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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생존-145화 (145/200)

145화.  < 제자가 되다 (2) >

고지식한 용사 루니스라면 이 상황에 그를 충분히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

데카투스는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그는 재윤이 저렇게 무대포로 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생각해보면 재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

‘하긴 저놈은 이미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천마의 재앙이 도래한다고 해도 죽을 염려는 없겠지.’

천마가 아무리 악마 중 악마라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이들까지 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대신 마음에 거슬리는 녀석은 용사이든 마왕이든 가리지 않고 다 죽여버릴 것이다.

사실상 천마의 권속이라 할 수 있는 극소수의 행운아들 빼고는 다 죽는다고 봐야 했다.

당연히 제자가 된 재윤은 그 행운아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결국 저 애송이에게 빌붙어 살아야할 신세인 건가.’

지금 판국에서는 죽어봤자 그냥 개죽음에 불과하리라.

《 협상하자! 날 살려주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 》

결국 데카투스는 크게 탄식하더니 재윤을 바라보며 사정하듯 말했다.

치욕스러웠지만 이 상황을 자초한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자신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그러자 루니스가 재윤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재윤의 의도를 읽고 있었다.

이 상황에 정말로 데카투스를 죽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정말로 데카투스가 죽는 순간 천마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재앙일 테니까.

용사인 그녀로서는 당장 흑룡을 죽이는 것보다 그 재앙을 막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한편 재윤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데카투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 나는 널 살려둘 아무런 이유가 없다. 네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적만 몇 번이지? 심지어 내 부모님까지 해치려고 했다. 그런 널 내가 살려둘 것 같은가? 》

재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데카투스는 몸을 떨었다.

그렇다.

아무리 마왕 데사오의 명령을 받아 한 일이라지만 그걸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그 스스로 생각해도 재윤이 얼마나 자신에게 이를 갈고 있을지 공감이 되긴 했다.

《 지난 일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날 살려주겠느냐? 》

데카투스는 재윤과의 협상을 포기했다.

그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비를 구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무엇보다 재윤은 더 이상 하찮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천마의 제자가 되었으니까.

장차 천마가 기억을 되찾으면 마왕들도 재윤 앞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될 것이다.

‘빌어먹을! 복도 많은 놈이군. 차라리 날 제자로 거두지, 왜 저런 녀석을 제자로 거뒀을까?’

데카투스는 문득 자신이 천마의 제자가 되었으면 얼마나 신이 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아쉬워했다.

그때 재윤이 말했다.

《 일단 천마의 기억 봉인을 푸는 물건을 내게 주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

순간 데카투스의 표정이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 첫 번째 조건이야 어렵지 않다. 어차피 그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라 나로서는 네가 맡아준다면 바랄 게 없는 일이지. 》

그러나 노예가 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할 수는 있지만 그것과 노예가 되는 건 다른 일.

데카투스는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재윤을 노려봤다.

《 나는 노예 따위는 되지 않는다. 그럴 바에는 천마의 기억을 되돌리고 그의 손에 맞아 죽을 것이다. 》

그 눈빛을 본 순간 재윤은 데카투스를 노예로 만들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용인 터라 누군가의 노예로 지내는 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일인 모양이었다.

물론 두 번째 조건은 굳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첫 번째 조건.

천마의 기억을 되돌리는 물건만 받아낸다면 데카투스가 어디로 가든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일.

《 그래서 내 조건을 거절하겠다는 건가? 》

재윤이 노려보자 데카투스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 기억의 봉인을 푸는 물건을 돌려주고, 이후로 네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다. 노예가 아닌 동료로서. 이 정도로 봐주면 안 되겠느냐? 》

시키는 대로 다 하겠지만 노예가 아닌 동료로 인정해달라.

용으로서 최후의 자존심은 챙기겠다는 뜻이었다.

