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그들은 훌륭한 경험치였다 (1) >
생사투(生死關)라 불리는 죄수들의 결투장은 수용소의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오우거 간수는 어둑한 지하 계단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크! 저놈도 설마 생사투 신청자인가?”
“인간 놈이잖아. 먹잇감으로 주려는 거겠지.”
“천만에! 저 오우거 놈이 데려오는 걸 보면 생사투 신청자가 분명해!”
“크크, 여기가 어디라고 인간 놈이 감히! 미친 거 아니야?”
생사투의 거대한 결투장을 빙 둘러싸고 한쪽은 마치 극장처럼 관람석이 존재하고, 다른쪽은 온갖 괴물들이 갇혀 있는 철창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고블린이나 오크를 비롯해 다크 엘프, 라이칸슬로프와 같은 아인족들도 보였지만 두 머리 거인이나 마치 용을 연상케하는 거대 괴수들도 득실거렸다.
그러나 오우거 간수에게 끌려가며 그것들을 바라보는 재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어째 별로 강한 녀석이 안 보이네.’
여기가 진짜 레벨 75제한 수련장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면 재윤은 같은 레벨의 다른 각성자와 비교한다면 전투력의 차원이 다르다.
각종 지식 및 운명의 탑 보상 효과 등으로 스탯 자체가 탁월할 뿐 아니라, 천마의 무공을 전수받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갇혀 있는 녀석들 중에는 별로 대단한 녀석이 없는 것 같고.’
재윤의 두 눈이 돌연 관람석으로 향했다.
지금 결투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 보니 관람석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곳에 관람을 온다면 죄수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럼 관람자 중에는 제법 강한 녀석이 있을까?’
대체 어떤 녀석들이 이런 곳에 관람을 오는지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괴물 죄수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갇혀 있는 지도 말이다.
물론 어차피 재윤에게는 모두 경험치 덩어리에 불과할 뿐.
‘그나마 간수들 중에는 제법 강한 녀석들이 있는 것 같은데.’
당장 재윤을 질질 끌고 가는 오우거 간수만 해도 보통의 오우거와는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지닌 녀석이었다.
‘이놈은 보기엔 그냥 평범한 오우거같지만 실제는 웬만한 보스급 괴물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놈이다.’
오히려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웬만한 녀석들보다 이 오우거 간수가 훨씬 강해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때 놈이 멈춰섰다.
“인간 놈! 여기가 네놈의 자리다. 이제 저 철창 안으로 들어가면 너를 묶고 있는 사슬은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거 고맙군. 그렇지 않아도 이 사슬이 무척 거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철창을 부수고 나오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철창은 용이 와서 후려쳐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럼 일단 철창이 열리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어야 할 것이다.
“결투는 언제 시작인가?”
“오늘이 바로 한 달에 한 번 생사투가 열리는 날이다. 오늘만 넘기고 들어왔으면 그래도 한 달은 살아있었을 텐데, 네놈은 오늘을 넘 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럼 바로 결투를 한다는 거냐?”
“누군가 널 지목하면 나가서 싸우면 된다. 상대가 누구든 관계없다. 다섯 번을 승리하면 너는 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수용소에서 석방되려면 다섯 번을 이겨라!
‘그런 식으로 나가는 방법이 있었군.’
혹시라도 이곳에 들어오는 다른 각성자가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 뿐인가?”
“뭘 말하는 거냐?”
“또 다른 선택지는 없느냐는 거다.”
그러자 오우거 간수가 큭 웃었다.
“물론 있다. 달리 갈곳이 없어 이곳에 남기를 원하면 나와 같은 간수가 될 수 있지. 물론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도 있고 말이야.”
“더 높은 곳은 또 뭐지?”
“관람자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것이다.”
“관람자?”
“그러나 꿈도 꾸지마라. 관람석에 있는 자들은 너같은 죄수들은 물론이고, 나같은 간수들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역시나 관람석에 있는 놈들이 훨씬 강할 것이란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이기면 어떻게 되는데?”
“결투를 계속하되 더 이상 너에게 도전하는 존재가 없을 경우에는 이 수용소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가장 강한 자가 이 수용소를 지배한다?”
