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재회 (2) >
의식을 잃은 듯 보였지만 재윤의 정신은 멀쩡했다.
데카투스의 석화 마법에 걸려 꼼짝을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루니스의 팔에 안겨있는 동안 그녀의 몸에서 나온 신비한 기운이 석화의 저주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야 흑룡 데카투스에게 불의의 기습을 날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기회가 왔다.
그것은 루니스가 그를 두 번째 공중으로 던졌을 때였다.
촉수로 재빨리 제마검을 가져온 후 그 즉시 전력을 다해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아아앙!
데카투스의 공격에 의해 생명력이 40%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전쟁신의 투혼이 발동되어 그의 공격력은 대폭 증가했다.
“크으윽!”
데카투스가 일순간 바닥으로 철푸덕 넘어졌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공격인데다 그 파괴력이 상당해 데카투스는 입에서 울컥 피를 쏟아냈다.
“크윽! 감히! 죽어랏!”
그는 번쩍 몸을 일으켜 허공을 향해 쌍검을 휘둘렀다.
휘휘횡! 파파팟-
폭풍처럼 거센 공격이 재윤이 있던 일대의 공간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러나 그때 재윤은 재빨리 촉수를 이용해 멀리 재앙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루니스 님! 저는 신경쓰지 말고 그 놈을 상대하세요. 그 사이 저는 이걸 파괴하겠습니다.”
어차피 불의의 기습 한 방에 데카투스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데카투스에게 타격을 입힌 후 루니스에게 숨돌릴 틈을 준 것만으로도 상황은 유리해졌으니까.
“저 놈이 감히!”
데카투스가 치를 떨더니 재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앞을 루니스가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각오해라, 데카투스!”
양손이 모두 자유로워진 루니스의 움직임은 방금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데카투스는 어쩔 수 없이 루니스의 공격을 받아내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조소를 흘렸다.
“가소로운 인간 놈! 너의 힘으로 크시라를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크시라?
재앙의 옥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못할 것 없지.”
재윤은 즉시 재앙의 옥좌를 향해 제마검을 내리쳤다.
휘익!
그런데 제마검은 빈 공간을 갈랐다.
스스스.
동시에 재앙의 옥좌가 사라지며 백발에 핏빛 눈을 가진 섬뜩한 외모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소로운 놈 같으니!”
붉은 빛의 채찍이 순식간에 재윤의 몸을 휘감았다.
재윤은 재빨리 제마검으로 그것을 막았다.
순간 채찍이 살아있는 뱀처럼 기겁하더니 제마검에서 황급히 멀어졌다.
채찍이 제마검을 두려워할 줄이야.
뿐만 아니라 크시라 또한 꺼림칙한 표정으로 제마검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아악!
제마검의 검신이 드베스탄들을 만났을 때보다 더욱 강렬히 빛났다.
그만큼 크시라가 강한 악마라는 뜻.
“그런 무기를 들고 있다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크시라는 더욱 난폭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채찍은 제마검 앞에서 맥을 못추고 튕겨나갔다.
재윤은 그대로 돌진해 크시라를 어깨로 밀어쳤다.
쾅!
동시에 뒤로 밀려나는 그녀의 몸을 향해 제마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서걱-!
“아악!”
크시라는 재빨리 이동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왼쪽 어깨가 팔과 함께 그대로 잘려나갔다.
재윤은 머뭇거리지 않고 검을 쳐들었다.
“이번에는 끝장을 내주마.”
비틀거리는 크시라를 향해 재윤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앞을 흑색 폭풍이 가로막았다.
“뒤로 피해요!”
루니스의 다급한 외침에 재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흑색 폭풍이 있던 자리에 피투성이 상태의 흑룡 데카투스가 서 있었다.
그는 방금 전 루니스의 검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이곳으로 이동해 재윤을 공격했던 것이다.
재윤이 재빨리 피하지 않고 크시라를 공격했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슥.
그 사이 루니스가 재빨리 재윤의 앞쪽으로 이동했다.
데카투스는 비틀거리는 크시라를 한 팔로 안았다.
그리고는 루니스의 뒤쪽에 있는 재윤을 노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인간 놈! 오늘은 이대로 물러간다만 다음엔 반드시 네놈을 죽여버리겠다.
“어딜 도망가느냐?”
루니스가 번개처럼 검격을 날렸지만 그곳엔 흐릿하게 흩어지는 데카투스의 잔영만 남아있었다.