《 그러다 네가 내 뒤통수를 치지 않겠다고 어떻게 믿지? 》

《 살려준다면 용으로서의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네게 약속하마. 》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루니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편으로 재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용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한 맹약은 어기지 않아요. 아무리 흑룡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죠. 그 이름을 걸고 맹약한다면 동료로 받아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루니스 또한 용사로서 고지식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 죽이기보다 동료로서 받아주는 게 훨씬 현명한 일.

그런데 그 순간 데카투스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루니스를 쳐다봤다.

기를 쓰고 반대할 줄 알았던 루니스가 설마 자신을 도와주는 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서로 그 정도 선에서 양보하는 게 좋겠군. 》

그러자 데카투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로써 그는 재윤의 노예가 되는 신세는 면했다.

재윤이 그에게 용으로서의 자존심은 지키게 해준 것이다.

《 그럼 이제 봉인된 기억의 구슬을 네게 넘기겠다. 이 구슬이 아공간 밖으로 잠시라도 나가게 되면 천마는 즉시 눈치채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공간에서 아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최선이지. 아공간은 보유하고 있느냐? 》

《 물론이다. 》

재윤이 끄덕이자 데카투스는 다시 물었다.

《 혹시 장비와 연결된 아공간만 있는 건 아니겠지? 》

《 벨트와 연결된 아공간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

그러자 데카투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문제가 아주 많다. 그런 허접한 아공간에는 이 강력한 기운이 담긴 구슬을 보관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그 벨트가 부서졌을 경우에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

《 전설 등급의 벨트라 그리 허접한 아공간은 아니다. 》

전설 5성의 장비인 환공작의 벨트.

다름 아닌 데카투스의 부하 중 하나인 환공작을 해치우고 얻은 벨트로 30칸의 아공간을 쓸 수 있었다.

장비 이름을 말하면 데카투스가 울컥하겠지만.

《 무슨 대단한 장비라 해도 소용없다. 장비의 아공간은 장비가 깨지면 부서져버리는 태생적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날 동료로 받아준 선물로 네게 귀속될 아공간 하나를 통째로 넘겨주마. 》

《 그런 것도 있나? 》

재윤이 묻자 데카투스가 픽 웃더니 뭐라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흑룡 데카투스가 당신에게 아공간을 넘겨줍니다.]

[특수 아공간을 확득했습니다.]

[특수 아공간은 장비와 상관없이 당신에게 영구 귀속됩니다.]

[특수 아공간 인벤토리가 생성되었습니다.]

[봉인된 기억 구슬을 얻었습니다.]

【특수 아공간 인벤토리】

-봉인된 기억 구슬

데카투스는 천마의 기억이 봉인된 구슬이 있는 아공간을 통째로 재윤에게 넘긴 것이다.

《 이제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누군가에게 그것을 넘겨주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 아공간을 빼앗지 못한다. 》

《 고맙다, 데카투스. 그런데 이렇게 아공간을 줘도 상관없는 건가? 》

《 그런 아공간이야 내게는 수십 개도 넘는다. 별로 아까울 것도 없으니 신경쓰지 마라. 》

하나도 대박이라 느껴질만한 특수 아공간을 수십 개나 가지고 있다니.

하긴 달리 용이겠는가.

기나긴 용생을 살면서 온갖 보물을 모아놨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수 아공간도 아마 그런 식으로 획득한 보물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재윤은 비로소 안도했다.

기억의 봉인 구슬은 이제 영원히 그의 아공간에서 잠들어 있게 될 테니까.

‘천마의 기억은 절대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의 제자로서 그를 속이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것보다 지구를 초유의 재앙으로부터 구하는 것이 더 우선이니까.

“이제 데카투스 당신도 나의 동료가 되었으니 귀룡 성에 들어가게 해주겠다.”

“그나저나 나의 날개는 언제쯤이나 돌려줄 생각인가?”

“설마 돌려받을 생각이었나?”

재윤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말하자 데카투스가 인상을 구겼다.

“이게 동료로서 할 짓이냐? 이 상태로는 유사시 본신으로 돌아가도 전투에 별 도움이 안될 거다.”

