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마음을 모으다 (1) >
“루니스 님?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재윤이 깜짝 놀라며 묻자 루니스가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이후로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맸죠. 그러다 우연히 저 도시를 발견하고 오던 중인데 당신의 모습이 보여 달려왔어요.”
“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혹시 베르타는 보지 못했나요?”
“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 혼자뿐이었어요.”
루니스 또한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재윤을 부축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상태가?”
“그때부터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깜빡 졸기만 해도 마족이 정신 공격을 해와서요.”
재윤이 졸려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루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많이 걱정했어요. 용케 잘 참아냈군요.”
“당신이 왔으니 잠시 눈을 붙여도 되겠습니다. 염치없지만 일단 조금만 잘게요.”
재윤은 루니스를 보는 순간 마지막으로 지탱하던 의지의 끈이 무너지는 듯 더 이상 수면욕을 버티기 힘들었다.
바닥에 그냥 그대로 누워 잠을 자려고 하는 그를 루니스가 말리며 말했다.
“잠시만요. 기왕 잠을 자려면 푹 자는 게 좋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무리 루니스가 있다고 해도 잠을 푹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잠을 자면 꿈속에서 정신 공격이 시작될 테니까.
다만 그 정신 공격에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루니스가 적절히 깨워준다.
그 와중에 몸은 어느 정도 수면을 취하게 되고.
그렇게만 해도 재윤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지금처럼 죽을 지경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푹 자라는 말을 하니 뭔가 이상했다.
루니스가 미소 지었다.
“마왕의 마력구를 파괴하는 거죠.”
“그건 지금은 불가능해요. 아직 저의 레벨이 69라서. 마지막 한 단계 남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전에 마왕의 마력구를 파괴해본 경험도 있고."
루니스가 마왕의 마력구를 파괴해본 적이 있다고?
하긴 용사라면 그런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사 루니스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정말로 마력구를 파괴할 수 있습니까?”
"무리를 해서라도 일단 해보려고요. 당신이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걸 더는 못보겠어요.”
루니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재윤은 왠지 마음이 뭉클했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 마력구를 꺼내 제게 주세요.”
그 순간 재윤은 자신도 모르게 아공간에서 마왕 데사오의 마력구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줄 뻔했다.
그런데 무언지 모를 마음이 그것을 막았다.
그가 그렇게 망설이자 루니스가 물었다.
“왜 마력구를 주지 않죠? 설마 저를 믿지 못하시나요?”
“그게 아니라……"
루니스가 서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재윤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내주면 되는데 왜 망설이는지 그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그는 돌연 루니스를 차갑게 노려봤다.
“너는 누구지?”
“왜 갑자기 그러시죠?”
루니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재윤이 졸음을 참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는 루니스가 아니야.”
그렇다.
재윤이 알고 있는 루니스라면 그에게 마력구를 내달라고 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직접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따라서 그녀는 재윤이 마왕의 마력구를 파괴하도록 옆에서 지원하는 역할만 하겠다고 했다.
피 그림자의 재앙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마력구를 파괴하겠다며 그것을 달라고 말하니 당연히 이상한 일.
“큭! 하마터면 속을 뻔했군. 젠장! 여긴 그럼 꿈인가?”
손에서 제마검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그것을 꺼낼 수도 없었다.
오직 하나 마왕 데사오의 마력구만 그의 의지에 의해 꺼낼 수 있는 상태.
이건 절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하!"
순간 루니스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녀는 재윤의 팔을 부축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그에게 더욱 밀착했다.
“왜 저를 믿지 못하죠?”
본래라면 팔에 은빛 갑옷의 딱딱한 금속 재질이 느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성의 가슴이 주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루니스의 입술 사이로 뿜어져나오는 따사로운 숨결이 오른쪽 뺨과 귀를 간질였다.
‘으으! 이건?’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마족 드로시아가 루니스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재윤이 정체를 의심하자 그녀는 곧바로 마각을 드러냈다.
