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흑요정의 호의 (2) >
그런데 예상과 달리 테네르는 안개 지대를 그대로 지나쳤다.
곧바로 보이는 멋들어진 풍경.
쏴아아아!
시원스레 쏟아지는 폭포였다.
안개 너머에 이런 곳이 존재하고 있었던가?
“됐다.”
테네르는 그제야 멈춰서더니 근처의 자그만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경치도 좋고. 이제 간식이나 먹어볼까?”
그녀는 초코바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런데 재윤은 폭포 안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설마 저 안쪽에 관문이 있을 리는 없고.’
워낙 미세한 기운이다 보니 최근 방대한 내공을 통해 형성된 특별한 기감이 아니었다면 감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괴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재윤이 레벨을 올려야 한다고 하니 테네르가 제법 강력한 괴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럴 때 사용할 만한 아주 유용한 도구가 하나 있었다.
‘촉수로 살펴보자.’
이전에 거대 여왕개미를 해치우고 얻은 특별한 장갑에는 촉수를 생성시키는 기능이 존재했다.
‘레벨만큼 늘릴 수 있었지.’
그럼 지금은 80미터까지 늘릴 수 있으리라.
촤아악!
곧바로 재윤의 왼손에서 시커먼 촉수가 쭉 뻗어나갔다.
순간 초코바를 먹고 있던 테네르가 흠칫했다.
“흥! 어디서 이 따위 것을 감히!”
그녀의 손에서 칼날같은 것이 쏟아져나와 촉수를 서걱 잘라버렸다.
“윽! 뭐하는 짓이야?”
재윤은 어이가 없었다.
이 촉수의 재사용 시간은 1시간이다.
“대체 멀쩡한 촉수를 왜 자른 거냐?”
“닥쳐라. 그런 흉물스러운 것을 어디서 내 앞에 들이미는 것인가?”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보니 테네르는 촉수를 매우 혐오하는 듯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그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촉수를 꺼냈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직접 폭포 안쪽으로 들어가보는 거다.
‘혹시 모르니.’
제마검을 손에 쥐고 광혈의 막을 펼쳤다.
그리고 폭포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수를 통과하자.
‘동굴이 있었네?’
간혹 영화나 소설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괴물 죄수 수용소 : 레벨 75 제한 수련장]
그리고 그 동굴 앞에 펼쳐진 상태 창의 글자가 보였다.
‘괴물 죄수 수용소라고?’
그것도 레벨 75제한이라고 되어 있었다.
뒤따라 온 베르타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뒤바뀐 세계에 존재하는 비밀의 관문 중 하나인 것 같다. 어떤 괴물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분명 만만치 않은 괴물들일 것이다. 또한 수련장이라고 적혀 있지만 환상이 아닌 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실이라면 죽으면 끝이라는 건가?”
“아마도.”
베르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윤 또한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요정의 시험에서는 패배해도 죽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패배시 정말로 죽는 관문이라면 신중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레벨 75제한인 것을 보면 현재 재윤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있음을 의미했다.
“들어가겠다.”
그러자 베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곳에 진입이 불가능하다. 그대의 아공간에 들어가 있을 테니 필요할 때 날 소환해라.”
“그게 좋겠군.”
곧바로 베르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베르타를 얻었습니다.]
이 경우 베르타는 일종의 아이템처럼 변해 아공간에 입고된다.
인간이 아닌 코인 나무라서 가능한 일.
그런데 재윤은 돌연 뒤를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흑요정 테네르가 와서 서 있었다.
“나도 잠깐 그대의 아공간에 들어가도 될까?”
“그럴 이유가 있나?”
“베르타가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도 저 안에 들어갈 수 없거든.”
테네르는 짐짓 관심없는 척을 하며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딱히 그대를 도우려고 이러는 건 아니야. 그건 운명의 룰에 위배되거든. 그냥 심심해서 구경이나 하고 싶을 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대신 내가 한 가지 정보를 알려주겠다. 이 안에 들어가려면 그대가 가진 모든 장비와 아이템들은 특수 아공간 같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현명할 거야. 안 그럼 모조리 빼앗길 테니까.”
“빼앗긴다고?”
“그 이상은 묻지마. 이 정도도 원래 해서는 안 될 말이니까. 아무튼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 장비를 아공간에 넣든 말든 그건 그대의 마음이니 알아서 해라.”
