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10층 던전의 최종 보스 (1) >
뜻밖에도 앞에 나타난 이는 이윤지였다.
마족화되어 신장이 무려 3미터는 되었다.
머리에는 두 개의 검은 뿔이 자라나고 붉은 비늘 같은 것이 사슬갑옷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백색의 피부와 붉은 비늘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다 하체가 배주은처럼 뱀의 형상 같은 것은 아니어서 그나마 덜 괴물처럼 보이긴 했다.
그런데 그녀는 피투성이였다.
멀리서는 붉은 비늘과 뒤섞여 그냥 비늘의 한 부분인가 했는데, 조금씩 가까워지자 몸 도처에 상당한 부상을 입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 걸렸다.’
이윤지를 보며 재윤은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10층 던전에 도전한 지 4일 째가 되는 오늘 드디어 마족화된 각성자를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죽을 각오는 되어있겠지.”
재윤은 싸늘히 외치며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이윤지가 다급히 외쳤다.
“잠깐! 제발 잠깐만요! 공격하지 말아주세요.”
이윤지는 손에 무기도 없었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흘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하자는 건지 모르지만 나에게 허튼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재윤은 그녀의 목에 암흑검을 가져다댔다.
목에서 차갑고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자 이윤지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다급히 말했다.
“저를 나쁘게 보실 수밖에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재윤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그도 뭔가 이상해서 공격을 망설이긴 했다.
오늘도 시간을 끌려면 이윤지가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만약 모습을 드러낼 거라면 한꺼번에 나타나 공격을 해야했을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이윤지 하나를 보낸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
재윤이 검으로 한두 번만 베면 죽을 것처럼 엉망인 상태였으니까.
“말해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여긴 미로처럼 되어 있지만 정해진 길 이외에는 다 허상이에요. 한 번이라도 길이 어긋나면 절대 던전의 끝에 도달할 수 없어요.”
“미로가 허상이라고?”
“길을 알고 있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걸 내게 말해주는 이유는?”
그러자 이윤지가 곧바로 대답했다.
“저는 최재형에게 속아 괴상한 약을 먹고 마족의 권속이 되었어요. 이대로 죽으면 최하급 마물로 환생하고, 설령 산다고 해도 마계로 가서 악마들의 하수인이 되어 살아야 하죠.”
재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최재형과 같은 존재에게 붙어 안위를 도모한 그녀의 선택이 초래한 비극적인 운명인 것이다.
“악마의 하수인이 되든 슬라임이나 거대 바퀴벌레 같은 끔찍한 마물이 되어 마계의 바닥을 기어 다니든, 그 둘 중 하나가 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어요.”
이윤지는 서러운지 손등을 들어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은 곧 지금이 제가 인간으로서의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결심했어요. 마지막으로 인간다운 선택을 하고 죽자고요.”
“인간다운 선택?”
“저를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이제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그저 인간으로서의 기억이 유지되는 마지막 순간에 사람다운 일을 하고 죽자는 것뿐이죠.”
그녀는 비장한 눈빛으로 재윤을 쳐다봤다.
“그래서 당신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최재형이 있는 곳에서 이곳으로 도망쳐왔습니다.”
“당신 혼자서 그곳을 빠져나왔다고?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조영훈이 도와줬어요. 그 사람도 저와 생각이 같았거든요. 둘 다 도망칠 수는 없으니 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가야한다며, 제가 도망치도록 그가 시간을 벌어줬어요. 아마 지금쯤 조영훈은 죽었을 거예요.”
그 말을 하며 이윤지는 다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재윤은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마족화된 괴물이 되어 이곳 던전 10층의 보스 중 하나인 것이다.
던전의 보스가 최종 보스를 배신하고 지금 재윤을 돕겠다고 하는 거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강재윤 씨! 믿기지 않겠지만 저는 진심입니다. 부탁이니 최재형 그놈을 꼭 죽여주세요. 저만 벌레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놈이 벌레가 되어 기어 다니는 꼴을 봐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아요.”
최재형에게 당한 게 많은지 그에 대해 말하는 이윤지의 눈빛에는 복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결국 최재형 그놈에게 복수하고 싶어 날 돕겠다는 거였군.”
“솔직히 그래요. 하지만 방금 전에 한 말도 진심이에요. 이 도시에 있는 만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잖아요.”