“저리 꺼져!”
재윤은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무지 팔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팔뿐만 아니라 온몸에 힘이 없었다
어느새 팔에 밀착되어 있던 루니스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요염한 마족 드로시아가 서 있었다.
“후후, 거부할 수 없다, 인간. 넌 완전히 잠들었지. 누구도 널 깨워주지 못한다.”
그녀의 음성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하긴 꿈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재윤은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 마. 나는 절대로 너 따위에게 굴복 안 한다.”
이렇게 굴복할 거였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진작 때려치웠을 것이다.
‘눈을 떠라. 잠에서 깨어나.’
재윤은 초절한 의지로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몸은 무력하게만 변했다.
특히나 드로시아의 도발적 유혹 앞에 실처럼 가느다랗게 남아있던 그의 마지막 정신 줄도 끊어져나가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끊어지는 듯했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바로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먹잇감을 거미줄에 칭칭 감은 후 막 피를 뽑아먹으려는 거미의 눈빛으로 재윤을 쳐다보며 의기양양하던 마족 드로시아가 무엇때문인지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한 것이다.
“으! 이건 말도 안돼! 저 따위 것들이 어찌 내게!”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뭔가를 버티려 기를 쓰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그대로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
재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건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도 졸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윤은 정말 오래만에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있었다.
마족의 유혹이 없는 편안한 상태로 짧지만 아주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됐다.
더 이상 수면부족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만큼.
“당신은?”
그때 재윤은 땅바닥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그가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익은 얼굴의 흑인 여성이었다.
얼마 전 마인의 숲에서 각성자들을 이끌고 운명의 탑을 찾았던 메인 탱커 티나.
그녀가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깨어나셨군요.”
티나는 상당히 힘겨워하는 표정이었는데 재윤을 보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녀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 뒤에서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있는 남자.
그는 다름아닌 박영철이었다.
그리고 박영철의 등을 또 다른 각성자가 손을 대고, 그런식으로 각성자들이 길게 줄을 이어 앞 사람의 등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그 줄은 안전지대 보호막 안쪽으로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재윤은 일어나 그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티나가 재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동안 당신이 혼자서 마인들과 싸우는 걸 우리 모두가 지켜봤어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해 미안했는데 이렇게라도 도울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녀에 이어 박영철이 입을 열었다.
“강재윤 씨!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변변치 않은 능력을 가진 우리들이지만 당신의 뒤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또한 무척이나 힘겨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씩씩하게 웃고 있었다.
그에 이어 재윤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각국의 각성자들이 그를 향해 한없는 존경과 호의의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강재윤! 당신이 우릴 지켜줬으니 우리도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잠들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어요.”
“멋진 한국인!”
“당신은 영웅이에요!”
각성자들의 뒤에는 비각성자들도 줄을 지어 있었다.
수천 명이 넘는 도시 샤인의 거주자들이 모두 앞사람의 등에 손을 댄 채 줄을 지어 있었고, 그들의 끝에 관리자 에이미가 서 있었다.
대략 1시간 전.
재윤이 졸린 눈을 부릅뜨며 안전지대 보호막 바깥으로 나가는 모습을 티나를 비롯한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들은 재윤이 매우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은 아무것도 도울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재윤이 잠시 걷다가 푹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이에 놀란 티나가 달려가 재윤을 흔들어 깨웠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공포가 밀려와 티나는 비명을 지르며 안전지대 안으로 도망쳐왔다.
그 사이 박영철이 그 사실을 관리자 에이미에게 말했고, 에이미는 관리자 알림을 통해 도시 전체에 있는 거주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도시를 위해 외롭게 마인들과 싸워온 각성자 강재윤 님이 위기에 빠졌어요. 사악한 마족의 정신 공격에 당한 그를 구해주려면 여러분 모두의 힘이 필요합니다.]
