유는?”
재윤이 싸늘한 태도로 물었지만 세다넬은 별달리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역시나 10일 연속으로 몰아붙였으니 단단히 악에 받쳐있군. 하지만 이제 내 제의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협박하러 부른 것이 아니니 안심하라. 일단 일전의 일은 사과하마.”
“밤낮으로 괴물들을 보내놓고 이제 와서 사과를 하겠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대 역시 한계 상황이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와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을 테니까.”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 거냐?”
그러자 세다넬이 최대한 상냥해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하자는 것이다. 우리끼리 굳이 싸워봤자 결국 득을 보는 건 마계를 비롯한 외부 세력들이니 말이야.”
‘마계를 비롯한 외부 세력?’
그럼 외부 세력이 마계말고 또 있다는 건가?
재윤은 운명과 적대관계에 있는 세력이 마계뿐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세다넬의 말대로라면 최소 하나 이상이 더 있음을 의미했다.
“나는 그대와 희망 성이 더 이상 전쟁을 할 여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코인도 아이템도 모두 바닥이 난 상태란 것도."
세다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우리의 조건부터 말하자면, 일단 희망 성과 도시 초승달에 대한 공격을 즉각 멈출 것이다. 또한 코인 상점 물품들의 가격을 지금처럼 정상가의 10배 이상이 아니라 대략 2배 수준으로 하락시켜주겠다. 그리고 그대의 기물인 귀룡의 안전지대 기능도 회복시켜줄 생각이다.”
재윤으로서는 뜻밖이었다.
‘무슨 꿍꿍이인가?’
다른 건 몰라도 당장 희망 성과 도시 초승달에 대한 공격만 멈춰준다면 안전지대 보호막이 없어도 사람들이 지낼만 할 것이다.
“대신 이제부터 그대는 우리의 뜻에 전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보다 레벨 제한은 안 풀어주는 건가?”
“코인 보상과 경험치 제한도 풀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더 이상의 경험치는 획득하지 못한다.”
“다른 각성자들은 되고 나만 안 된다?”
“운명이 규정한 인간 각성자의 최대 레벨은 85까지다. 그런데 그대는 특별한 기연을 통해 그보다 2단계나 더 레벨이 높은 상태이지. 앞으로 공을 많이 세운다면 한두 단계 정도 더 높일 기회를 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하다.”
세다넬은 90레벨에 이르는 건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다.
그가 만일 지금 재윤의 실제 레벨이 90인 걸 안다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해준다면 나도 굳이 운명과 싸울 생각은 없다. 다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당신들에게 협조할 수는 없고, 나에게 무리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도록 하지.”
“우리의 뜻을 거부하기도 하겠다는 건가?”
“그건 당연한 일이다.”
세다넬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죽어도 굴복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재윤을 더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순순히 굴복할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귀룡의 안전지대는 불가하겠군. 그것은 그대의 전적인 충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허락된 조건이니 말이야.”
“나에게 충성을 강요하지 마라. 동맹이라면 몰라도 당신들에게 굴종할 생각은 없어.”
재윤은 더 이상 안전지대에 집착하지 않았다.
운명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없애버릴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을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절대적 안전지대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세다넬이 끄덕였다.
“좋아! 그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 충성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주도록 하지. 또한 처음부터 완벽하게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일단 그대의 말대로 서로 조건부 동맹을 맺도록 하겠다. 그대가 필요시 우리에게 협조를 한다면 귀룡의 안전지대를 제외한 모든 조건은 즉시 이행하도록 하마.”
이렇게 재윤은 운명과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반달 가까이 계속되던 희망 성과 운명 간의 전쟁은 일단 종결되었다.
이미 다수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대로 전쟁이 계속된다면 재윤과 소수의 인물을 제외한 모두가 다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재윤 혼자라면 모를까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당분간 운명과 손을 잡는 게 필요했다.
그래도 끝까지 저항했으니 이런 정도의 동맹 협상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냥 굴복했으면 그냥 운명에게 이용만 당하다 처참하게 다 죽고 말았을 것이다.
* * *
운명과 동맹을 맺은지 3일.
약속대로 더 이상 희망 성과 도시 초승달을 향한 괴물들의 공격은 없었다.
또한 코인 상점의 가격이 정상가의 2배 정도로 하락했고, 사실상 마비 상태였던 코인 경제(Lv2)도 활성화되었다.
