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아루넬의 부탁 (2) >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긴 했지만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어요.”
아루넬의 말이었다.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 죽인 마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대체 그들은 누굽니까? 각성자들이 아닌가요?”
“쉽게 말하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죠. 악마의 힘을 이용해 강해지는 자들이에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강해진다?
“그럼 마족화된 인간들과 비슷한 자들이군요.”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죠. 하지만 마족화된 인간들의 경우 자신도 모르게 마족의 하수인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반면, 마인들은 달라요. 그들은 그 스스로 악마에게 직접 영혼을 팔아야 될 수 있어요.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악마를 위해 모든 걸 마치겠다는 맹약을 하게 되면 그들은 마인 즉, 마기 각성자가 됩니다.”
“마기 각성자?”
“마인들은 파투스 대신 악마의 힘인 마기(魔氣)라는 것을 이용해 전투 능력을 펼치게 되죠. 무엇보다 무서운 일은 비각성자들이라고 해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바로 각성자가 될 수 있어요.”
아루넬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마기를 얻게 됨과 동시에 파투스 각성자들처럼 적을 처치하면 레벨을 올려 강해질 수 있어요. 이미 각성자인 이들은 파투스 대신 마기를 쓸 수 있게 되며 더욱 자유롭게 전투 능력을 펼칠 수 있죠.”
재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각성자들도 악마에게 맹약을 하면 바로 각성자가 될 수 있다니.
그것이 얼마나 유혹적인 일인지 모를 것이다.
“괴물에게 잡아먹히느니 차라리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각성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영혼을 파는 맹약의 조건에는 매우 극악한 행위가 포함되어 있어요. 따라서 절대 그들을 동정해서는 안 됩니다.”
“극악한 행위?”
“이를 테면 다른 사람의 목을 베어서 그 머리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식이죠. 이보다 더한 것들도 많아요.”
아루넬은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재윤도 한숨이 나왔다.
“악마들은 그렇게 운명의 룰까지 깨가며 마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들과 대항하는 존재들은 왜 잠자코 있는 지 모르겠군요.”
“악마들이 운명의 룰을 깬 건 아니에요. 운명의 룰을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죠.”
“그럼 마인들을 만드는 게 운명의 룰 안에 있다는 건가요?”
“인간들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스스로 악마가 되겠다고 하는 자들을 막을 방법은 없어요.”
재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마인들이 왜 생겨났는 지는 이해했습니다. 그보다 이제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단순히 마인들이 뭔지 설명해주려고 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건 당신 외에는 이곳의 재앙을 파괴할 자가 없기 때문이죠.”
또 재앙인가?
왠지 재앙과 관계된 일일 거라 짐작했기에 재윤은 놀라지 않았다.
“마인들을 처치하면 되는 건가요?”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마인들은 그냥은 죽지 않아요. 마인의 숲 중심에 위치한 마궁에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이라고요?”
“네. 악마의 힘을 이용해 본래 상태로 다시 살아나죠. 따라서 당신은 마궁 안에 들어가 악마의 힘이 깃들어 있는 재앙을 파괴해야 합니다.”
재윤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놈들이 몇 번 죽어봤던 사람의 표정을 지은 거였군.’
죽어도 마치 게임에서처럼 다시 부활하니, 그들에게는 이 현실 자체가 게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파투스 각성자들은 다른 각성자들을 죽인다고 경험치가 오르지 않죠. 반면에 마인들은 다른 각성자들은 물론 평범한 인간들을 죽여도 경험치를 올릴 수 있어요. 성장도 무척 빠르고요. 이곳의 재앙을 파괴하는 것이 늦어질수록 나중에는 더욱 마인들을 상대하기 어렵게 됩니다.”
재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보다 저는 지금 파투스 전투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로 그놈들을 상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자 아루넬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아루넬도 재윤이 왜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흑룡 데카투스를 공격한 후 갑자기 이 지역으로 날려왔습니다.”
재윤이 간략한 과정을 설명하자 아루넬은 다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용을 공격했다고요?”
“용사 루니스가 도와줘서 가능했죠.”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당신의 능력으로 용을 공격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것도 용이 당신에게 저주를 내린 걸 보면 아주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던 것이 분명해요.”
재윤은 놀랐다.
“그럼 이게 지금 흑룡의 저주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요?”
“네, 틀림없어요.”
“저주를 푸는 방법은 없나요?”
“제룡의 기운을 얻으면 가능해요.”
“그게 뭐죠?”
“잠시만요. 조금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세요.”
아루넬은 뭔가 분개한 표정을 짓더니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재윤이 용에게 저주를 받은 것이 그녀를 분노케 한 듯했다.
그녀는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한 손에 신비한 은빛으로 반짝이는 검을 쥐고 있었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그런데 그 검은 뭐죠?”
검사인 재윤에게는 당연히 아루넬이 쥐고 있는 검에 대해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루넬이 미소 지었다.
“그 저주로 잠시의 고통은 있겠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에요.”