에이미는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재윤을 깨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그녀 역시 공격을 당해 쓰러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럴 경우 안전지대가 흩어져 버리며 도시는 대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모으면 마족의 정신 공격을 막을 수 있다 확신했다.
물론 그것은 모험이었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가능할지 걱정이 되긴 했다.
하나의 국가가 아닌 백수십 개 국가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간 도시 내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간의 알력 다툼을 하는 일들이 많았기에 더더욱 쉽지 않게 여겨졌다.
그러나 에이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재윤은 지난 10여 일 동안 매일 도시 샤인의 악몽과 맞서 싸웠다.
모두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마인들을 수없이 해치웠다.
그런 재윤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괴상하게 변한 세상에서 악마들을 오히려 사냥감으로 여길만큼 강한 존재.
재윤은 모두의 마음 속에 이미 영웅으로 자리잡은 터였다.
“저 영웅을 도웁시다!”
“우리 비각성자들도 돕겠습니다.”
“마음을 모으는 일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어요!”
처음엔 각성자들로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비각성자들이 의지를 불태우고 나서자 에이미는 기꺼이 그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 나섰다.
그와 함께 재윤에게 향하던 마족의 정신 공격이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일순간 엄청난 공포심이 밀려와 가장 선두에 있던 티나가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녀의 등으로 상상을 초월한 기운이 밀려들어왔다.
그 기운은 바로 하나로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마치 강물처럼 밀려오는 그 강력한 기운 앞에 마족은 맥을 못추고 사라졌다.
그러나 마족과의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재윤이 잠에서 깨어나는 1시간 동안 마족의 공격은 계속되었다가 사라짐을 반복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꿋꿋이 버텼다.
재윤이 느끼는 고통을 수천 명이 분담한 덕분이었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
그리고 재윤이 눈을 뜨는 순간 그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재윤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용사 루니스도 하지 못한 일을 저들이 해냈다.
각성자들 뿐 아니라 비각성자들까지 힘을 합쳐 말이다.
* * *
잠시 후 재윤은 거대 거미굴을 찾아나섰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돼. 최대한 빨리 레벨을 올린다.’
뜻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간 재윤은 그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그만큼 스스로의 일에 몰두해 있었으니까.
오직 잠을 참고 레벨을 올려 마력구를 파괴한다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터라 도시 샤인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모두들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마음을 모아주었다.
덕분에 그의 컨디션은 최상.
한번 충분히 잔 이상 최소 며칠은 수면부족으로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사이 어떻게든 레벨을 올려야 한다.
‘후! 그런데 개미들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거대 개미들의 경험치도 적을 뿐 아니라 그동안 계속 잡았더니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개미굴에 온지 두 시간이 지나도록 고작 몇 십 마리를 해치운 게 다였다.
‘어딘가 보스 급 괴물이 있을 텐데.’
거대 여왕개미 말이다.
일반 거대 개미들을 그토록 해치웠으면 슬슬 나타날 법도 한데 지금껏 거대 여왕개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작정하고 한 번 찾아보자.’
그렇게 미로처럼 복잡한 개미굴을 한참동안 쏘다니며 눈에 띄는 녀석들은 모조리 해치웠다.
그러다 돌연 한 장소를 발견했다.
꾸불꾸불 이어졌던 굴이 아닌 거대한 광장 같은 곳이었는데, 그 안에 눈을 감고 있는 거대한 뭔가가 보인 것이다.
‘저건?’
보통의 거대 개미의 길이가 대략 2미터 정도의 크기라면, 지금 보이는 건 그 10배가 넘었다.
대략 20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개미.
그것은 재윤이 나타나자 섬뜩한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여왕 개미?’
재윤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보스 급 괴물을 찾은 것이다.
그때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거대 병정개미들이 우르르 몰려와 재윤을 포위했다.
동시에 여왕개미가 거대한 몸체를 움직여 돌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