크시라도 마찬가지.
그 사이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런! 하필이면 그 놈이 재앙을!’
재윤은 기가 막혔다.
마궁에 있는 재앙의 근원을 흑룡 데카투스가 가지고 사라졌으니 이대로라면 파괴할 방법이 없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강재윤 님. 재앙을 파괴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요.”
루니스가 재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척 지쳐보이는 그녀는 금세라도 쓰러질 듯 위태해보였다.
정신력으로 흑룡과 싸웠던 것이지 그녀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재윤은 재빨리 생명력 물약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마 정말로 저를 기다리기 위해 일부러 흑룡에게 잡혀 있던 건가요?”
“데카투스가 당신을 목표로 정한 이상 반드시 함정을 파놓고 끌어들일 거라 생각했죠. 그때 제가 그 자리에 있어야 당신을 구할 수 있잖아요.”
재윤은 무언지 모를 뭉클함을 느꼈다.
그가 흑룡의 함정에 빠졌을 때 구하기 위해 일부러 포로가 되어 있었다니.
“너무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자칫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을 가장 빨리 만나려면 그 방법 외에는 없었어요. 아까 봤겠지만 흑룡의 뒤통수를 칠 만한 힘은 남겨두고 있었으니 무모한 건 아니에요.”
루니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뿌듯해했다.
그러다 돌연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생명력 물약을 마실 틈도 없이 실신한 것이다.
사실 그녀는 이미 한계가 온지 오래였다.
용사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가 재윤과 단둘이 남는 순간 긴장감이 풀리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루니스 님!”
재윤은 재빨리 그녀를 안고 입에다 생명력 물약을 조금씩 넣어주었다.
동시에 그녀의 상처들에 물약을 아낌없이 부었다.
‘매번 재회할 때마다 이런 상태라니.’
지난 번에도 흑룡에게 당해 다 죽어가던 그녀를 재윤이 살려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물론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재윤을 살리기 위해 그녀가 목숨을 건 상황이니까.
루니스가 아니었다면 지금 재윤은 흑룡에게 농락당하다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재윤은 루니스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동시에 사악한 악룡인 흑룡 데카투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데카투스! 언제고 넌 내가 반드시 죽인다.’
용이 강하긴 하지만 불사의 존재는 아니었다.
재윤은 두 번이나 흑룡에게 부상을 입히고 나자 자신감이 생겨났다.
앞으로 강해지면 흑룡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의 탑 아루넬이 당신을 찾습니다.]
[가장 가까운 운명의 탑에 들러주세요.]
그때 들리는 알림.
‘재앙 파괴에 실패했는데 왜 나를 찾는 거지?’
성공했다면 재윤은 보상으로 제룡검이라는 또 다른 신화 무기를 받을 수 있다.
그 즉시 데카투스의 저주에서 풀려나 파투스 전투 능력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됐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보상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제룡검을 얻고 싶다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흑룡과 함께 도주한 재앙의 옥좌 크시라를 찾아내 해치워야 할 것이다.
‘어쨌든 가보자.’
재윤은 마궁을 나가는 즉시 운명의 탑에 들러보기로 했다.
그 사이 생명력 물약의 효과가 나타났는지 루니스가 깨어났다.
“이제 괜찮아요?”
“덕분에요.”
루니스는 어느새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재윤 또한 생명력 물약을 마셔 상태를 회복했다.
“이 마궁의 재앙을 파괴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시급한 게 있습니다.”
“마왕의 마력구를 파괴하는 일이겠죠?”
“예. 오늘 잘하면 레벨 70을 달성할 겁니다.”
재윤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얘기해줬다.
도시 샤인의 거주자들이 마음을 모아 그를 도와줬다는 말에 루니스의 표정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 기적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무척 걱정했어요.”
루니스가 필사적으로 재윤을 찾았던 이유.
재윤이 마족이나 마왕의 유혹에 넘어가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난 번에도 얘기했지만 가장 큰 위기는 당신이 레벨 70을 달성했을 때 올 가능성이 높아요. 마력구를 꺼내는 순간 그것을 파괴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왕의 하수인이 되어버릴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죠.”
위기가 올 걸 알면서도 레벨이 오르면 해야했을 것이다.
때마침 루니스가 나타나준 건 정말 기적과 같은 일.