“전투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마라. 당신은 마왕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으로도 충분해.”

“날개를 돌려주면 더 잘할 수 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안 돼. 날개가 사라지면 귀룡의 속도가 느려진다. 귀룡 대신 탑승물이 되어 주겠다면 그렇게 하고.”

“제길! 죽어도 그 짓은 못해.”

누군가의 탑승물이 된다는 것 또한 용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잠시 천마의 탑승물이 되긴 했다.

그거야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긴 하지만, 재윤이 원하는 건 귀룡을 짊어지고 다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나중에 다른 날개를 얻게 되면 그때는 꼭 돌려주기를 바라겠다.”

“용의 날개를 또 얻을 방법이 있나?”

“최상급 마족의 날개 정도면 용의 날개와 거의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왕의 날개는 더 대단하지만 그걸 얻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 최상급 날개만 얻어도 귀룡의 속도를 높이는 데는 충분하다.”

“최상급 마족을 잡으려면 마계에 가야 할텐데.”

“굳이 마계까지 갈 필요 없다. 어차피 그대가 아무리 막는다 해도 마계는 언젠가 열릴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루넬도 같은 말을 했으니까.

지금 재윤이 할 수 있는 일은 재앙을 파괴해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다.

* * *

한편 재윤이 루니스, 데카투스와 함께 귀룡 성의 정원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곳에는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잔 더 하시지요, 어르신.”

“험! 그래야지.”

재윤은 처음에는 잘못봤나 했다.

그런데 틀림없었다.

이제 그의 사부가 된 노인 아니, 천마가 아버지 강두성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잠을 잔다고 했는데 그 사이 일어나 아버지와 대작 중일 줄이야.

‘흑룡과 심어로 대화를 나누길 천만다행이군.’

흑룡의 예상대로였다.

만약 육성으로 대화했으면 천마가 다 들었을 것이다.

지글지글.

베르타가 한쪽에서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는데, 천마는 강두성과 함께 술을 마시며 고기도 부지런히 집어먹었다.

"재윤이가 어르신의 제자가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아이지만 잘 부탁합니다.”

강두성은 천마의 정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연배의 존재임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달리 부를 호칭이 없어 그냥 어르신이라고 했는데, 천마는 그 호칭이 그리 거슬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녀석은 염려 마라. 나의 제자가 된 이상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는 존재가 될 테니까.”

천마는 그 사이 잔에 가득 따라진 소주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이 술 이름이 소주라고 했나?”

“예."

“고급스럽진 않지만 나쁜 맛은 아니군.”

메뉴는 한국에서 서민들이 먹는 소주와 삼겹살.

천마의 흡족해하는 표정을 보니 술과 고기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했다.

재윤은 곧장 가서 말했다.

“사부님 언제 깨어나셨습니까?”

“조금 전에 일어났다. 어쨌든 마침 잘 왔구나. 네 녀석도 술 한 잔 따라보거라.”

“예, 사부님.”

재윤은 공손히 소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아버지 강두성의 잔에도 따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재윤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강두성은 염려 말라는 듯 씩 웃었다.

오히려 강두성도 즐거워 보였다.

‘아버지.......'

재윤은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부모님께 가능하면 천마와 마주치지 말고 집안에만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천마와 친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받거라. 네게도 한 잔 따라주마.”

“예, 사부님.”

재윤은 잔을 들어 천마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단번에 그 잔을 들이켰다.

“그래서 구슬은 잘 보관하고 있느냐?”

바로 그때 천마로부터 들려오는 음성.

재윤은 잘못 들었나 했다.

“예? 지금 무슨 말씀을?”

그러자 천마가 재윤을 슥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재윤은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설마 알고 있는 건가?’

놀란 건 재윤뿐이 아니었다.

뒤따라 들어와 어색한 표정으로 서있던 루니스 또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데카투스는 공황 상태에 빠진 듯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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