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초승달의 주인 (1) >
작고 귀여운 손바닥.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뭘 보여주고 싶은 거니, 예은아?”
재윤이 묻자 이예은이 눈을 감더니 정신을 집중했다.
순간 그녀의 손바닥에 오렌지 빛 초승달 문양이 나타나 환하게 빛났다.
“그것은?”
재윤이 깜짝 놀라자 이예은이 눈을 뜨고 귀엽게 웃었다.
“아저씨가 이 문양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해서요.”
“맞아. 그게 설마 너일 줄은 몰랐구나.”
“세상이 이상하게 변했을 때 갑자기 생긴 능력이에요. 엄마에게만 보여줬는데 엄마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해서 숨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저씨라면 상관없을 것 같아서요.”
각성자로서 전투능력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그저 손바닥에 초승달 모양의 환한 빛만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재윤은 미소 지었다.
“그래. 아주 잘 찾아왔다.”
“저를 도와주셨으니 저도 아저씨의 일이라면 뭐든 도울게요.”
재윤은 기특하다는 생각에 이예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쨌든 너에게 당첨이다.”
“뭐가요?”
“1만 코인. 조만간 안전지대가 생성되면 너의 코인 계좌에 넣어주마.”
그러자 이예은은 깜짝 놀라면서도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그럼 그건 엄마에게 주세요. 엄마가 우리도 코인 좀 마음껏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그랬거든요.”
“좋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재윤은 끄덕이고는 베르타를 쳐다봤다.
“초승달 문양을 가진 아이를 찾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운명이 이끄는 장소로 가라. 그건 그대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재윤은 혹시나 싶어 운명의 나침반을 꺼내 살펴봤다.
이 나침반은 매일 꺼내서 확인해 본다.
어제도 자침이 사라져 있는 걸 재확인했을 뿐이다.
‘어? 생겨났네?’
신기하게도 이예은을 만나는 순간 자침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은 멀지 않았다.
신논현역 지하 던전 입구 쪽이었다.
곧바로 재윤은 이예은과 함께 던전 입구로 갔다.
그리고 나침반의 방향을 따라 걷자 입구의 벽 한쪽에 그동안 발견할 수 없었던 비밀의 문이 하나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가까이 와서 유심히 살펴봐야만 볼 수 있는 문.
그것도 이예은과 함께 가자 그 문 앞의 초승달 문양이 반짝이지 않았으면 알기 어려울 만큼 완벽히 감춰져 있었다.
“저 문양에 아이의 손바닥을 대면 문이 열릴 것이다.”
베르타의 말에 재윤은 이예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예은이 왼손바닥을 문의 초승달 문양에 가져다 댔다.
순간.
곧바로 문이 열렸다.
“신기하네요. 이런 곳에 문이 있다니.”
뒤에서 지켜보던 유선미가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문 안으로 그녀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녀를 뒤로 밀어낸 것이다.
문은 마치 재윤과 이예은만 허용한다는 듯 그들이 들어가자 곧바로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베르타는 자신 또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지 밖에서 대기했다.
화아악!
그렇게 문이 닫히는 순간 어두웠던 방안이 밝게 변했다.
그 빛은 중앙에 있는 천사 형상의 석상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왔다.
석상은 왼팔을 쭉 뻗고 있었는데 손바닥에 초승달 문양이 보였다.
“와아! 저 석상은 뭐죠? 정말 예뻐요.”
이예은이 신기한 듯 석상을 쳐다봤다.
그러자 재윤은 미소 지었다.
“저기에 너의 손바닥을 대봐라. 그럼 알 수 있을 거야.”
누가 알려준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럴 거라 감이 왔다.
이예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상의 손바닥에 그녀의 손바닥을 가져댔다.
그 순간.
접촉된 두 손바닥을 중심으로 강렬한 광채가 피어나며 밀실 안을 신비한 빛으로 가득 채웠다.
화아아악!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석상이 점차로 생기를 띤다 싶더니 환한 빛의 형태로 변했고, 이내 그것은 이예은의 몸으로 겹쳐지듯 스며들었다.
스스스.
그와 함께 이예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소녀의 외모는 그대로지만 누추하게 걸치고 있던 옷이 백색의 아름다운 옷으로 바뀌고 양쪽 어깨 뒤로는 하얀 날개도 생겨나 있었다. 두 눈은 신비한 광채를 뿜고 있었는데 그 빛을 보는 순간 재윤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 맑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깜짝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솔직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재윤은 이예은이 석상이 가진 비밀스러운 힘을 작동시키는 일종의 메인 코드 역할을 할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천사의 모습으로 변해버릴 거라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운명의 힘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어 저의 봉인을 풀어주셨군요.”
