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그는 대체 누구인가 (1) >
노인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재윤은 전신이 그대로 굳었다.
공포 때문에 얼어붙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노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이 마치 주변의 공기를 고체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방안을 가득채웠기 때문이다.
‘으윽! 이건?’
눈도 깜빡 할 수 없었다.
아니,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어떻게 그저 기세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시체처럼 누워있을 때보다 눈을 쳐다보자 몇 배는 더 강해보였다.
‘대체 이 노인이 누구이기에?’
흑룡이나 루니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환상 속에서 봤던 마왕 데사오의 기세도 이 노인보다도 못했다.
물론 환상이라 실제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단연코 이 노인은 재윤이 지금까지 본 이들 중 최강자였다.
“너는 누구냐?”
그때 노인이 물었다.
그러나 재윤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 수가 없었으니까.
이러다 숨이 막혀 죽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
노인이 기세를 풀었다.
재윤은 비로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강재윤입니다.”
“강재윤?”
“예."
재윤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이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나는?”
“예?”
“내가 누구냐?”
“그걸 제가 어떻게?”
재윤은 순간 노인으로부터 엄청난 살기가 느껴져서 입을 닫았다.
노인은 크게 분노한 듯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재윤은 순간 모른다, 라고 대답했다간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잘못 들어왔나?’
대단한 전투 능력이라도 얻게 되지 않을까 하고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크게 잘 못 걸린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과 상봉한지 불과 하루다.
재윤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부모님의 상심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대체 처음 보는 나보고 자신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쩌라는 거지?’
재윤은 노인이 억지를 부려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누구고 왜 여기에 있는 건가? 도대체 왜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 것인가?”
이건 재윤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노인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렇다.
노인은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후!"
재윤은 오히려 더 난감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그런데 노인은 금세 담담한 표정을 회복했다.
“강재윤이라 했느냐?”
“예."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노인의 태도가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름이 누군지 대답하지 않으면 죽일 듯 살기를 뿜어댔지만 이제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재윤은 지금이 더 중요한 순간임을 알고 있었다.
‘이런 건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좋겠지.’
“결계 밖에 있는 보물 상자에서 이 비급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아 비급의 비밀을 풀 단서를 알아보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재윤은 마경을 노인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노인이 마경을 받아 잠시 살펴보더니 재윤을 다시 쳐다봤다.
“너의 몸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이 흐르고 있구나. 너는 적어도 상승 검법을 수십 년 정도 수련한 자가 아니면 낼 수 없는 기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내공은 한줌도 감지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구나.”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어디 한 번 그 검으로 나를 공격해보겠느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노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냐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더니, 그 다음에는 재윤의 능력에 대한 호기심을, 이제는 공격해보라고까지 한다.
“괜찮으니 날 공격해봐라. 너의 실력이 너의 기세만큼 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였다.
전력을 다하기 보다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봤다.
퍽!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재윤은 복부에 엄청난 고통을 느낀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의 손에 있던 제마검은 노인의 손에 쥐어졌는데, 노인은 손을 떨며 경악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군. 이 검이 나를 거부하다니.”
노인은 재윤의 검격을 피하며 단번에 검을 빼앗았다.
그러나 재윤의 검을 손에 쥐고 휘두를 수가 없었다.
손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제마검은 성주 명성 Lv8이 되어야 장착할 수 있는 신화 등급의 파투스 무기.
따라서 각성자이면서 높은 명성을 가진 성주가 아니면 제마검을 사용할 수가 없다.
노인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그같은 제한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검은 오직 너만 사용할 수 있는 검인가 보군.”
노인은 재윤에게 제마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방금 전의 공격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을 펼쳐라. 만약 또 다시 그 따위로 성의 없는 공격을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대충 공격했다가 호되게 당한 재윤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고 보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노인은 흑룡이나 루니스보다 강한 기세를 풍기는 불가사의한 존재.
그가 다칠까봐 두려워 대충 공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재윤은 전쟁신의 검술(Lv71)로 터득된 검술의 경지를 그대로 발휘했다.
휘휙! 휙! 파파팟!
제마검이 공간을 가르며 무수한 사선을 만들어냈다.
하나의 사선이 사라지기 직전 또 다른 사선이 생겨났고, 그런식으로 공격은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허!”
노인은 일순간 감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는 마치 공간의 틈새로 이동하듯 제마검이 형성한 검격의 사선들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어떻게 움직이면 저렇게 되는 거지?“
재윤은 순간 자신이 일부러 노인이 아닌 다른 공간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느낌이 그렇다 뿐이지 재윤은 절대 그런 허접한 공격을 펼치지 않았다.
노인이 특별한 능력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무슨 바다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기분이다.’
기를 쓰고 검을 휘둘렀지만 노인을 적중시킬 수 없었다.
그렇게 대략 5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따앙!
일순 노인이 손가락으로 제마검의 검신을 강하게 쳤다.
“우욱!”