“이제 마저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려야겠습니다.”
“괴물들을 사냥할 거라면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루니스는 재빨리 마궁을 돌며 재윤이 있는 쪽으로 괴물들을 몰아왔다.
잠시 후 드베스탄 10여 마리가 그녀에게 쫓겨왔다.
재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놈들을 어디서 찾아냈어요?”
“라넨 대륙에 있을 때 마궁을 제법 박살냈거든요. 다른 곳은 몰라도 마궁에 대해서는 좀 알아요. 괴물들이 숨어있을 법한 장소는 척하면 알 수 있죠.”
루니스가 거의 다 죽여놓은 상태로 몰아온 터라 재윤은 손쉽게 드베스탄 12마리를 처치할 수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전쟁신의 검술이 Lv70이 되었습니다.]
[드베스탄에 대한 C급 지식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레벨 70.
재윤은 가슴이 벅찼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제 재앙을 파괴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루니스가 돌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재윤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재윤의 이마에 작은 문양을 그렸다.
번쩍!
순간 재윤의 이마에 푸른 검의 형상이 빛났다가 사라졌다.
“제가 가진 용사의 문양으로 마왕이 나타났을 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이 효과는 잠깐만 지속되니 이제 서둘러 마력구를 파괴하세요.”
“당신이 도와준다니 든든하군요.”
“하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아주 조금 뿐, 모든 건 당신의 의지에 달려있답니다.”
“염려마세요. 마왕에게 절대 안 넘어갑니다.”
재윤은 자신있게 미소 짓고는 아공간에서 마왕 데사오의 마력구를 꺼냈다.
꺼내자마자 즉각 파괴하려고 한 손에는 제마검을 쥐고 있었는데.
스스스.
갑자기 사방의 정경이 뒤바뀌었다.
수많은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엎드려 있는 화려한 대전.
찬란히 빛나는 왕좌 위에 오연히 앉아있는 한 명의 여성.
한 번 보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극치의 미모.
그녀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기세는 가공무쌍 그 자체였다.
“네가 그것을 파괴한다고 해서 나의 계획이 무산되거나 하는 건 없다. 어차피 나의 강림이 약간 늦어질 뿐이지.”
마왕 데사오였다.
그녀는 권태로운 눈빛으로 재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감히 나에게 맞섰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곳에 강림했을 때 너는 물론이고 너와 관계된 모두가 죽을 것이다.”
데사오가 왕좌에서 내려와 재윤을 향해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 네가 나의 일에 협조하면 너는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보좌하게 될 거야. 이건 나 데사오의 이름을 걸고 맹약할 수 있어. 다른 놈들은 다 죽여도 너, 그리고 너와 관계된 이들은 죽이지 않으마.”
지난 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여성적인 매력으로 유혹을 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숨막힐 듯한 기세와 권위로 재윤을 설득하고 있었다. 양쪽 다 인간의 의지로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뻔히 악마의 유혹인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은 충동.
저 신처럼 오연한 마왕의 앞에 앙복하여 충성을 바치고 싶은 충동.
스스.
그런데 그때 재윤의 옆에 루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마왕. 네가 무슨 수를 써도 이분은 너의 하수인이 되지 않아.”
그러자 데사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감히 내 결계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루니스! 넌 정말이지 나를 여러모로 귀찮게 하는구나."
“내가 하고 싶은 소리야. 나도 귀찮아. 난 정말 마왕 따위는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거든.”
“닥치고 결계에서 꺼져!”
데사오가 손을 휘젓자 루니스는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나 그 사이 데사오의 몸에는 온통 검은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처음 봤던 여신과 같은 신비한 포스는 사라지고, 마왕으로서의 흉포한 기세만 가득했다.
마왕의 가장된 모습이 아닌 그 실체를 보여준다.
그것이 용사 루니스의 도움이었다.
덕분에 재윤은 마왕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 대답은 이거다, 마왕.”
파악!
제마검이 마력구를 후려쳤다.
그러자 마력구가 폭발이라도 하듯 수천 조각으로 깨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인간! 오늘 일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주마.”
데사오가 이를 갈며 외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이 뒤흔들렸다.
스스스.
재윤은 어느새 본래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왼손에 쥔 마력구는 박살난 상태였다.
[당신은 마왕 데사오의 마력구를 파괴했습니다.]
[대규모 재앙을 파괴해 명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곧바로 알림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