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흑요정의 탑에는 어떤 비밀이? (1) >
데카투스가 입에 물고 온 것은 붉은 날개 늑대 두목이었다.
신비한 붉은 빛으로 빛나는 두목 늑대의 날개는 다른 늑대들에 비해 훨씬 강력해 보였다.
“날개 속도로만 따지면 이 녀석도 나에 못지 않다. 이 날개를 귀룡에게 장착시키는 게 어떠냐?”
곧바로 흑발 중년인의 모습으로 변신한 데카투스는 두목 늑대의 날개를 떼어 재윤에게 건냈다.
그런데 재윤이 그 날개를 받는 순간 그것이 그대로 먼지로 변해 흩어져버렸다.
날개가 사라진 늑대 두목의 사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왜 이런 일이?”
데카투스는 애써 잡아온 두목 늑대의 날개가 사라지자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재윤은 씁쓸히 웃었다.
“운명의 힘과 관계가 틀어져서 벌어지는 일이겠지.”
설마했지만 데카투스가 잡아온 늑대 두목의 날개까지 얻지 못하게 할 줄이야.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운명의 관할이라면 재윤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성의는 고맙게 받겠다, 데카투스. 귀룡을 타고 어디 멀리 이동할 상황이 아니면 당신의 날개를 빌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빌어먹을! 운명이 그대를 굴복시키려고 별 짓을 다하는 것 같구나.”
재윤은 끄덕였다.
“굴복하지 않아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는 거지. 더 이상 운명에게 뭔가를 바란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레벨을 올리지 못하고, 드롭템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수성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사방에서 몰려든 적을 모두 물리쳤으니 대승(大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해 상황을 파악하니 기뻐할 상황만은 아니었다.
각성자 12
비각성자 5
엘프 4
라이칸슬로프 13
부상자를 제외한 사망자만 도합 34.
안전지대 보호막이 있을 때와 달리 이제 아군에도 피해자가 나올 수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수많은 적을 상대로 이 정도의 희생만 냈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
재윤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진 후 내일의 전투에 대비했다.
“파손된 성벽 및 각종 시설 복원 비용으로 10만 코인이 넘게 들어갔습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재정 코인 덕분에 아직까지 부담은 없지만 본래보다 10배 이상의 비용이 들고 있어 앞으로가 걱정되는군요.”
관리자 오르도의 말이었다.
“식량과 생필품 값도 올라갔다고 들었습니다.”
“1코인이면 살 수 있던 식량 상자 및 생필품 상자가 12코인으로 인상된 상태입니다.”
정말 저렴하게 식량을 구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이제는 모든 걸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코인을 벌기가 극도로 어려워졌는데, 물가는 10배가 넘게 인상되었기 때문이다.
‘젠장! 아주 작정을 하고 있군.’
운명은 지금 외부적으로는 괴물들을 통한 공격으로,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압박을 통해 재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까불지 말고 굴복하라고 말이다.
‘점점 더 본색이 드러나는구나.’
재윤이 볼 때 운명이 하는 짓은 악마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쨌든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
당장은 막막하기만 했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 강재윤 대표님, 도시 초승달의 방어전에 무사히 성공했습니다. 》
그때 들려오는 이예은의 통신.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시무룩했다.
재윤은 무엇 때문인지 짐작했다.
《 수고많았다. 그런데 그쪽도 피해가 적지않게 발생했겠구나. 》
《 각성자 28명, 비각성자 172명이 사망했어요. 》
젠장! 거긴 성이 아니다 보니 방어가 더욱 어려운 곳이다.
그러다 보니 백단위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나마 용사 루니스와 마법사 로벨이 가서 그 정도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떤 처참한 상황일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마련해보겠다. 루니스 님과 상의해서 도시를 지키는데 주력해 줘. 》
《 네, 대표님. 》
초승달의 상황을 알고나니 재윤은 기분이 더욱 착잡해졌다.
이 기괴한 세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
재윤은 그들을 안전지대 속에 거주하게 만들어준 것에 얼마나 뿌듯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밖은 지옥으로 변할지라도 안전지대 내부에서는 그래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질 앞에 무력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내일 또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음 날 사방에서 또 대규모의 괴물들이 몰려왔다.
도시 초승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재윤과 데카투스는 어제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괴물들을 퇴치하며 희생자를 줄이려 했지만, 오늘도 어제 못지 않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날도 전쟁은 계속 되었다.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생겨났고, 그렇게 3일 동안 희망 성에서 사망한 이들은 100명을 넘어갔다.
그 중 인간들이 절반, 나머지는 엘프와 고블린, 라이칸슬로프 등이었다.
그러다 보니 적들을 압도적으로 해치우며 승리를 하고 있지만 희망 성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모두의 마음에 엄습해왔다.
마치 지구가 막 괴상하게 바뀌었을 때처럼 사람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아침.
다행히 오늘은 괴물들이 몰려오지 않았다.
대신 성의 북쪽 숲에 사라졌던 운명의 탑이 새로 생겨나 있었다.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물론 관리자 오르도였다.
“운명의 탑이 나타난 걸 보면 성주님과 대화를 원하는 것 같아요.”
“일단 가보겠습니다.”
재윤은 운명의 탑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엔 아루넬이 아닌 다른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2미터 신장의 사내.
어깨 뒤로 환한 빛의 날개를 가진 건 동일했다.
눈썹이 짙고 눈빛은 강렬했지만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각성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당신은?”
“저는 세다넬이라고 합니다. 아루넬 대신 운명의 탑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럼 아루넬 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녀는 더 이상 이곳의 일에 적합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본분을 잊고 각성자들의 입장을 너무 과도히 강조해 윗분들의 분노를 샀거든요.”