“그게 무슨 말입 니까?”
“일단은 이 검부터 받으세요.”
아루넬은 은빛 검신의 검을 재윤에게 건넸다.
[제마검(신화)을 얻었습니다.]
‘신화 등급의 검?’
검신에서 나오는 빛이 심상치 않다고 했더니 신화 등급의 검이었다니.
* 제마검(制魔劍)(Lv1)
-등급 : 신화(★★)
-분류 : 파투스 무기
-설명 : 악마에게 강한 타격을 주는 제마의 힘이 깃들어져 있다. 악마를 많이 처치할수록 제마의 힘은 더욱 강력해진다.
-내구도 : 1200/1200 [ 아공간 보관 시 자동 복구 ]
-기본 공격력 100
-추가 공격력 : <모든 스탯>의 100%
-마왕, 마족, 마물, 마인, 마족화된 각성자 등 악마 계열의 적을 처치할 경우 제마의 기운을 얻으며, 기운이 일정량 이상 쌓이면 무기의 능력이 상승함.
-장착 제한 : 명성 Lv8, 마인을 처치한 자
그런데 말이 신화 등급이지 무기의 공격력이 현재 재윤이 주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암흑검의 절반도 안 되었다.
이전에 쓰던 광혈검과 비슷한 수준.
“처음엔 위력이 좀 약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마인들을 처치하다보면 제마검이 성장하며 능력도 상승하게 됩니다.”
“마인들은 다시 부활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럼 마인들을 처치하지 못한 것이니 제마검의 성장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재윤의 생각이었다.
그러자 아루넬이 미소 지었다.
“마인들이 나중에 되살아나는 것일 뿐 일단은 죽는 건 맞아요. 제마검으로 그들을 쓰러뜨리는 순간 제마의 힘은 쌓여요. 당신 또한 경험치를 얻게되죠.”
“그렇군요.”
“사실 그 검은 당신이 운명의 힘에 의해 이곳에 도달했을 때 이미 당신을 위해 안배된 무기였습니다. 당신의 명성이 Lv8에 이르렀을뿐 아니라, 마인을 처치할 만한 용맹이 있음이 증명되었으니까요.”
제마검은 각성자로서의 레벨이 아니라 성주로서의 명성 레벨이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쓸 수 있다.
재윤의 현재 명성 레벨은 8이라 딱 그에 해당되었다.
“감사합니다. 이 무기가 있으면 큰 힘이 될 겁니다.”
재윤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당장은 검의 위력이 약해서 답답하겠지만, 마인들을 많이 처치해 검의 레벨을 높여나가면 암흑검보다 훨씬 강력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혹시 저주를 푸는 방법은 못 찾았나요?”
“당신이 이번 재앙을 해결하면 그 보상으로 제룡검을 얻게 될 거예요.”
“제룡검?”
“제룡검은 용이나 신수와 같은 특별한 존재들에게 강한 타격을 줄 수 있어요. 그 또한 성장형 무기이며, 제룡검을 쥐는 순간 당신은 용의 저주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요.”
“그럼 지금 당장은 저주를 풀 수 없다는 뜻이군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재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주를 풀고 싶으면 죽기살기로 이번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도 그 임무만 완수하면 제룡검이라는 또 다른 신화 무기를 얻을 수 있다니 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본래는 제룡검을 보상으로 주는 건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하지만 흑룡이 빌미를 제공함으로 당신에게 특별한 행운이 주어진 것이죠. 이는 운명의 룰에 위배되지 않거든요.”
아루넬의 눈이 빛났다.
“이번 일이 매우 어려울 것이란 걸 알아요. 전투 능력을 펼치지 못하면 당신에게 그만큼 불리하겠죠. 하지만 전쟁신의 검술이 가진 진정한 능력을 발휘할 기회라고 여기세요.”
“전쟁신의 검술의 진정한 능력?”
“자세한 건 저도 알지 못해요. 고대 전쟁신께서 그렇게 제게 알려주셨답니다.”
아루넬과의 대화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재윤은 곧바로 운명의 탑 밖으로 나왔다.
* * *
숲의 중심에 마궁(魔宮)이 있고 그 안에 재앙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마계의 마궁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명색이 마궁이니 제법 강력한 녀석들도 존재할 것이다.
‘일단은 마인들을 처치하며 제마검의 위력부터 올리자.’
뜻밖의 임무가 주어졌지만 재윤의 심정은 담담했다.
어차피 빨리 70레벨을 빨리 달성해야하는 상황이니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제마검을 이용하면 좀 더 빠른 사냥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
‘당장은 검의 위력이 약하니 처음엔 좀 고생하겠지만.’
재윤은 은빛의 제마검을 오른 손으로 꽉 쥐었다.
그 순간.
[제마검을 장착한 당신은 악마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제마검이 가진 또 하나의 기능.
그것은 제마검을 쥔 순간 누군가 정체를 숨겨도 그가 악마 계열의 존재인지 아닌 지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좋아! 이제 당분간 이 검만 사용한다.’
