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친구입니다 (2) >
노인이 물었다.
“너는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그, 그게……"
데카투스는 그저 고개를 숙인채 몸을 떨었다.
노인의 기세가 너무 강렬해 그와 눈도 마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노인이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으니까.
만약 당황스런 기색의 그 표정을 봤다면 노인은 분명 이상함을 눈치챘을 것이다.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거지?’
데카투스는 노인이 한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나타나 자신이 누구냐고 묻다니.
설마 그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인가?
그때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네놈이라고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겠지. 왠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와봤더니 착각이었나보군.”
순간 데카투스는 다시 몸을 떨었다.
‘틀림없어. 구슬 때문이다. 내가 그 구슬을 꺼내자 그 기운을 느끼고 저자가 여기에 온 거야.’
그 구슬은 이 노인이 가진 제약을 풀어줄 열쇠와 같은 물건.
어쩌면 저 노인은 익숙한 기운을 감지한 순간 아득한 공간을 순식간에 주파해 이곳으로 왔을 지도 모른다.
방금 전 적시에 구슬을 아공간에 넣지 않았다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데카투스는 쓸데없이 아공간에서 구슬을 꺼내 만지작거린 자신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지금 보니 천만다행이도 저자는 지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 구슬이 바로 저자의 기억을 돌아오게 만드는 물건이었군.’
오랜 용생(龍生)으로 눈치 하나는 빠른 그였다.
그는 단번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그럼 이 구슬은 능력의 봉인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기억의 봉인을 풀어주는 것이다. 저자의 능력은 이미 개방되어 있다는 뜻.’
그러다 보니 더욱 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저 노인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했다가는 이 자리에서 한줌 먼지로 변하고 말 것이다.
‘빌어먹을! 내가 왜 구슬을 꺼내가지고.’
재윤과 루니스가 마왕 데사오를 견제해준 덕분에 이제 좀 다시 살만해진 그였다.
막장으로 몰려 마왕과 자폭을 하려 했을 때와 달리 그는 더 이상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살고 싶었다.
그것도 오래도록.
그러려면 구슬의 존재는 철저히 감춰야 할 것이다.
“혹시 강재윤이라는 놈을 알고 있느냐?”
그런데 그때 노인이 뜻밖의 질문을 해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노인을 쳐다봤다.
순간 노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표정을 보니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아, 예. 그렇습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표정을 들키고 만 터라 데카투스는 모른다고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인간 놈의 이름이 저자의 입에서 나오는 건가?’
데카투스는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노인의 표정을 보니 재윤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너는 그 녀석과 어떤 관계냐?”
노인이 물었다.
순간 데카투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대답을 해도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노인은 강재윤이라는 이름을 말하기 전까지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 보였으니까.
이 던전에 있는 그의 부하들이 모두 죽은 것이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친구입니다.”
그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어째서 저자가 그 인간 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살고봐야 하니까.
“친구라면 그 녀석이 어디에 있는 지도 알고 있겠군.”
“물론입니다.”
노인의 표정이 부드러워지자 데카투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친구라고 말한 덕분에 살아난 것이다.
“나를 그 녀석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예. 저를 따라오십시오.”
순간 노인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데카투스는 아차 싶었다.
따라오라니!
저자 앞에서 그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뒤에 서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존재이니까.
물론 노인은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는 방금 전 그 말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후우! 기억이 봉인되어 있어서 천만다행이군.’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곧바로 그는 본신으로 변했다.
한쪽 날개밖에 없어 볼썽사나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그가 흑룡의 본신으로 돌아오자 노인은 그 등 위로 올라가 섰다.
“날개는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
“그놈이 빼……아니, 제가 빌려줬습니다.”
“그 녀석에게 빌려줬다?”
“예."
재윤이 빼앗아갔다는 말을 하면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게 된다.
그래서 빌려줬다고 말했는데 다행히 노인은 좋게 생각했다.
“날개를 다 빌려주다니 꽤 친한 사이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데카투스는 문득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노인을 재윤에게 떠넘기고 싶을 뿐이었다.
* * *
한편 재윤은 그때 데카투스가 준 지도에 표시된 던전 하나를 소탕했다.
비교적 약한 수준의 던전은 아버지 강두성의 레벨도 올려줄겸 함께 파티 사냥을 하곤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
조다연과 에이든 또한 파티에 넣어주었다.