이예은의 음성 또한 달라졌다.
더 이상 그녀는 아이가 아니었다.
신비한 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넌 누구지?”
“저는 운명의 힘에 의해 이곳 도시 초승달의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초승달?”
“그것이 이 도시의 이름이에요. 특별한 조건이 달성되어야만 저의 봉인이 풀리게 되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이예은은?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마치 빙의를 하듯 다른 특별한 존재가 이예은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재윤은 우려가 되었다.
그러나 이예은이 빙긋 웃었다.
“이예은은 바로 저입니다. 기억이 봉인된 채 특별한 조건을 달성할 때까지 평범한 인간 소녀로 살고 있었을 뿐이죠.”
“그럼 엄마는?”
“그 분은 세상이 뒤바뀐 날 강남역 근처에서 기억을 잃고 떠도는 저를 딸처럼 품어주신 분이에요. 이름도 그 분이 지어주셨고요.”
그러고 보니 친엄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너의 본래 이름은 뭐지?”
“이전의 이름은 의미가 없으니 그냥 이예은으로 할게요. 관리자와는 별개로 엄마와 함께 이예은의 삶도 살아가고 싶거든요.”
“어쨌든 봉인된 기억이 이제 돌아왔다는 거군.”
“네, 맞아요.”
“그럼 너의 본래 정체는 뭐지? 혹시 천사야?”
“그건 아니고요. 저는 당신에게 소속된 희망 성의 관리자 오르도와 같은 존재입니다.”
재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운명의 힘에 창조되었다는 특별한 수호자?”
“네. 그리고 저 또한 당신을 선택했어요.”
"날 무슨 기준으로?"
“명성 7레벨의 성주이신 당신이라면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하시는 당신의 인품과 용맹 또한 조건에 넘치고요. 부디 도시 초승달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이예은이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 천사와 같은 날개를 가진 신비한 존재인 이예은.
그녀가 재윤을 지배자로 선택한 것이었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재윤은 망설이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에 뭔가 쑥스러워 사양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한가하게 사양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보다 구름 폭풍 재앙을 막을 방법이 있어?”
“네."
이예은은 미소 지었다.
***
구름 폭풍 재앙을 막는 방법은 신논혁역을 중심으로 일정한 위치에 각성자들이 선 채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 위치는 각성자들의 눈에만 보이는 신비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는데, 위에서 보면 그 모양이 마치 초승달처럼 보인다고 했다.
“반드시 파투스의 힘을 가진 자들이 그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교대는 가능하지만 그 위치가 비게 되면 재앙을 제압하는 힘이 사라지게 되어 구름 폭풍은 더욱 빨리 하강할 수도 있어요.”
“그래. 그럼 모두에게 전하겠다.”
파투스의 힘을 가진 자들이란 곧 각성자들을 의미했다.
각성자들이 특정 위치를 점하고 있으면 신비한 힘이 발동해 구름 폭풍의 하강을 멈출 수 있다는 것.
물론 그것만으로 구름 폭풍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그것을 없애는 건 오직 재윤이 10층 던전에 들어가 재앙의 근원을 파괴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재윤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 장예찬과 유선미를 찾았다.
초승달 문양을 가진 존재를 찾았다는 말에 도시 밖 숲까지 나가 샅샅이 뒤지고 있던 장예찬은 반색하며 돌아온 터였다.
“정말 그 아이의 손에 초승달 문양이 있어?”
“그래. 이제 아이가 아니라 도시 관리자 이예은이다.”
“도시 관리자?”
재윤은 간략하게 도시 관리자가 어떤 것인지 장예찬과 유선미에게 설명해줬다.
도시의 모든 시설을 관리할 뿐 아니라 방어도 담당하는 특별한 존재.
조만간 안전지대가 생성되면 안전지대 관리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대단하구나. 그럼 이제 저 구름 폭풍 재앙을 멈출 수 있는 거냐?”
“물론이야. 그런데 각성자들의 도움이 필요해.”
재윤은 이예은에게 들었던 내용을 그들에게 전해줬다.
그러자 장예찬이 빛의 숫자를 세어본 후 말했다.
“위치를 다 세어보니 대략 100개가 좀 넘는다.”
유선미는 그 사이 각성자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각성자들이 3백 명이 넘으니 서로 교대로 위치를 지킬 수 있겠군요.”
재윤은 끄덕였다.
