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초승달의 주인 (2) >
도시 초승달의 관리자 이예은의 신비한 능력으로 각성자들이 힘을 모아 구름 폭풍 재앙에 대항한 지 어느덧 3일 째.
재윤이 9층 던전을 돌파했을 때, 밖의 각성자들 또한 많이 지쳐 있었다.
각각의 위치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지속적으로 데미지가 들어왔다.
힐러들이 치료를 해준다 해도 고통은 참고 견뎌야 했다.
특히 힐러들은 파투스의 한계가 있어 각성자들의 생명력이 떨어지는 초기에 치료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생명력이 절반 이상 하락했을 때야 비로소 치유의 빛을 펼쳐 회복시켜주는 식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파투스가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이 도시의 특성 상 각성자들 대부분은 탱커 뒤에 숨어서 전투 능력만 펼쳤을 뿐, 괴물에게 맞아 생명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해본 이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데미지가 들어와 생명력이 하락하는 고통을 견디는 건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
그냥 고통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피부가 따끔거리다 못해 찢어지는 듯 한 고통.
뼈가 쑤시다 못해 부러지는 듯 한 고통.
불로 피부를 지지거나 칼로 쿡쿡 살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
심지어 마음에 계속 불안감과 공포심을 주는 정신 공격까지.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탱커나 부탱커급 전사들이야 별거 아니라는 듯 인상만 찌푸리며 버티지만 고통에 약한 각성자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건 다반사였다.
“흐흑! 못 견디겠어요. 어서 치료 좀 부탁해요.”
“조금만 더 참아요.”
각성자들 숫자에 비해 힐러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보니, 힐러들은 거의 쉬지 못했다.
파투스가 떨어질 때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던전 입구로 뛰어가 잠시 새우잠을 자거나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한 번에 다수의 힐러가 자리를 비우면 각성자들이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파투스가 떨어지면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그런 때를 대비해 재윤은 아공간에 잔뜩 쌓인 최하급과 하급 파투스 물약을 모두 내놓았다.
한 위치를 3명의 각성자가 한 개 조를 이루어 교대로 지키는 식인데,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 곳은 재윤이 가서 버텨주며 잠시 그들이 휴식을 취하게 해주기도 했다.
각성자들이 만류했지만 재윤은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지난 3일 동안 던전은 거저먹는 수준이었고, 설령 험난했다 해도 그는 막강한 체력 스탯으로 인해 1시간 휴식이면 최상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장예찬의 말대로 이것은 전쟁이었다.
버티지 않으면 자신 뿐 아니라 모두가 죽는다.
자연스레 각성자들은 사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족과 함께 이 도시에 거주하는 각성자들은 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라도 버텼다.
그렇게 각성자들이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재앙을 막아내고 있는 모습을 비각성자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세상이 바뀌던 초기에 숲의 괴물을 소탕할 때를 빼고는 비각성자들은 각성자들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모두 던전에서 사냥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각성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이 도시를 위해 던전 사냥을 하며 안전 지대를 형성하려 애를 쓰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코인을 마음껏 쓰고 신비한 능력을 펼치는 각성자들을 그저 부러워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지금 도시를 지키기 위해 재앙과 싸우는 각성자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피와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각성자들을 보며 비각성자들은 감동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고, 진심어린 응원과 격려를 해주었다.
각성자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막 교대를 마치고 위치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는 각성자들을 부축해 휴식처로 이동시키는 일들, 물품을 정리하고 식량과 식수를 나르는 일 등을 자발적으로 도왔다.
각성자들 또한 그런 비각성자들의 도움을 고마워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재윤은 왠지 마음이 뭉클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각성자나 비각성자가 따로 없었다.
모두들 어떻게든 이 도시를 지켜보려고 한 마음이 되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이후에 이곳이 안전한 공간이 되어도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자신들의 눈물과 희생으로 도시를 지켜냈다는 뿌듯함을 영원히 간직하며 이 도시에 대해 애정을 가질 것이다.
[던전 10층이 개방되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드디어 구름 폭풍 재앙에 대항한 지 4일 째 날이 도래했다.
자정이 지나자마자 재윤은 즉각 던전 앞에 섰다.
“주인님, 조심하세요.”
“그래. 걱정마라, 제칸.”
제칸이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재윤이 막았다.
자칫하면 제칸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마족화된 각성자들은 제칸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윤도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하는 터라 제칸을 지킬 만한 여력은 없었다.
“재윤아! 너만 믿는다!”
“대표님만 믿고 있어요.”
“밖은 염려마세요! 저희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힘내세요, 대표님!”