그러자 오우거 간수가 큭 웃으며 재윤을 철창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거야 네놈에게는 그저 꿈에 불과할 뿐이다. 나처럼 간수가 되는 것만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하지만 혹시라도 간수가 되는데 성공한다면 쓸데없이 저 윗분들에게 도전하지 말고 거기서 멈춰라. 간수만 해도 여기서는 제법 살만하거든. 뭐든 다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재윤은 픽 웃었다.
“친절한 설명 고맙다. 널 처참한 고통 속에서 죽이려고 했는데, 특별히 고통없이 죽여주마.”
철창 안에 들어온 재윤의 두 눈에서 섬뜩한 안광이 번쩍였다.
순간 오우거 간수가 움찔 놀라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물론 철창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철창 안으로 들어간 즉시 재윤을 묶고 있던 봉인의 사슬이 사라졌다.
따라서 재윤은 모든 전투력의 제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 재윤의 안광에서 느껴지는 기세 앞에 오우거 간수가 기겁한 것이다.
그러나 재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기세를 감춰버렸다.
기세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
이는 마경 심법을 통해 가능한 능력이었다.
‘너무 강하게 보이면 나와 싸우자는 녀석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철창이 열려야 뭐든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재윤은 일부러 약한 척 대부분의 기세를 숨긴 것이었다.
“크큭! 건방진 놈! 제법 한가락 하는 듯 보인다만 그 정도로는 나와 같은 간수가 되기란 어림없는 일. 과연 네놈이 언제까지 살아있을지 두고보겠다.”
오우거 간수는 조소를 흘리며 사라졌다.
재윤은 철창 안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아공간에서 무기와 장비를 꺼내 장착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일단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저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
사실 검강을 펼치면 철창을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들었지만, 혹시라도 그러지를 못할 때를 대비해야 하니까.
간수들이 알아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간 후 실력을 드러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벌거숭이로 있을 수는 없는 일.
다행히 철창 안 한쪽에 온갖 종류의 오래된 장비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대부분 엉망인 것들이네.’
전투 중에 부서지거나 찢겨진 장비들.
수리도 하지 않은 채 대충 던져 놓은 것들이었다.
다행히 그 중 몸에 맞은 옷 하나를 발견했다.
검은색 가죽 바지.
무릎과 허벅지 부위가 약간 찢겨져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멀쩡했다.
‘이제 무기를 찾아보자.’
도끼와 창을 비롯해 각 종류의 무기들이 보였지만, 재윤의 눈에 들어온 건 녹슨 대검 한 자루였다.
‘이거면 되겠다.’
파투스 무기가 아니지만 이제 재윤에게는 그런 제약은 사라진지 오래다.
어느 무기를 들어도 검술을 펼쳐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한편 그 사이 관람석에 하나둘 관람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재윤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놀랐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보이는 기세가 풍겨났기 때문이다.
'꽤 강해들 보이는데? 저놈들은 다 뭐지?’
인간처럼 보이는 자들도 있고 엘프나 오크, 고블린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들은 대체 누구이며, 왜 괴물 죄수들의 생사투 따위를 관람하러 온 것일까?
'후!'
재윤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작전 변경이었다.
‘섣불리 실력을 드러냈다가 합공을 받으면 곤란해진다.’
본래는 철창이 열리면 모든 장비를 장착하고 나가 보이는 괴물들을 다 쓸어버리려고 했다.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괴물들이나 간수 괴물들 정도는 한 번에 몰려와도 어려운 상대가 아니니까.
그러나 관람석에 있는 이들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차원 자체가 달랐다.
눈으로 보이는 자들만 저 정도라면 어딘가 더 강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저들은 분명 이 75레벨 수련장과는 관련없는 존재들이다.’
5판만 승리하면 나갈 수 있도록 75레벨 각성자에게 맞는 수준의 괴물들이 각 철창들 안에 잔뜩 있었다.
그러나 관람자들은 보통의 75레벨 각성자들로는 죽었다 깨도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럼 이제 죄수 수용소의 생사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괴물 하나가 결투장 중앙에 서서 크게 외쳤다.
악어의 머리에 인간의 몸체를 가진 거대 괴수.
‘크로거?’
놈은 재윤이 예전에 해치운 크로거 군장 아르툼에 버금가는 신장을 가진 녀석이었는데, 그 기세는 아르툼보다 몇 배는 더 강력했다.
“첫번째 결투자는 죄수번호 102번으로 결정됐다. 앞으로 나와라!”