[각성자 강재윤의 파티]
-파티장 : 강재윤(Lv76)
-파티원 : 강두성(Lv32)
-파티원 : 조다연(Lv38)
-파티원 : 에이든(Lv40)
그러다 보니 현재 강두성의 레벨은 Lv32.
Lv20에 이르렀을 때는 귀룡 성에 있는 운명의 탑에서 아루넬을 만나 전술 관련 특화 능력도 얻었다.
그것도 무려 A급.
전투 시 적의 전술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필살기를 펼치지 못하게 무력화시키는 등 레벨이 오를수록 강두성의 능력도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그의 레벨이 낮아 보스급 괴물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지만, 간혹 운 좋게 한 번씩 걸릴 때가 있었다.
방금 전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던전의 보스는 거대 오우거 형상의 괴물이었는데, 강두성의 극 전투 능력인 전술 무력화에 걸려 일시적이지만 필살기를 펼치지 못했다.
물론 재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놈이 제마검 한 방이면 쓰러지는 약한 녀석이라 별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짐짓 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최대한 극적으로 잡았다.
“드디어 해치웠어요, 아버지!”
“고생했다! 이제 나도 좀 파티에 기여를 하고 있는 거냐?”
“물론이죠. 방금 전 그 보스 녀석은 전술 무력화 덕분에 손쉽게 잡았어요.”
재윤의 말에 에이든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동조했다.
“전술 무력화 능력 정말 대박입니다! 보스가 필살기를 펼치지 못하니 제가 탱킹을 하는데 부담이 없었습니다.”
“전술 무력화 아무리 봐도 정말 사기적인 능력이에요.”
조다연도 눈치껏 그렇게 말하자 강두성은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별 볼일 없는 능력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구나.”
그의 눈빛은 얼마 전에 비해 매우 강렬해졌다.
레벨이 오르면서 생겨난 보너스 스탯 때문이다.
또한 재윤이 레벨에 맞는 전설 등급 장비도 챙겨준 터라 그는 이제 각성자답게 비각성자들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강인한 신체와 생명력을 갖게 된 상태였다.
그러니 어찌 레벨업이 즐겁지 않겠는가.
물론 재윤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간혹 적당한 사냥터가 있으면 재윤이 알아서 챙겨주니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한번씩 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재윤이 짐짓 자신을 띄워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사실을 모른 척하며 좋아해주고 있을 뿐이다.
레벨을 올리는 것보다 아들과 함께 파티 사냥을 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니까.
그렇게 재윤 등이 던전 밖으로 나오자 세붐과 제칸, 로사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칸과 세붐은 큼직한 고깃덩이를, 로사엔은 각종 풀과 꽃잎, 열매 등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이는 괴물 요리(Lv13)라는 생활 능력의 각성자인 김지현의 부탁 때문이었다.
괴물 고기와 희귀 나물 등을 재료로 만든 그녀의 요리는 맛도 맛이지만, 특수 효과가 존재했다.
* 변이 버섯 스프
-분류 : 파투스 음식
-효과 : 파투스 공격력 +20
-지속 시간 : 섭취 후 2시간
* 큰 뿔 멧돼지 고기 버섯 볶음
-분류 : 파투스 음식
-효과 : 최대 생명력 +50, 모든 저항 +2
-지속 시간 : 섭취 후 4시간
아직은 김지현의 괴물 요리 레벨이 낮아 요리 종류도 몇 개 없고 효과도 그리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효과였다.
레벨이 오르면 더욱 유용한 버프 효과가 생겨나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하루에 일정 시간은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재료 걱정은 없었다.
세붐과 제칸이 고기를 도축하기에 적당해 보이는 괴물이 있으면 잽싸게 가서 고깃덩이를 챙겨왔기 때문이다.
또한 로사엔은 숲의 지식을 통해 김지현의 요리에 도움이 될만한 나물과 야채, 버섯 등을 채취해왔다.
“강재윤 님! 저쪽에 피 그림자 괴수들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때 루니스가 한쪽을 가리키며 다급히 외쳤다.
“아르데아가 또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군요.”
마치 게이트를 타고 나타나듯 멀쩡한 숲에 피 그림자 괴수들이 나타나 숲을 갉아먹는 현상을 목격하는 건 이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먼저 들어가계세요. 저는 저놈들을 처치하고 가겠습니다.”
