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칠성기의 주인 (1) >
스스스.
던전에 들어서는 순간 주변 공간이 빠르게 뒤바뀌었다.
던전의 입구는 온데간데 없고 사방이 화염으로 가득한 불바다로 변했다.
‘이건 또 뭐야?’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결계가 펼쳐졌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광혈의 막 보호막의 내구도가 깎여나가지 않았다.
‘으윽! 고통은 느껴지는데 어째서 보호막이 그대로지?’
흑룡 데카투스의 저주가 사라지고 다시 전투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되면서 재윤은 즉각 광혈의 막으로 전신을 둘러놓았다.
이거야 기본이니 당연한 일.
그런데 지금 같은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신이 익는 정도가 아니라 타서 가루가 될 것 같은 뜨거운 고통은 느껴지는데 정작 보호막의 내구도는 그대로였다.
심지어 생명력 또한 1포인트도 하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아야 정상인데 고통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건 실제가 아닌 우리의 상상을 자극해 펼치는 허상이에요.”
루니스의 말이었다.
재윤은 물었다.
“허상인데 왜 이런 고통이 느껴지는 거죠?”
“환주술의 힘이에요.”
“환주술?”
“아무래도 이 던전의 주인이 환공작 베라가 분명해요.”
재윤의 눈이 커졌다.
“환공작 베라?”
“환수의 일종이죠. 흑룡 데카투스의 부하 중 하나로 알려졌는데 이곳 세상까지 소환됐는지 몰랐네요.”
“흑룡에게 부하들도 많이 있나 보군요.”
“마왕에게 마족들이 있듯 흑룡에게도 만만치 않은 부하들이 있어요. 환공작 베라도 그 중의 하나예요.”
상급 환수(幻獸) 환공작(幻孔省) 베라.
루니스 또한 말로만 들어봤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환공작 베라는 전투력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환주술을 통해 상대에게 허상의 고통을 주는 터라 꽤 까다로운 상대예요."
루니스는 푸른 검을 번쩍 휘둘러 결계의 한쪽을 쪼겠다.
“고통을 참을 자신이 없으면 이곳은 제게 맡기고 던전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제가 놈을 이쪽으로 몰고 올게요.”
결계의 쪼개진 틈으로 바깥 출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재윤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고통을 참는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그의 두 눈이 타오르듯 빛났다.
그동안 수많은 험난한 여정이 존재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이제 참는데는 이력이 났다.
실제 고통이 아니고 허상의 고통일 뿐이라면 얼마든지 견뎌줄 수 있었다.
루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같이 가요. 하지만 못견디겠으면 곧장 뒤로 달려와 저 틈으로 달아나세요.”
“알겠습니다.”
루니스는 이 고통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역시나 용사답게 살이 녹아들어가는 고통 따위는 별것 아닌 모양이었다.
‘대단하네.’
재윤은 루니스의 참을성에 감탄했다.
사실 그는 말은 자신있게 했지만, 아니, 실제로도 참는 데는 자신있긴 하지만, 살이 녹아드는 고통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으! 타죽는 고통이 이런 건가.’
속으로는 말 그대로 미쳐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고통에 눌려 던전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용사 루니스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될 테니까.
그렇게 그가 열기를 묵묵히 참아내며 전진하자 루니스가 힐끗 쳐다보며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쯤 포기하고 나갈 줄 알았는데 뜻밖이네요.”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윤은 짐짓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루니스가 대견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대단히 강해졌군요. 전투력뿐 아니라 정신력도.”
“그보다 정말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나요?”
“이런 거야 우습죠. 배고픈 건 좀 견디기 힘들지만 다른 고통은 잘 참아요.”
하긴 루니스는 유독 배고픔에 약하긴 했다.
그러나 그거야 그녀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잠시 전진하자 고통의 종류가 바뀌었다.
타는 듯한 열기였다면 이제는 정반대로 가공스러운 한기였다.
‘으! 얼어죽는다는 게 이런 건가.’
재윤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힐끗 옆을 쳐다보니 루니스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태연해 보였다.
한편 그렇게 재윤과 루니스가 환주술(幻D兄術)의 고통을 참아내며 다가오는 모습을 흑룡 데카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빌어먹을! 잠시 이곳에서 힘을 회복하려고 했더니 하필이면 여길 찾아낸 건가?”
데카투스는 아직 부상 회복이 되지 않았다.