크로거가 외치자 철창 중 하나가 열리며 오크 하나가 나왔다.
2미터 신장을 가진 녀석의 체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지만 거대 크로거 앞에 서니 난쟁이처럼 보였다.
“죄수번호 102번! 그대는 이제 상대를 선택하라.”
그러자 오크는 망설임없이 손가락을 들어 재윤이 있는 철창을 가리켰다.
“저놈으로 하겠다.”
재윤은 왠지 어이가 없었다.
‘나랑 싸우겠다고?’
하긴 기세를 감추고 있는데다 인간이니 오크 녀석이 만만하게 볼 만했다.
‘뭐 잘됐네.’
덕분에 보다 빨리 철창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으니까.
쿠궁!
곧바로 재윤의 철창이 열렸다.
동시에 크로거가 외쳤다.
“죄수번호 32번은 결투장으로 나와라.”
우렁찬 크로거의 음성에 재윤은 철창 밖으로 나갔다.
검은 가죽 바지 위로 맨살 그대로를 내놓은 상체.
녹슨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로 터벅터벅 나오는 재윤의 모습을 결투장의 모두가 지켜봤다.
“저 인간 놈, 역시 가장 먼저 뒈지는구만.”
“키키키! 저 오크 놈 히죽거리는 것 좀 봐라. 인간 고기로 배 채우고 시작할 생각에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다."
“우라질! 저 인간 놈 내가 찍어놨는데 아깝다.”
철창에서 온갖 죄수 괴물들이 재윤을 보며 키득댔다.
모두들 당연히 인간인 재윤이 오크 전사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할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생사투는 방식의 제한 없고 상대를 죽여야 끝난다, 그럼 시작해라!”
매우 성의없는 설명과 함께 곧바로 결투가 시작됐다.
그런데 그 순간 재윤에는 따로 알림이 들렸다.
[첫 번째 생사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죄수 괴물 수용소의 생사투는 승리하면 추가로 대량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패배하면 사망하니 주의하세요.]
지면 죽는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겼을 때 추가로 대량의 경험치를 준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크히힛! 죽어라!”
그때 오크가 재윤의 머리를 노려 도끼를 휘둘렀다.
쒸잉!
순간 재윤이 슥 옆으로 비켜서며 대검을 사선으로 올려베었다.
서걱!
그것이 끝이었다.
오크는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 그대로 널브러졌다.
[생사투 1승에 성공했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그러자 크로거가 잠시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재윤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크게 외쳤다.
“죄수번호 32번 승!”
“쿠와아아!”
“큭큭! 뭐가 이렇게 싱겁냐?”
“장난하는 건가?”
“인간 놈 따위에게 죽다니 정말 허접한 오크 놈이었군.”
괴물들이 소리를 계속 질러댔다.
그러자 크로거가 크게 포효를 날려 모두를 진정시켰다.
“죄수번호 32번이 1승을 거두었다. 이제 그대는 상대를 지목할 수 있다. 누구로 하겠느냐?"
생사투의 결투 상대는 3승까지는 누구라도 지목하면 무조건 나와야 한다.
싸우기 싫어도 말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도전하겠다는 의사가 있는 괴물들에 한해서만 지목이 가능했다.
따라서 두 번째 결투를 앞두고 있는 재윤은 철창 안에 있는 누구든 선택이 가능했다.
순간 철창 안에 있던 괴수들이 난리가 났다.
“인간! 제발 날 선택해라!”
“나다 나! 다음 결투 대상으로 날 선택해줘!”
“살살 할테니 날 선택해라.”
서로 재윤과 싸우겠다고 난리였다.
재윤은 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저놈으로 하겠다.”
“죄수번호 24번! 나와라.”
“쿠하하하하! 애송이 인간 놈! 내가 만만해 보였느냐?”
신장이 5미터가 넘는 초대형 미노타우루스.
놈은 시합을 하라는 지시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 철창이 열리자마자 거대한 창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달려왔다.
“죽어라, 인간 놈!”
시퍼런 빛을 뿌리며 날아드는 창날에는 검기와 같은 기운이 맺혀 있었지만, 재윤의 대검이 번쩍이는 순간 놈의 머리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쿠웅!
머리가 사라진 미노타우루스의 몸체는 창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생사투 2승에 성공했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