베르타와 함께 던전 앞에 서 있는 재윤을 향해 각성자들 뿐 아니라 비각성자들도 애타는 심정으로 응원과 격려를 해주었다.
그들 또한 잘은 알지 못해도 마지막 층은 매우 험난할 거라 예상한 듯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염려들 마세요. 금방 통과한 후 나오겠습니다.”
재윤은 자신 있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지체 없이 게이트를 통과했다.
[던전 10층에 진입했습니다.]
[던전에 있는 모든 괴물들을 처치하세요.]
하루의 시간 내에 모든 괴물을 처치해야 한다.
단 한 마리의 괴물이라도 처치하지 못하면 던전은 리셋 되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재윤이 1층부터 9층까지 통과하며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 10층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드디어 끝낼 때가 왔구나.”
재윤은 암흑검을 빼들고 주변을 살폈다.
10층은 필드형 던전이 아닌 동굴 형태로 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던전이었다.
동굴을 따라 이동하자 간혹 거대 식충식물들이 보였다.
그것들을 가볍게 처치하며 전진하자 계속 갈림길이 나왔다.
두 개 혹은 세 개로 나뉘는 동굴 속 갈림길.
그런데 그게 끝도 없었다.
‘미로 형 던전인가?’
처음에는 그렇다 해도 당황하지 않았다.
앞이 막히면 돌아가서 다시 다른 길로 가면 된다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길로 가도 막힌 길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갈림길이 나타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로를 통과하기는커녕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어느덧 몇 시간이 그냥 흘러갔다.
어쩌다 보이는 거대 식충식물들만 해치웠을 뿐 마족화된 각성자나 이곳 어딘가 있다는 재앙의 근원은 발견조차 하지 못했다.
“이거 설마 이놈들이 작정하고 이렇게 만든 건가?”
“아무래도 그들이 시간끌기를 하는 것 같구나.”
뒤따라오던 베르타도 심각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을 끌어 던전 통과에 실패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구름 폭풍 재앙에 가까스로 저항하고 있는 각성자들에게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혹시 미로 길 찾기 같은 고급 정보는 없어?”
“나 또한 그러한 정보가 생성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인간.”
베르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 예은이 넌 미로를 스캔해볼 수 있겠지? 》
도시 관리자인 이예은은 도시의 모든 걸 볼 수 있다.
재윤은 관리자 통신을 통해 그녀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 안타깝지만 스캔이 불가능해요. 통과된 던전이라면 제가 볼 수 있지만 10층은 미통과 던전이라 지금은 그저 암흑으로 뒤덮인 공간만 보입니다. 》
그러다 보니 재윤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자칫 아무런 성과도 없이 하루의 시간이 지나 던전이 초기화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우가 아니었다.
재윤은 그 후로도 다시 반나절이 넘도록 마족화된 각성자들을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구름 폭풍을 일으킨 재앙의 근원도 못 찾았다.
그냥 끝없는 미로만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도 계속 시간은 흘렀다.
[던전 통과에 실패했습니다.]
[던전이 초기화됩니다.]
[던전에서 나갑니다.]
재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실패했다.
24시간을 꼬박 쓰고도.
***
한편 그때 던전 10층의 심처.
그곳에는 최재형과 오재구, 이승준 등을 비롯한 마족화된 각성자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큭! 역시 그놈이 이곳으로 오지 못하는군.”
“흐흐, 그놈이 미로를 통과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굳이 싸울 필요도 없지요. 어차피 시간만 끌면 우리가 무조건 이기는 게임 아닙니까?”
최재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사실 지금 우리의 힘이라면 그놈과 싸워도 못이길 건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윤일호와 배주은이 당했습니다. 그 미친놈에게는 마족화가 되었다고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어쩌다 이 꼴이 되어 던전에 갇히게 됐지만 이번에 공을 세우면 마계에서 요직을 준다고 했으니 절대 그놈에게 패배하면 안 된다.”
구름 폭풍을 일으키는 재앙의 근원에 의해 던전이 변형되며 최재형은 10층 최후 보스가 되었다.
그의 뒤쪽에 있는 시커먼 석상이 바로 재앙의 근원이었다.
최재형은 다른 마족화된 각성자들과 함께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한쪽에서 불안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있던 이윤지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저는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지 악마들이 있는 마계라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최재형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멍청한 년!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거냐? 우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아직도 모르는 것 같으니 말해주지. 여기서 죽으면 우리는 마계로 들어가 최하급 마물로 환생하게 된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다.”
마족이 최재형에게 경고와 함께 알려준 내용이었다.
그 사실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최하급 마물이 뭔지 알아?”
“몰라요. 그게 뭐죠?”