루니스와 전투를 벌이며 입은 부상도 문제였지만, 마지막에 마궁의 재앙 크시라를 보호하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끌어모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본래 이곳은 은밀히 감춰진 던전이었다.
그의 부하인 환공작 베라가 관리하는 일종의 거점으로, 그는 마인의 숲 마궁에서 바로 이곳으로 이동해 힘을 회복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어제 이곳의 위치를 근처의 도시 레마르의 관리자인 아피스가 간파해내고 말았다.
물론 거기까지라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레마르의 각성자들 수준으로는 이곳 던전에 오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이니까.
문제는 바로 방금 전 발생했다.
용사 루니스가 이곳에 들어왔다.
이건 절대 우연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분명 운명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저 조금 룰을 어긴 것 뿐인데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인가?'
이 뒤바뀐 세상에서 운명의 힘과 맞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가능한 운명의 룰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재윤에게 저주를 내려 파투스의 전투 능력을 펼치지 못하게 한 것은 상당한 무리수였다.
‘그놈이 대체 뭐라고, 고작 하찮은 인간 한 놈 따위를 운명의 힘이 비호한다는 건가’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야. 하필이면 용사 루니스가 그놈 옆에 철썩같이 붙어 있어서 죽이기도 어렵고.’
그때 거대 공작새 형상의 환수인 환공작 베라가 말했다.
“로드! 루니스 뿐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인간 놈에게도 환주술이 거의 통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잠시 후 저들은 이곳까지 도달할 겁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아직은 나의 힘이 회복되지 않아 용사 루니스를 상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예, 로드.”
곧바로 환공작 베라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환주술의 힘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로 인해 환주술이 주는 고통의 강도가 더욱 강력해졌다.
"음."
"으!"
루니스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재윤의 인상도 일그러졌다.
‘뭐냐? 이제 좀 참을만했는데.’
전신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고통.
그것이 갑자기 전신의 살을 칼로 저미는 것같은 가공스러운 고통으로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뒤로 돌아 이 던전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재윤은 참았다.
‘여기서 뛰쳐나갈 거였으면 진작 나갔다.’
그 고통을 참고 들어왔는데 여기서 나가면 그간의 고생이 다 무의미해지고 말 테니까.
그냥 고통을 참는다기보다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얼마든지 당해준다.’
하지만 이 고통을 준 환공작 베라라는 놈에게 반드시 이 고통의 대가를 돌려줄 것이다.
“정말 잘 참는군요.”
루니스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재윤이 지금의 고통까지 참아낼 줄은 몰랐다.
환공작 베라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터라 지금의 고통은 용사인 그녀도 상당히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재윤이 그것을 견뎌낼 줄이야.
“이 정도야 뭐 별거 아닙니다.”
재윤이 인상을 펴며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재윤의 손가락이 세차게 떨리고 있는 걸 루니스는 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재윤은 엄청난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을 뿐.
그것이 그녀에게도 적지않은 위안이 되었다.
사실 그녀 혼자였다면 이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윤이 옆에서 함께 견뎌내주자 그것이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흑룡 데카투스가 그 모습을 보며 치를 떨었다.
“독한 것들 같으니! 속도가 거의 줄지 않는군.”
“용사 루니스는 그렇다 쳐도 저 인간 놈의 정신력도 보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야. 절대 살려둘 수 없는 놈이다.”
그러자 환공작 베라가 눈을 기괴하게 번뜩이며 말했다.
“로드! 저는 환주술을 통해 상대가 가진 마음을 엿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보다 전투력이 약한 대상에 한하지만 말이지요. 그래서 저 인간 놈의 마음에 숨겨진 약점을 하나 알아냈습니다.”
“그래? 그게 뭐냐?”
“헤어진 부모를 찾기 위해 이곳 세상을 뒤지고 있군요. 만약 우리가 그 부모를 찾아내 놈을 협박하면 가장 손쉽게 처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순간 데카투스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환공작 베라는 이런 잡기에 매우 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적의 마음을 엿보는 건 흑룡인 그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본 그들의 모습을 내게 비춰봐라.”
“예, 로드.”
환공작 베라는 재윤의 마음을 통해 읽어낸 두 남녀의 모습을 데카투스에게 보여줬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있다면 저 녀석을 로드의 하수인으로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러자 데카투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느냐?”
“운명의 힘이 지배하는 이곳에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게 시간을 주신다면 어떻게든 알아내겠습니다.”
“기대해보마.”
“그보다 저들이 이 근처로 거의 도착했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로드.”
그 말에 데카투스는 즉시 마법진을 소환했다.