암흑검은 아공간에 잘 보관해놓았다.
적어도 이곳 마인의 숲에서는 제마검만 사용하는 것이 현명하니까.
타타타타-!
그런데 재윤이 운명의 탑을 둘러싼 안개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어디선가 총격이 날아왔다.
재윤은 재빨리 몸을 날려 피했다.
눈으로 총알을 보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알아서 반응해 피하는 것이었다.
‘저쪽이군.’
질풍 이동이나 바람 이동이 있었으면 순식간에 적에게 접근했겠지만 지금은 직접 뛰어가야 한다.
그러나 재윤의 움직임은 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나는 듯 민첩했다.
“크아아악!”
“아아악!”
소총을 갈겨대던 두 명의 남자가 제마검에 목이 날아간 건 순식간이었다.
[ 제마검에 제마의 힘이 쌓입니다. ]
마인들을 처치하자 이같은 알림이 들려왔다.
이 힘이 일정 이상 쌓이게 되면 제마검의 레벨이 오를 것이다.
스슷!
스스슷!
그때 재윤의 주위를 수십 명의 사람들이 포위했다.
모두의 몸에서 피어나는 시커먼 기운을 통해 재윤은 그들이 마인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놈을 죽여라!”
“없애버려!”
마인 중 하나가 검을 휘두르자 검기가 날아들었다.
지팡이를 쥔 마인이 주문을 외우자 시퍼런 뇌전이 쏟아져나왔다.
그에 이어 차가운 인상의 여자 마인이 쏜 활에서 화살들이 무더기로 날아왔다.
파아앗! 파지지직! 슈슈슉-
검기를 피해내는 순간 뇌전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윽!'
제법 화끈한 통증이 일어나긴 했지만 생명력이 많이 하락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날아드는 화살을 제마검으로 쳐내며 재윤은 자신에게 뇌전 마법를 날린 마인의 가슴을 베어버렸다.
촤악!
“아아악!”
놈이 쓰러짐과 동시에 재윤은 그대로 돌진해 활을 쏜 마인의 가슴을 어깨로 밀어쳤다.
퍼억!
“아아악!”
어깨로 슬쩍 쳤을 뿐인데 마인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지더니 그대로 즉사했다.
근력 스탯 60이 주는 괴력 때문이었다.
이렇게 죽여도 제마검을 손에 쥐고 있으면 제마의 힘은 쌓였다.
카캉! 서걱!
이어서 재윤의 검이 마인 검사의 검을 빗겨내며 놈의 목을 날려버렸다.
촤각! 촤가가각!
그가 몸을 회전하며 검을 휘두른 순간 그를 향해 접근한 두 명의 마인들이 몸이 동강난 채 널브러졌다.
“으아악!”
“크아아악!”
마인들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50레벨 이상 마기 각성자 6개 파티가 몰려와 재윤을 공격했는데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피해라!”
“지원군과 함께 다시 오자!”
마인들이 아무리 부활할 수 있다지만 죽음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능하면 죽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재윤에 의해 10여 명의 마인들이 죽임을 당하자 나머지 마인들이 기겁하며 도주했다.
“어딜 도망가는 거냐?”
재윤은 돌진하며 그중 한 마인의 등을 어깨로 밀어쳤다.
쾅!
“크아악!”
마인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날려가더니 그대로 즉사했다.
우람한 덩치의 남자로 검과 방패로 무장한 걸 보면 탱커였던 것 같은데 어깨치기 한 방에 죽을 줄이야.
‘이 기술은 거의 안쓰던 건데 생각보다 강하네.’
파투스 전투 능력이 아니라 전쟁신의 검술(Lv64)에 있는 기술 중 하나일 뿐이다.
“으득! 죽어라!”
투타타타!
그때 도주하던 마인 하나가 뒤돌아 재윤을 향해 총을 갈겼다.
재윤은 옆으로 미끄러지듯 슥 피한 후 놈을 향해 검을 던졌다.
제마검이 그대로 날아가 놈의 몸에 박혔다.
푸확!
“크아아악!”
그런데 검이 마인의 몸에 박힌 그 순간 재윤은 이미 그 위치에 도달해 검을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아아악!”
“크악!”
그 주변에 있던 두 명의 마인들이 가슴에서 피를 뿜은 채 쓰러졌다.
검을 던짐과 동시에 그 뒤를 바람처럼 따라가 그 검을 휘두르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술.
그동안에는 그냥 바람의 화살(Lv10)을 날리고 말지 이런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쓸 생각도 하지 않았던 갖가지 전쟁신의 검술에 속한 기술들이 전투 능력이 제한되자 자연스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악!”
재윤은 도주하는 마인들을 쫓아가며 놈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그렇게 수십 명의 마인들을 처치하자.
[제마검에 쌓인 제마의 힘이 한계를 돌파합니다.]
[제마검이 Lv2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