덕분에 재윤이 지원을 해주지 않아도, 각 거주자들이 코인 경제를 통해 획득한 코인만으로 그럭저럭 의식주가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희망 성에서 그간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만 10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엘프들 중 생존자는 10여 명에 불과했고, 라이칸슬로프와 고블린들도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도시 초승달의 경우에는 더욱 처참했다.
희생자는 희망 성의 무려 10배가 넘었다.
파손된 건물들은 복구했지만, 도시는 죽음의 도시처럼 침울함에 잠겨 있었다.
다행히 그렇게 침울했던 분위기는 3일 정도 지나자 사라졌다.
기괴하게 변한 세상에서 지금껏 생존했던 사람들인 만큼 그러한 극한 상황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오히려 괴물들이 더 이상 공격을 해오지 않고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자 모두들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동맹 체결 후 4일이 지났을 무렵.
운명의 탑 세다넬이 재윤을 불렀다.
“어서 오라, 각성자 강재윤. 3일 정도면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거라 생각해 불렀다.”
“내가 해야할 일이 있나?”
재윤이 묻자 세다넬이 끄덕였다.
“운명에 소속된 세력 중 하나인 환마혈도문이 곧 적의 거점을 공격할 것이다. 그대가 그곳에 합류해 지원하기를 바란다.”
적의 거점 공격이라니!
“적이라면 혹시 흑화 용사 아르데아를 처치하러 가는 건가?”
“그쪽은 전혀 아니다. 그대는 설마 우리의 적이 아르데아 하나 뿐일 거라 생각하나?”
“생각보다 적이 많은가 보군.”
“그대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그래도 어디를 공격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겠지.”
세다넬이 픽 웃었다.
"굳이 궁금해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그대의 입장에서 보면 괴물들일 뿐이다. 가서 최대한 많이 해치우면 대량의 코인과 유용한 아이템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은 그게 다인가?”
"거점을 획득하는데 공을 많이 세우면 정상 참작을 해서 그에 따른 추가 포상이 있다. 오늘 중 환마혈도문에서 그대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들을 따라 이동해라.”
“그러지.”
재윤은 한편으로 기대 중이었다.
운명과의 전쟁이 멈춘 이후로 희망 성과 초승달은 안전해졌지만, 그는 레벨을 올릴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괴물들과의 전투라면 나로서는 환영이지.’
운명은 재윤이 더 이상 레벨을 올리지 못할 거라 생각해 전투에 투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재윤이 그것을 이용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절대 이런 기회를 제공할 리가 없었다.
‘운명이 절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은 운명이 그를 이용했지만, 이제는 반대로 그가 운명을 이용해 강해질 것이다.
‘귀룡은 전용 아공간으로 이동시켰다가 필요할 때 소환하는 게 좋겠군.’
누군가 귀룡 성에 있으면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단 두 명은 제외다.
베르타와 테네르.
그들은 아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지낼 수 있는 특별한 존재들이니까.
잠시 후 운명의 탑을 나오자 그 사이 성의 북쪽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 있었다.
혈의복면인들.
이전과 달리 그들은 성을 공격해오지 않고 조용히 대기 중이었다.
재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제가 없는 동안 성을 잘 부탁합니다.”
희망 성과 도시 초승달의 방어를 위해 루니스와 로벨, 데카투스를 남겨두었다.
그들은 함께 따라나서고 싶은 눈치였지만 재윤이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부모님이 계시는 희망 성을 안전하게 지켜줄 존재들은 그들 뿐이었으니까.
* * *
재윤이 북문 밖으로 나서자 이전과 달리 혈의복면인들은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운명에 속한 세력이라 이제 동맹군이었다.
“희망 성주님을 뵙습니다. 저쪽에 인환단주(人幻團主)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인환단주? 그가 누굽니까?”
“본문 휘하 삼단 중 하나인 인환단의 수장이십니다.”
환마혈도문에는 천지인(天地人)의 이름을 딴 세 개의 단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라 했다.
‘이름도 그렇고 여긴 말로만 듣던 무림 고수들의 집단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재윤은 이들과 혈전을 벌였다.
그간 재윤에 의해 죽은 혈의복면인들이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재윤을 향해 별다른 악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단주님, 희망 성주님을 모셔왔습니다.”
인환단주 또한 붉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로부터 피어나는 기세는 용사 루니스 못지 않았다.
재윤도 숨겨진 힘을 제외한 Lv87의 전투력만 발휘한다면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할만한 고수.
굴곡진 몸매를 보니 여자 같았다.
‘저 여자가 희망 성을 공격해왔다면 꽤 곤란했을 텐데.’