재윤은 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진심을 느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겠다는 의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녀에게 돌아가는 것은 결국 비참한 최하급 마물로서의 환생일 뿐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인간다운 선택을 하며 자기위안이라도 삼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안타까웠다.
어쨌든 결국 그는 그녀를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던전을 깰 수 없다.
모든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초기화되어버릴 테니까.
“이윤지 씨! 당신 말대로 만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저를 도와줘도 저는 결국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재윤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적어도 지금의 이윤지는 마족이나 마물이 아닌 인간 이윤지였기 때문이다.
이윤지가 울먹이며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할 수 없죠. 제가 다 자초한 일이니까요.”
“일단 이거라도 써서 조금 회복해요.”
재윤은 아공간에서 생명력 물약을 몇 병 꺼내 내밀었다.
잠시 후에는 죽여야겠지만 적어도 인간의 따뜻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이 정도 호의를 베푸는 건 아깝지 않았다.
“고마워요.”
이윤지는 감동한 듯했지만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쉽네요. 제가 진작 당신을 알았으면 최재형같은 놈과 어울리지 않았을 텐데요.”
“오늘의 도움으로 당신의 지난 과오는 잊겠습니다. 영원히 좋은 기억으로 간직할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겠다는 재윤의 그 말이 위안이 되는지 이윤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다 그녀는 곧바로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보다 잠시 후면 오재구와 이승준이 나타날 거예요.”
“그놈들이 당신을 쫓아오고 있었나보군요.”
“네, 둘 다 마족화가 되며 무섭게 강해졌으니 조심하세요.”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재윤을 향해 손을 펼치고는 말했다.
“버프를 걸어줄게요. 마족화가 되며 버프의 능력이 강력해졌지만, 지금 상태로도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곧바로 재윤에게 알림이 울렸다.
[마족화된 각성자 이윤지가 당신에게 암흑의 가호를 펼쳤습니다.]
[적합하지 않은 기운의 가호가 당신의 몸을 엄습해 저주가 내립니다.]
[암흑의 저주가 당신의 생명력을 하락시킵니다.]
[보호막 내구도가 348포인트 감소했습니다.]
재윤은 오히려 버프가 아닌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자 이윤지가 당황하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해요.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알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버프를 주고 싶은데 오히려 저주를 줄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
이윤지의 표정은 미안함을 떠나 슬퍼보였다.
그런데 재윤은 그 순간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괜찮으니 그 버프를 계속 걸어주세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일단 어서.”
재윤은 이곳으로 강력한 기운을 가진 존재들이 오고 있는 걸 느꼈기에 다급히 말했다.
이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재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생각해 즉각 버프를 걸었다.
물론 인간에게는 저주로 작용하는 버프.
[보호막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보호막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
[보호막이 파괴되었습니다.]
결국 데미지가 누적되어 광혈의 막이 파괴되었다.
동시에 재윤의 생명력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재윤의 몸 도처에 상처가 생겨나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윤지가 놀라 물었다.
“이제 그만할까요?”
“몇 번 더 부탁합니다.”
“네, 조심하세요.”
그러자 다시 이윤지가 버프 즉, 저주를 걸었고 재윤의 생명력은 계속 하락해 절반 정도까지 내려왔다.
“이제 그만! 됐습니다.”
고통에 전신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재윤은 담담히 견뎠다.
‘이 상태로 싸운다.’
생명력이 하락할수록 강해지는 전쟁신의 투혼이 발동되도록 일부러 생명력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을 때는 전쟁신의 투혼이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
오직 적의 공격에 당했을 때만 공격력 증가 효과가 생겨난다.
‘다행히 된다.’
이윤지는 아군이 아니라 적이니 그녀의 공격은 전쟁신의 투혼을 발동시켰다.
전신에서 치 떨리는 고통이 느껴짐과 동시에 보이는 뭐든 다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 투혼이 솟아났으니까.
그러나 이 상태에서 생명력이 더 하락하면 위험해진다.
‘광혈의 막!’
즉시 보호막을 둘러놓았다.
바로 그때.
이윤지의 말대로 이승준과 오재구가 나타났다.
마족화가 되어 이승준은 4미터 거인이 되었고, 오재구는 몸체의 길이가 10미터는 되는 반인반사(半人半能)의 괴물로 변했다.
그들은 이윤지가 재윤과 함께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이윤지! 너 제 정신이야?”
“완전히 미쳤구나.”