“너 또한 잠시 시간을 끌다가 피해라. 용사 루니스는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염려마십시오. 용사 루니스를 이길 수는 없지만 허상을 만들어 도주하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부디 존체를 보중하십시오, 로드.”
베라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데카투스는 크시라와 함께 마법진이 형성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츠으으읏!
그의 모습이 마법진의 게이트와 함께 사라지는 그 순간.
재윤과 루니스가 환주술의 극악한 고통을 이겨내고 멀리 환공작 베라가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저놈이에요. 환공작 베라.”
“꽤 화려하게 생겼군요.”
화려한 빛깔의 공작새.
깃털이 마치 보석처럼 신비롭게 빛났다.
그런데 저 아름다운 모습의 공작새가 흑룡 데카투스의 부하라니.
“그런데 갑자기 제룡검의 빛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흑룡 데카투스가 이곳에 있다가 달아난 것 같아요. 그놈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방금 전 사라졌어요."
역시나 제룡검이 공연히 경고음을 울린 것이 아니었다.
이 던전 안에 있던 흑룡 데카투스를 감지하고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제룡검이 금세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흑룡 데카투스는 사라졌지만 환수인 환공작 베라는 남아 있으니 당연한 일.
“어차피 데카투스를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오늘은 놈의 부하로 만족하도록 하죠.”
루니스는 그 말과 함께 환공작 베라의 앞으로 번쩍 이동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그러자 베라는 왼쪽 날개를 방패처럼 말아 방어했다.
심지어 오른쪽 날개는 마치 랜스와 같은 모양의 창 형상으로 변해 매서운 반격까지 했다.
쒸이이잉!
오른쪽 날개가 공간을 뚫어버릴 듯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이에 루니스가 흠칫 놀라며 피했다.
베라가 키득거렸다.
“용사 루니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거라 생각했느냐?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되게 해주마."
“꿈도 야무지구나.”
루니스는 코웃음치고는 베라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베라는 날개 방패를 이용해 루니스의 공격을 막아내며 즉각 반격을 해왔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루니스의 검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 베라의 몸에 기다란 자상이 생겨났다.
촥!
“꾸으윽!"
베라가 비틀거렸다.
루니스가 재윤을 쳐다봤다.
“지금이에요.”
그때 재윤은 이미 검기파와 질풍 화살을 비롯한 각종 필살기를 놈에게 날려보내고 있었다.
파스스스!
그런데 그 순간.
베라의 신체가 그대로 연기로 변하더니 근처에 있던 루니스의 몸 주변을 휘돌았다.
그 연기는 마치 밧줄처럼 루니스의 몸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런!”
루니스는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속박의 저주였다.
이 저주에 빠지면 잠시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당해낼 수 없는 강적을 묶어놓고 도주하는 뻔한 수법이지만,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서둘러요! 놈이 입구 쪽으로 나갔어요. 치명상을 입었으니 쫓아가면 죽일 수 있을 거에요.”
“알겠습니다.”
재윤은 전력을 다해 던전 입구쪽으로 달렸다.
과연 화려한 외양의 공작새가 멀리 도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를 흘리고 있는 걸 보니 부상이 꽤 심한 듯했다.
하긴 용사의 검에 맞았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죽여주마.’
그런데 재윤이 뒤쫒차 베라가 그것을 눈치채고 더욱 빠르게 달려갔다.
재윤은 질풍 이동과 바람 이동을 펼쳐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촤아악!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촉수다.
재윤의 왼손에서 흑색의 촉수가 빛살처럼 뻗어나가 베 라의 목덜미를 움켜줬다.
‘됐어!’
재윤은 쾌재를 부르며 곧바로 놈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촉수의 크기를 줄이면 마치 공간 이동을 하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그러나 베라는 조소를 흘리듯 재윤을 슥 노려보더니 눈에서 광선을 쏘아 촉수를 끊어냈다.
그리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동굴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젠장!’
거의 다 잡았는데 놓치고 말았다.
워낙 빠른 속도로 사라져 이제 뒤쫓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래도 재윤은 전력을 다해 베라가 사라진 곳을 향해 뛰었다.
어느새 던전 밖이었다.
‘아니?’
그런데 재윤은 전혀 뜻밖의 광경을 목도했다.
‘어떻게 귀룡이 저놈을!’
뜻밖에도 귀룡이 입에 커다란 공작새를 물고 있었다.
물론 그 공작새는 방금 전 도주했던 환공작 베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