듣고보니 아루넬은 어떻게든 재윤 등에게 불이익이 적게 가도록 노력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 결국 징벌을 받은 것이다.
재윤은 세다넬을 노려봤다.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하는 이유는 뭐죠?”
그러자 세다넬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좀 느끼셨습니까?”
“뭐를 말입니까?”
“당신을 비롯한 인간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베푼 호의였습니다. 그런데 호의가 계속되자 그것이 권리인양 착각한 것 같아서 말이지요.”
재윤은 픽 웃었다.
“안전지대만 보면 호의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지구를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안전지대 하나 던져주면 그게 호의입니까?”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요.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차원계의 재앙에 의해 지구는 이미 멸망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막아주고, 거기에 운명의 힘을 통해 각성자가 되게 만들어줬을 뿐 아니라, 곳곳에 안전지대까지 만들어줘 보호를 해준 것이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처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세다넬은 노한 눈빛으로 마치 꾸짓듯 말했다.
‘배은망덕이라고?’
재윤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들이 나를 피 그림자의 재앙을 제거하려는 데까지만 이용하려고 한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아르데아를 제거하는 즉시 안전지대 효과가 사라지도록 만들어 놓았으면서 그게 무슨 호의라는 거지?”
그러자 세다넬은 크게 웃었다.
“그럼 그 이후의 삶까지 우리들이 보장해주길 바랐던 건가? 그거야말로 염치없는 생각이 아닐까? 우린 그대 인간들이 살든죽든 관심 없다. 하지만 우리 덕분에 그대들은 이곳 세상에서 무시못할 힘을 얻은 건 사실이지. 그것 하나만도 그대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하며 또한 복종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나오는 건가?
정말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인가?
재윤은 차갑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는데 이제 나는 지구에 난데없이 차원계의 재앙이라는 것이 갑자기 몰아닥쳐 멸망하게 되었다는 말도 못 믿겠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거든.”
“그대가 아니라 생각한다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
“사실대로 말해봐라. 그 또한 당신들의 수작이 아닌가?”
그러자 세다넬이 팔짱을 끼고 오연한 눈빛으로 재윤을 노려봤다.
“예의를 갖춰 좋게 대해주니 그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본데, 현실을 직시해라, 인간.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의 인간 각성자들은 그저 장기판의 병졸(兵卒)에 불과할 뿐이다.”
“병졸이라고?”
순간 재윤의 두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장기판의 병졸?
그렇다.
운명이 인간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제야 그 본심이 정확히 드러난 것이다.
쓰고 버릴 말.
이용 좀 하다가 버릴 소모품.
이래놓고 무슨 호의를 베풀었다는 건가?
“날 죽일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죽이는 게 좋을 것이다. 안 그러면 언제고 당신들을 찾아가 모두 죽일 지도 모르거든.”
“하하하하!”
세다넬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한심한 녀석이군. 그렇게 말을 해줘도 모르는가? 다시 말하지만 그대는 장기판의 말에 불과할 뿐이다. 장기판의 말이 장기를 두는 자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말만 들으면 그렇겠지. 하지만 장기판의 말이 그 운명을 벗어나 장기판 밖으로 뛰쳐나가면?”
“꿈꾸고 있는 건가? 그건 망상에 불과하다, 인간.”
“정말 그럴까?”
곧바로 재윤의 손에 플루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팟!
푸른빛의 검광이 번쩍이는 순간 세다넬의 목에 혈선이 살짝 그어졌다.
“으윽! 어, 어떻게 이런!”
세다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붙잡고 몸을 떨었다.
재윤이 싸늘히 웃었다.
“조금만 더 깊게 베었으면 당신은 죽었을 것이다. 이래도 망상이라 생각해?”
혈선이 살짝 갈라지며 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세다넬은 공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재윤을 쳐다봤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눈빛.
그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무기를 빼들 수 있는 건가?”
이곳은 운명의 탑 안이다.
운명의 힘이 허락하지 않으면 재윤은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어야 했다.
그런데 그 스스로 검을 빼들었을 뿐 아니라 세다넬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그
러자 재윤이 플루토를 세다넬의 목에 다시 겨누며 말했다.
“장기판의 말이 그 운명을 벗어나 장기판 밖으로 뛰쳐나가면, 가장 하찮게 여겨지는 말인 병이나 졸도 그 장기두는 놈을 죽일 수 있다.”
촥! 촤악!
플루토의 검신이 번쩍이는 순간 세다넬의 몸에 수십여 개의 상처가 생겨났다.
“크윽!”
세다넬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털썩 주저앉았다.
재윤은 싸늘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장기 두는 놈들 뿐 아니라 옆에서 구경하는 놈들도 다 죽여버릴 수 있지.”
“크윽! 대체 어떻게……?”
“기다려라. 곧 모조리 다 죽여줄 테니까.”
재윤은 그렇게 말한 후 돌아서서 운명의 탑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운명의 탑이 그대로 흐릿해지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후!'
재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플루토의 뿌듯해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 잘했다, 주인. 당신은 역시 내 주인의 자격이 있다. 》
사실 재윤도 그 안에서 플루토를 빼 공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세다넬이 재윤을 겁박하는 순간.
플루토가 뜻을 전해왔다.
《 저놈 기분 나쁘다, 주인. 베어버리자. 》
《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플루토. 》
재윤이 이렇게 대꾸하자 곧바로 플루토가 다시 뜻을 전해왔다.
《 난 운명의 힘 따위에 제한되지 않는다, 주인. 궁금하면 시험해봐라. 》
재윤은 실제로 세다넬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 나오는데 성공했다.
운명도 어쩌지 못하는 검 플루토.
비로소 플루토가 가진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