그러나 그녀의 말과 달리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반드시 장비를 아공간에 넣으라고.
그것도 일반 장비 아공간이 아닌 특수 아공간으로 말이다.
다행히 재윤은 흑룡 데카투스에게 넘겨받은 특수 아공간이 하나 있다.
그 아공간 하나의 크기가 다른 장비 아공간을 합친 것보다 큰 터라 그쪽으로 물건들을 옮겨놔도 상관없었다.
“좋아. 너의 말을 믿어보지.”
“그럼 나도 그대의 아공간 신세를 져도 되겠지.”
“편할 대로.”
순간 테네르의 모습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테네르를 얻었습니다.]
재윤은 모든 장비를 탈착한 후 특수 아공간에 입고시켰다.
물론 제마검과 제룡검을 비롯한 모든 신화 장비, 거대 여왕개미의 장갑, 각종 장신구 등도 예외없이 넣었다.
‘이러니 너무 허전한데.’
아무리 그래도 괴물 소굴에 들어가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테네르가 쓸데없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희귀 장비라도 갖춰 입고 들어가자.’
아공간에 쌓여 있는 장비들 중에는 70레벨대 희귀 장비들도 있다.
전설 장비에 비하면 매우 허접한 옵션이 붙어 있지만, 그래도 아쉬운 대로 나쁘지 않았다.
‘이건 사라져도 별로 아까울 것도 없으니까.’
그렇게 재윤은 희귀 등급의 경갑을 갖춰 입고, 저랩 때 쓰던 광혈검을 손에 쥐었다.
‘이제 들어가자.’
곧바로 재윤은 결계를 통과했다.
[괴물 죄수 수용소에 입장했습니다.]
그와 같은 알림이 울리는 순간.
알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으윽!’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촤아악!
뭔가가 몸을 후려쳤다.
“으윽!"
재윤은 눈을 떴다.
“일어나라, 죄수번호 32번.”
쇠를 가는 듯한 거친 음성.
그것의 주인공은 붉은 머리털을 가진 거대 오우거였다.
놈은 채찍을 다시 휘둘러 재윤을 후려쳤다.
촤악!
“윽! 여긴?”
“크크크크! 이제야 깨어난 건가, 죄수번호 32번.”
재윤은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벌거숭이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양쪽 손목과 발목이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내공은 물론 파투스 전투 능력도 제한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괴물 죄수 수용소라는 던전에 들어왔는데 왜 갑자기 이꼴이 된 건가?
전신을 둘렀던 희귀 등급의 경갑은 온데간데 없었다.
광혈검도 사라졌다.
심지어 팬티까지 다 벗겨갔다.
‘테네르의 말대로네.’
특수 아공간 속에 있는 아이템들 빼고는 모조리 다 털어간 것이다.
만약 그 장비들을 그대로 입고 왔다면 전설 등급의 중요한 아이템들을 대량으로 잃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
‘다행히 혈액병 아공간도 건재하군.’
혈액병 아공간도 일종의 특수 아공간이라 그 안의 혈액병들을 재윤의 허락없이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공간의 아이템들은 멀쩡했다.
또한 내공도 그대로인데 팔과 다리를 두른 쇠사슬로 인해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힘이나 내공을 봉인하는 저주가 걸려있는 건가.’
한편 그렇게 재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오우거는 뭔가 못마땅한 듯 채찍으로 마구 후려쳤다.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 하는 거냐?”
촤아악! 철썩! 촤악! 철썩!
“으윽! 젠장!”
한낱 오우거에게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재윤의 전신은 피투성이로 변했다.
오우거는 그런 재윤을 질질 끌고가더니 철창을 열고 안으로 던졌다.
커다란 항아리 모양의 감옥.
위쪽 높은 곳이 철창이자 문이었다.
위에서 밧줄 등을 던져 꺼내주기 전에는 나가기 힘든 구조였다.
“크크크크!”
오우거는 그런 재윤을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내려다보고는 사라졌다.
재윤은 어이가 없었다.
‘이 쇠사슬만 어떻게 풀면 탈출이야 어려운 일이 아닌데.’
문제는 그 스스로 풀 수가 없다는 것.