인환단주가 이 정도라면 다른 단주들의 무공도 엇비슷하거나 더 높을 수도 있었다.
그들 위에 있는 환마혈도문의 문주는 더 강한 존재일 테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그동안 활동하지 않은 것일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
재윤이 고민할 바가 아니었다.
‘나야 괴물들을 처치하고 보상만 얻으면 되는 일.’
그때 인환단주 또한 재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희망 성주인가요? 그간 본문의 무사들을 꽤나 죽였더군요.”
“공격을 해오니 방어를 했을 뿐입니다.”
“호호호! 그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것이 아니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어차피 동맹이 되었으니 과거의 일은 그냥 묻기로 해요."
그녀는 곧바로 재윤을 근처의 거대한 마법진 위로 안내했다.
“세다넬 님께 상황을 들었을 테니 자잘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죠. 우리는 이제 이 마법진을 타고 전장으로 이동할 거예요.”
“대체 누구와 싸우는 겁니까?”
그러자 인환단주가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모르셨나요? 우린 지금 마계로 이동 중입니다.”
“마계라고요?”
재윤은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마계라니.
설마 마왕들과 마족들이 득실거리는 그 마계를 말하는 것인가?
“놀랄 것 없어요. 거점 하나만 점령하고 바로 돌아올 거니까.”
곧바로 마법진이 환한 빛을 발했다.
화아악!
눈부신 빛이 시야를 가렸다가 사라진 장소.
그곳은 검은 하늘에 붉은 빛 달이 떠있는 괴상한 세계였다.
‘여기가 마계?’
오기 전까지는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막상 와보니 그냥 담담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점령할 거점은 바로 저곳이에요.”
인환단주가 멀리 보이는 하나의 성을 가리켰다.
“본래는 우리 환마혈도문의 거점이었는데 얼마 전 마족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어요.”
“당신들은 마계에도 거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마계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세계가 아니에요. 어디든 마계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이 본래 속한 세계도 마계화가 진행 중인 것처럼 말이죠.”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당신은 본문이 왜 운명의 휘하에 들어 있는지 궁금하겠지만 어차피 목적은 당신과 동일해요. 우리 또한 운명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 뿐이니까.”
재윤은 무슨 목적인지 묻지 않았다.
굳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
그는 이곳에 전투를 하러 왔지 환마혈도문의 비사(秘史)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 혈의복면인 1천여 명이 마법진을 타고 나타났다.
“집결 완료했습니다, 단주님.”
“공격하라! 저 거점을 오늘 반드시 탈환할 것이다.”
인환단주가 외치자 혈의복면인들이 성을 향해 바람처럼 몰려갔다.
그들은 가파른 성벽을 계단처럼 툭툭 차고 올라 성에서 대기중인 마물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먼저 성벽 위에 올라선 이는 재윤이었다.
‘한놈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
직접 죽인 적들만 흑요정의 탑 수련의 던전에서 부활한다.
따라서 재윤은 혈광파(Lv2)와 혈검파(Lv10)와 같은 광역기를 아끼지 않고 펼치며 마물들을 마구 도살했다.
“꾸아아악!”
“끄아악!”
재윤의 주위로 일정 반경 이내에 있는 마물들이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종횡무진이었다.
몇몇 제법 강해 보이는 녀석들이 덤벼들었지만 재윤의 일검(一劍)을 받아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크우우우우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그러자 거대한 뱀 하나가 상공에 나타났다.
뱀이 아니라 용이라 해도 무방한 괴물!
‘저놈은?’
재윤은 단번에 놈을 알아봤다.
예전에 도시 아르크스의 상공에 나타났던 거대 뱀.
그때는 본신이 아닌 환영이었다.
재윤은 전쟁신의 강림을 통한 환영 전투를 통해서 놈을 해치웠는데, 지금 나타난 건 환영이 아닌 실체였다.
“가소로운 인간 놈! 죽음의 징벌을 받으라!”
거대 뱀은 가장 먼저 재윤을 노렸다.
그것의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쏟아져나와 재윤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재윤은 플루토를 번쩍 휘둘러 붉은 안광의 기운을 흩어버렸다.
“저놈이 이곳 성의 두목이죠. 만만치 않은 녀석이니 전력을 다해야 해요.”
인환단주가 재윤의 옆에 내려서며 말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는 묵도(墨刀)에 도강(刀罡)을 피워낸 후 공격 자세를 취했다.
재윤 또한 담담히 플루토의 검신에 짙은 광채의 검강을 생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