이윤지가 그들을 노려봤다.
“미친 건 너희들이야, 이 악마 새끼들아!”
“크흐! 그럼 내가 왜 악마인지 보여주마.”
오재구가 이윤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재윤이 오재구를 향해 검기파(Lv3)를 날렸다.
‘먼저 저놈부터!’
마족화된 윤일호와 배주은을 상대해봤던 터라 재윤은 처음부터 사정을 봐주지 않고 오재구를 공격했다.
“크으윽!"
그냥 검기파였다면 별로 타격을 주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재윤은 전쟁신의 투혼으로 공격력이 대폭 증가한 상태다.
검기파의 위력도 급증한 터라 단 한 방에 오재구가 뒤로 날 듯 나가떨어졌다.
곧바로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래라면 그는 자신이 재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족화가 된 지금은 달랐다.
인간일 때와는 상상도 할 수 없게 강해진 상태인 것이다.
특히 그의 신체는 웬만한 공격으로는 피부에 흠집도 나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그런 그의 복부를 길게 가르며 자상이 생겨났는데, 출혈이 그치지 않고 심지어 중독 증상도 느껴졌다.
“믿을 수 없다. 단순한 각성자 따위가 어떻게 이런 능력을!”
그런 그를 향해 질풍의 화살(Lv2)과 바람의 화살(Lv10)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런 필살기들은 연이어 재윤이 근접해 펼치는 검술 공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윽! 너무 빠르다.’
마족화되어 강화된 민첩성으로도 번개처럼 날아드는 암흑검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암흑검이 번쩍일 때마다 오재구의 신체에서 피가 튀었다.
푹! 푸확! 촤아아악!
무기를 쥐고 있던 두 손이 잘려나가고 십자형상으로 길게 베여진 복부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커어어억!”
그렇게 오재구가 일방적으로 밀리자 이승준이 즉각 지원을 나섰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오재구의 거대한 몸체가 반쯤 허물어진 상태였다.
“죽어라, 이 괴물 같은 놈!”
아무리 마족화가 되어 강해졌지만 이승준에게 있어서는 재윤이야말로 진짜 괴물이었다.
쒸이잉!
뒤쪽에서 도끼가 수직으로 날아들었지만 재윤은 가볍게 몸을 이동해 그것을 피해냈다.
동시에 암흑검의 사선이 피어나며 이승준의 하체가 잘려나갔다.
뱀형상의 하체 중 3미터 정도가 단번에 떨어져나간 것이다.
촤촥! 푹! 서걱!
그것은 일방적이었다.
전생신의 투혼이 발휘하는 가공스러운 공격력 앞에서는 마족화된 신체도 도마 위의 생선에 불과했다.
“쿠아아아악!”
“크아아악!”
그렇게 오재구와 이승준은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동시에 그들의 몸은 짙은 흑색의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전쟁신의 검술이 Lv58이 되었습니다.]
[마족화된 각성자에 대한 C급 지식을 얻었습니다.]
대량의 코인과 함께 레벨 상승!
그리고 지식 등급 상승했다.
이로써 마족화된 각성자들의 약점 파악이 가능해진 것이다.
“아!”
뒤에서 지켜보던 이윤지가 탄식하며 몸을 살짝 떨었다.
자신을 도끼로 찍어 죽였던 이승준이 죽은 것에 약간 통쾌하기도 했지만, 그녀 역시 잠시 후면 저 꼴이 되어 사라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에 대해서는 체념한 상태였다.
“이제 저를 따라오세요. 최재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그 사이 그녀는 재윤이 준 생명력 물약을 연거푸 마셔 몸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녀가 펼친 버프가 재윤에게는 저주로 작용했지만, 재윤이 건넨 생명력 물약은 별다른 부작용 없이 치료 효과를 발휘했다.
마족화된 신체의 불가사의한 회복력은 생명력 물약의 기운을 증폭시켜 빠른 회복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혹시 재앙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까?”
“그건 최재형이 지키고 있어요.”
이윤지는 석상의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 말해줬다.
“그리고 최재형을 죽이지 않으면 그 석상은 무슨 수를 써도 부서지지 않아요. 또한 최재형은 석상 근처에서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 그곳을 떠날 수 없죠.”
재앙부터 파괴할 수는 없고 그 전에 최재형부터 죽여야 한다는 뜻.
이윤지 덕분에 미리 그런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