“슬라임이나 거대 벌레 같은 마물이다.”
순간 이윤지 등이 치를 떨었다.
여기서 죽으면 마계라는 곳에서 그런 흉측한 괴물로 환생하게 될 운명이라니.
“크큭! 이제 알았나 보군. 그런 비참한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라."
“제발 어떻게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고 네년은 일단 날 배신한 대가부터 치러야지.”
최재형은 이윤지를 보자 다시 화가 치미는지 그녀를 무자비하게 후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퍽!
“아아악!”
아무리 마족화가 되어도 이윤지는 최재형을 당해낼 수 없었다.
다른 마족화된 각성자보다 최재형이 두 배는 더 강하기 때문이다.
‘흐윽! 이렇게는 절대 못 살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 나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냥 살아남기 위해 최재형을 선택했고, 그의 방식에 맞춰 살았을 뿐인데.
모든 건 최재형이 준 괴상한 알약을 받아먹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약을 먹는 순간 마족의 권속이 된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것이다.
도끼에 맞아 죽었는데 갑자기 되살아나 악마처럼 몸이 변형된 것도 미칠 지경인데, 여기서 죽으면 마물이 된다니.
그렇다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이 꼴로 마계라는 곳에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저 절망뿐이었다.
조영훈 또한 이윤지와 같은 심정인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
10층 도전 2일차.
재윤은 사실상 거의 휴식 없이 즉각 10층에 재도전했다.
어제 자정 이후 24시간이 지나 던전이 리셋된 터라 대기 시간이 따로 필요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혹시 몰라 제칸을 데리고 들어왔다.
제칸이 가진 라이칸슬로프로서의 특별한 감각이라면 미로를 뚫고 재앙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제칸도 종일 헤매기만 할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더욱 황당한 건 미로의 형태가 어제와 또 달라졌다는 것.
[던전 통과에 실패했습니다.]
[던전이 초기화됩니다.]
[던전에서 나갑니다.]
한 번도 아닌 두 번 연속 실패!
그것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재윤 스스로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차라리 괴물과 싸워 패배한 것이라면 억울하지나 않을 것이다.
미로에 가로막혀 2연속 실패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엇보다 밖에서 고통을 참아가며 재앙을 막고 있는 각성자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재윤아!
재윤이 풀 죽은 표정으로 던전 밖으로 나오자 장예찬이 달려왔다.
“미안하다, 예찬아.”
“아니야. 네게 이 말을 해주려고 왔다.”
장예찬이 씩 웃더니 재윤의 어깨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각성자들은 이제 버틸 만 해.”
“그게 무슨 말이냐? 갈수록 점점 더 버티기 힘들어질 텐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거 모르냐? 처음에만 힘들었지 다들 벌써 고통에 적응해 잘 참고 있다. 네가 포기만 안한다면 몇날 며칠 이건 우린 버틸 수 있어. 이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각성자들 모두의 심정이야. 우린 널 믿는다, 재윤아.”
재윤은 자신을 믿고 있는 모두의 진심이 느껴져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게.”
이미 10층 던전은 리셋 됐다.
재윤은 즉각 세 번째 도전을 시작했다.
미로가 또 바뀌어 어제 기억해둔 것들이 또 쓸모가 없어졌다.
‘차분하게 미로를 그려보자.’
미로의 모든 갈림길에 암흑검으로 표시를 해두고 아공간에 있던 스마트폰 카메라로 하나하나 찍으며 차분히 미로를 그려나갔다.
한 번 갔던 길로 되돌아가지만 않으면 결국은 그놈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조차도 소용없었다.
아무리 그려나가도 끝이 없었으니까.
결국 재윤은 3번째 도전에도 실패했다.
곧바로 던전이 리셋 되었으니 4번째 도전을 할 수 있었지만 재윤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이건 도무지 방법이 없어.’
혹시나 싶어 잠깐 시간을 내서 운명의 탑의 아루넬을 만나보려고 했지만 탑 안에 들어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재윤은 피 그림자의 재앙이 어느덧 절벽 아래를 점령하고 절벽 위 숲까지 침투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대로라면 구름 폭풍이 문제가 아니라 피 그림자에 모두가 죽게 된다.’
물론 재윤은 구름 폭풍이건 피 그림자건 뭐가 몰아쳐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모두가 죽을 것이다.
그는 절대 그런 식으로 혼자만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통과해야 해.’
재윤은 이를 악물고 던전으로 돌아갔다.
[던전 10층에 진입합니다.]
그렇게 던전 10층의 네 번째 도전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반드시 성공한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났을까?
여전히 길을 찾는 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필사적인 심정으로 미로의 길을 찾고 있는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