“일단 초승달 빛이 비춰진 후에는 누구도 그 위치를 이탈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경우 오히려 구름 폭풍이 더 빠르게 하강한다고 하니 그땐 대책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유선미는 즉각 각성자들에게 관련 사항을 꼼꼼하게 전달했다.
각성자들은 구름 폭풍 재앙을 멈출 수 있다는 말에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잠시 후 첫 번째 조로 편성된 각성자들이 유선미의 안내에 따라 각각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렇게 그들이 정해진 위치로 이동한 순간.
강렬한 빛무리가 생겨나 각각의 각성자들을 하나하나 연결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연결되자 그 빛무리의 모양은 정말로 초승달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초승달 모양이 완성된 순간 더욱 강한 광채가 생성되어 상공으로 쏘아져나갔다.
화아아악!
그렇게 그 광채가 상공을 비추자 그때까지 조금씩 하강하던 구름 폭풍이 그 자리에 기적처럼 멈췄다.
“와아아아!”
“구름 폭풍이 하강을 멈췄다!”
“재앙을 막아냈다!”
“세상에! 이건 기적이에요!”
각성자들 뿐 아니라 그 사이 몰려와 상황을 지켜보던 비각성자들도 환호했다.
너무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사이 장예찬은 각성자들에게 계속 주의를 주었다.
"모두 이를 악물고 버티세요! 절대 그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됩니다. 견디기 힘들면 반드시 교대한 후 벗어나고요. 이건 전쟁입니다. 위치를 필사적으로 사수하지 않으면 우린 다 죽습니다.”
재앙의 무게 때문일까?
초승달을 형성하는 각 위치에 선 각성자들은 상당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생명력이 하락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힐러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그들을 치료했지만, 체력이 약한 각성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빠른 교대를 해야 했다.
그때 재윤은 이예은과 함께 도시 초승달의 관리자 공간에 서 있었다.
신논현역의 지하에 있는 이 공간에서는 마치 희망 성의 내성에 위치한 오르도의 공간처럼 안에서 밖의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신비한 빛의 공간 아래 도시의 전경이 모두 내려다보였고, 그곳에 각성자들이 초승달 모양을 형성한 채 힘겹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네.”
“재앙을 만든 쪽에서도 이를 갈고 있을 테니까요. 각성자들이 저렇게 버티는 건 한계가 있어요. 모두가 지쳐 쓰러지기 전에 재앙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예은도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4일만 버티면 돼. 어떻게든 4일만.”
재윤도 밖으로 나가 힘겨워하는 각성자들이 있으면 자리를 교대해주었다.
그러자 장예찬이 극구 만류했다.
“재윤아,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넌 충분히 휴식을 취해라. 던전 공략에만 집중해.”
“맞아요, 대표님. 저희들은 힘들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대표님을 도울 수 있어 다행입니다.”
힘겹지만 모두들 밝은 표정이었다.
그냥 재윤에게 기대기만 했던 자신들이 이렇게라도 뭔가 도시를 지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한 것이다.
덕분에 재윤은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드디어 자정이 지나 7층이 열렸다.
[던전 7층에 진입했습니다.]
[7층의 모든 괴물을 처치하십시오.]
그곳은 삼두적린사들의 소굴이었다.
그런데 보스 급 괴물은 보이지 않았고, 마족화된 각성자들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재윤은 매우 싱겁게 7층을 통과했다.
[당신은 던전 7층의 모든 괴물을 처치했습니다.]
[던전에서 나갑니다.]
밖으로 나온 재윤은 황당했다.
마족화된 각성자들이야 그렇다 치고 어째서 보스 급 괴물도 없는 건가.
게다가 삼두적린사들의 개체수도 그리 많지 않아 던전을 통과했지만 레벨도 오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네.”
“마족의 힘을 가진 재앙의 근원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겠죠.”
“그렇다고 던전을 더 쉽게 통과하게 해주는 건 이해가 안 되는데.”
“어쩌면 하층에서 대표님이 많은 경험치를 얻지 못하도록 하고 10층에 최후의 배수진을 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말이 되는 얘기지.”
이예은의 말대로였다.
다음 날 8층.
곰과 사자의 머리를 가진 거대 괴물인 베아투들의 소굴이었다.
그러나 7층처럼 보스급 괴물이 없었고, 베아투들의 개체수도 많지 않아 재윤은 손쉽게 8층을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9층.
재윤은 징그러운 거대 각갑충 수백 마리만 처치하고 9층을 통과했다.
여전히 재윤의 레벨은 57.
신논현역 던전은 마지막 10층만을 남겨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