재윤은 검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노인은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훌륭하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지만 너는 검을 휘두르는 동작 하나하나가 완벽에 가깝다. 또한 특별한 신법을 배운 것 같지 않은데도 움직임이 바람과 같고 그 힘은 천생의 신력을 가진 이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다.”
“그래봤자 당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윤은 방금 전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
물론 전투 능력이나 극 전투 능력은 펼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최후의 한 수는 숨겨두고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설령 그것들을 펼쳤다고 해도 노인의 몸에 작은 상처 하나 낼 수 없었을 것은 분명했다.
방금 전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 앞에서 재롱을 떠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런 훌륭한 상승 검법을 배웠는데 굳이 마경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느냐? 너의 나이에 지금도 일류 수준은 충분히 되니 앞으로 꾸준히 정진한다면 장차 놀라운 경지에 이를 것이다. 내공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만 그거야 내가 알 바는 아니겠지.”
그 말과 함께 노인은 더 이상 재윤에게 관심이 사라졌는지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마경의 무공을 가르쳐주십시오.”
재윤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왠지 이렇게 외쳐놓고도 스스로 황당하단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러나 노인과 잠시 결투를 벌여본 결과 지금까지 레벨을 올리며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경지가 어린아이 수준처럼 느껴졌다.
만약 저 노인과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흑룡은 물론이고 마왕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자 노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와라.”
순간 재윤은 어이가 없었다.
이 괴상한 밀실의 결계 속에 있는 노인.
그의 정체를 재윤이 무슨 수로 알아낸다는 말인가?
‘혹시 아루넬은 알지 않을까?’
그래서 재윤은 다시 물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아내면 마경의 무공을 가르쳐 주실 겁니까?”
순간 노인이 일어나 앉았다.
그는 조금은 기대어린 눈빛으로 재윤을 쳐다봤다.
“마경의 무공은 누구나 원한다고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운 것도 문제지만 신체의 조건도 아주 뛰어나야 한다. 네 녀석 정도라면 마경의 무공을 수련하기에 비교적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
그 말에 재윤의 표정도 밝아졌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다만 어째서 마경을 비롯한 나의 무공들은 모두 기억나는데 정작 나 자신이 누군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꼭 당신이 누군지 알아오겠습니다.”
“단순히 이름은 의미가 없다.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또한 어째서 네가 들어온 저 결계 밖으로 나는 나갈 수 없는 지도 알아내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들을 알아온다면 그 대가로 너를 나의 제자로 받아주겠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재윤은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기억을 찾아주면 노인에게 마경을 전수받는 것이고, 실패하면 그냥 아무것도 아니니까.
* * *
재윤이 결계에서 나오자 루니스가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노인의 정체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재윤은 간략하게 결계 안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루니스의 표정도 경악으로 변했다.
“그렇게 엄청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녔지만 왠지 나쁜 사람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저의 느낌일 뿐이라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그저 직감일 뿐이다.
노인이 작정하고 살기를 일으켰을 때는 이전에 환상 속에서 보았던 마왕 데사오조차 별 것 아닌 수준으로 만들만큼 강력해보였다. 그런데도 데사오처럼 사악한 느낌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루니스가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대의 전설 중에 마왕들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존재가 하나 있었죠. 혹시라도 당신이 보았던 노인이 그가 맞다면 두 번 다시 저 결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재윤은 루니스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놀랐다.
“그런 존재가 있었나요?”
“사실 무척 허무맹랑한 전설이라 저는 여전히 믿기지 않아요. 그가 마계를 누빌 때 그의 손에 찢겨죽은 마왕들이 적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누군가 꾸며낸 얘기라 생각했는데, 만약 그가 실존했고 지금도 살아있으며, 혹시 당신이 만난 자가 그라면, 그건 악몽과 같은 일입니다.”
“사악한 존재였나보군요.”
“네. 절대 그가 기억을 되찾게 해서는 안 돼요. 그는 우리가 죽었다 깨도 감당할 수 없는 초유의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자칫 하면 당신조차 재앙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의 제자가 된다면 말이죠.”
루니스는 우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재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강재윤 님! 당신이 빨리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도 당신은 불가사의한 속도로 강해지고 있어요. 레벨이 빨리 오르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무모한 모험은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재윤은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정말 그렇게 사악한 존재라면 마경의 무공은 포기하겠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루니스는 안도한 듯 표정이 밝아졌다.
“흑룡도 이제 감히 방해를 하지 않을 테니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레벨을 올리기 가장 좋은 때이죠. 최대한 빨리 85레벨을 달성해 피 그림자의 재앙인 아르데아를 처치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동안 항상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애타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부모님의 생사였다.
그런데 이제 두 분을 무사히 찾아 안전한 귀룡 성에 모시고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는 봐야겠어.’
정말로 노인이 루니스가 우려하는 그 고대의 사악한 존재라면 재윤도 노인의 기억을 찾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건 봉인된 대악마를 깨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그러나 노인이 정말 그렇게 무서운 악마라면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제마검이 경고를 보냈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제마검은 노인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섣불리 노인을 루니스가 말한 고대의 무서운 악마로 단정지을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전혀 다른 존재일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