‘분명 수련장이라고 하던데 왜 갑자기 죄수가 되어 있는 거지?’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이 안에 갇혀 있어야 할 것이다.
“식량 배급이다!”
그때 또다른 괴물 하나가 지나가며 재윤이 있는 철창 아래로 뭔가를 던졌다.
꿈틀거리는 주먹만한 벌레.
그것이 식량인 모양이었다.
‘으! 젠장!’
재윤은 기를 쓰고 쇠사슬을 풀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렇게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암흑처럼 변한 철창 안.
재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앞에 테네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꼴이 엉망이구나, 인간.”
재윤은 그녀를 노려봤다.
“어떻게 된 거냐? 왜 내가 이꼴이 된 거지?”
“당황하지 마. 이곳 수련장의 코스일 뿐이야. 그대가 아니어도 이 안에 누군가 들어왔으면 같은 상황이 되었을 거야.”
“어쨌든 잘 나왔어. 어서 이 사슬 좀 풀어 봐.”
“그건 불가능해. 내가 물리적으로 간섭하는 순간 그대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나 또한 운명의 룰을 어긴 징벌로 진짜 이런 곳에 갇혀 있게 될 수도 있고.”
테네르는 재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보다 내일 오우거 간수에게 생사투에 나가겠다고 말해.”
“생사투?”
“수용소의 죄수 괴물들끼리 전투를 벌이는 시합이야. 그 전투에서 승리하면 수용소에서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특혜가 주어져.”
“하지만 이 상태로 괴물들과 싸우면 난 죽을 텐데.”
그러자 테네르가 걱정말라며 미소 지었다.
“생사투를 벌일 때는 쇠사슬을 풀어주게 되어 있어. 물론 간수들과 경비 병력들이 쭉 지켜보고 있겠지만, 그대에게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야.”
순간 재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쇠사슬만 사라지면 그땐 아공간에서 장비를 꺼내 장착할 수 있다.
제마검이나 제룡검을 손에 쥐고 이곳의 괴물들을 도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수련장이라는 말이 공연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네. 그래도 이런 일이 있다고 미리 좀 얘기해 주지 그랬어.”
그러자 테네르가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걸 직접적으로 미리 밝혔다간 내가 지금 그대 꼴이 되고 말았을 거야.”
“또 그 운명의 룰 때문인가?”
테네르는 찜찜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대에게 아공간 얘기를 해준 것만으로도 어떤 벌을 받을지 몰라 조마조마한 심정이라고.”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테네르가 아공간 얘기를 미리 해주지 않았다면 재윤은 지금 정말 막막했을 수도 있었다.
중요한 많은 장비를 다 빼앗겼을 테니까.
그 상태로 강력한 적들과 싸워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고마워하는 마음 잊지마. 혹시라도 내가 징벌을 받아 이런 곳에 갇히게 되면 설마 모른척 하지는 않겠지?”
“염려마.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반드시 구해준다.”
그러자 테네르는 미소 짓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테네르를 얻었습니다.]
다시 재윤의 특수 아공간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후우!’
재윤은 심호흡을 했다.
‘생사투라는 게 있었다니!’
이내 그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났다.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사슬의 봉인이 풀리면 가장 먼저 오우거 간수부터 손을 봐줘야 할 것이다.
놈은 감히 채찍으로 재윤의 몸을 걸레처럼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다.
철창이 열리더니 오우거 간수가 훌쩍 뛰어내려 재윤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위로 휙 올라왔다.
10미터가 넘는 높이였지만 오우거에게 그런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콰당!
놈은 재윤을 철창 밖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이제 노역을 하러갈 시간이다. 일어나 걸어라.”
“잠깐! 나 생사투에 참가하겠다.”
그러자 오우거 간수가 가소롭다는 듯 재윤을 내려다봤다.
“생사투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만 거기 가면 너 따위 인간 놈은 그저 맛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란다.”
“글쎄! 먹잇감이 될지 사냥꾼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
재윤이 비릿하게 웃자 오우거 간수는 기분 나쁘다는 듯 채찍으로 한 대 후려쳤다.
촤악!
“크큭! 뒈지고 싶어 환장했구나. 원한다면 넣어주지. 가서 하루라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말이야.”
곧바로 오우거 간수는 재윤을 수용소에서 가장 무서운 죄수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