“그래. 조심하거라.”
강두성도 피 그림자의 재앙이 어떤 것인지 들은 터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아들 재윤이 아니고서는 절대 죽일 수 없는 불가사의 괴물들.
재윤이 그 재앙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빨리 귀룡 성의 안전지대로 들어가주는 것이 재윤을 도와주는 일.
그는 조다연, 에이든과 함께 근처에 있는 귀룡 성의 안전지대로 들어갔다.
세붐 등도 마찬가지.
밖에는 재윤과 루니스, 베르타만 남았다.
‘숲을 갉아먹기 전에 빨리 해치우자.’
숫자는 적었지만 놈들을 저대로 두면 금세 사방으로 넓게 흩어져 숲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 번 피 그림자화 되어버린 지역은 복구가 불가능했다.
‘혈광파!’
다행히 재윤은 놈들이 흩어지기 직전 광역기를 펼쳐 단번에 몰살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루니스가 상공 한쪽을 올려다보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피하세요. 흑룡이 본신으로 나타났어요.”
그녀가 가리킨 상공.
그곳엔 거대한 검은 용이 날아오고 있었다.
한쪽 날개 뿐이지만 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는 듯 빠른 속도로 이동해 오고 있었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또 무슨 꿍꿍이일까?’
지금 상태로는 루니스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타난 것이 이상했다.
어쨌든 일단 안전지대로 들어가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아무리 한쪽 날개가 없다지만 현재 재윤의 능력으로는 흑룡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윤은 그대로 멈춰야 했다.
갑자기 그의 앞에 웬 노인 한 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재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 노인이 이곳에?’
천마인지 혈마인지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존재.
결계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하더니 어떻게 나온 것일까?
더욱 황당한 건 그 노인과 함께 곧바로 흑룡 데카투스가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내려온 즉시 용의 본신에서 흑발의 중년인 모습으로 변신했는데, 마치 똥을 씹은 듯 괴상한 표정이었다.
‘억지로 끌려온 게 분명해.’
비로소 재윤은 데카투스가 왜 본신으로 이곳에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데카투스는 노인의 눈치는 물론이고 루니스의 눈치도 보며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루니스는 데카투스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노인이 나타난 순간 그대로 얼어붙은 듯 굳어버린 것이다.
그저 노인이 눈빛을 한 번 보냈을 뿐인데 그녀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마왕 앞에서도 당당하던 그녀를 눈빛 한 번으로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존재.
‘서, 설마?’
그녀는 불현듯 하나의 존재가 떠올랐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을 찾았다.”
그때 노인이 재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윤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알아냈느냐?”
“아직 못 알아냈습니다.”
“어쩐지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 했더니 그 때문이었군.”
노인은 살짝 탄식하더니 말을 이었다.
“급할 것은 없다. 과거의 내가 누군지를 모르면 뭐 어떻겠느냐? 이제 그 갑갑한 곳에서 나왔으니 굳이 그런 것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겠지.”
“결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처음에는 그랬지. 그런데 유심히 쳐다보고 있으니 빈틈이 보이더구나.”
순간 재윤은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봉인된 결계를 스스로 박차고 나올 줄이야.
운명의 탑에 있는 아루넬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경악하고 말 것이다.
그녀의 말로는 그 결계는 자격을 갖춘 각성자가 아니면 왕복이 불가능한 곳이라 했다.
그런데 저 노인은 그 결계의 틈을 발견한 것이다.
도무지 그 능력의 한계가 어디일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저 노인이 천마(天魔)라면?
그가 기억을 회복한 것과 상관없이 이미 재앙이 시작된 것일 지도 모른다.
따라서 재윤은 부디 저 노인이 천마가 아닌 혈마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잊었느냐? 네가 내게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했던 것을 말이야.”
재윤의 눈이 커졌다.
“물론입니다. 그럼 설마?”
“막상 결계 밖에 나왔는데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제자나 한 명 키워볼까 한다. 다행히 네 친구 녀석이 네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며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
“친구라니요?”
재윤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며 쳐다보자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한쪽 날개 없는 흑룡 말이다. 네 녀석의 친구가 아니었더냐?”
순간 데카투스가 흠칫하더니 재윤을 바라보며 간절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