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숨겨진 재앙 (2) >
그러자 베르타가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재앙의 냄새가 이 도시에서 풍긴다, 인간.”
“재앙이라고? 이 도시에도 재앙이 있었나?”
“숨겨진 재앙이라 그동안에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연히 드러났다. 저 구름의 폭풍이 바로 그 재앙이다.”
“저게 바로 재앙이라고?”
“지금은 상공에 있지만 점점 아래로 내려오게 되고, 저것이 지상에 닿는 순간 모든 걸 파괴하고 말 것이다.”
재윤의 안색이 굳어졌다.
“저 재앙의 레벨은?”
“50이다.”
순간 재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레벨 50 재앙이라면 지금의 그로서도 충분히 파괴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저걸 무슨 수로 파괴하지?”
“재앙의 근원을 찾아 없애야 한다.”
“재앙의 근원?”
“이곳 지하 던전에 그것이 있다.”
뜻밖의 말에 재윤은 놀랐다.
“설마 신논현역 던전에?”
“본래는 아니었지만 지금 막 그것이 던전의 10층으로 숨어들었다.”
그 말에 재윤의 눈이 빛났다.
“그건 잘됐군. 어차피 던전은 10층까지 깰 생각이었다.”
“이전의 던전이 아니다. 재앙의 힘으로 마족화된 각성자들이 그대를 방해할 것이다.”
“마족화된 각성자?”
“아까 그대에게 쫓겨난 자들이다. 그들은 마족들이 뿌린 씨앗을 먹은 자들이지. 그들이 파놓은 함정을 그대가 피해가자 결국 숨겨진 재앙이 드러나며 그대가 이곳에 안전지대를 생성시키는 것을 막고자 하고 있다.”
“그들을 진작 처치할 걸 그랬군.”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들을 죽였으면 더 빨리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숨겨진 재앙은 그들이 임무에 실패했을 때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까.”
본래라면 드러나지 않았을 은밀한 재앙.
그런데 그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역시 최재형 패거리가 그 마족 놈의 주구였군.’
그때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해치웠던 건 마족의 분신에 불과했다.
어딘가에서 마족의 본신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 재앙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곳에 저 같은 재앙이 숨겨져 있는지도 알지 못했을 테니 말이야.”
베르타의 말에 재윤은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대가 던전을 통과하는 사이 저 구름이 이 도시를 덮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은 없나?”
3000코인짜리 고급 정보라 했으니 왠지 알고 있을 것 같아 물어봤다.
과연 베르타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암흑의 힘이 재앙을 숨겨놓았다면 운명의 룰에 의해 이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존재들 또한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겠지.”
베르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한손을 폈다.
그의 손바닥에서 오렌지 빛 초승달 형상의 문양이 반짝였다.
“이 도시의 어딘가 몸에 이 문양을 가진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를 찾아야 한다.”
“각성자? 아니면 비각성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나?”
“그건 나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이 아닌 짐승일 수도 있다.”
“짐승이라면?”
“고양이나 개는 물론이고 새 같은 것들도 해당된다.”
“그런 경우라면 정말 찾기 힘들겠는데.”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베르타는 많은 심력을 소모했다는 듯 창백한 표정으로 몸을 비틀거렸다.
“고생했다.”
재윤은 아공간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러자 베르타가 반색하며 그것을 입에 물고는 말했다.
“서둘러라, 인간. 그대가 할 일은 저 구름 폭풍 재앙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던전 10층에 들어가 재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알았다.”
“그리고 던전에 있는 마족화된 각성자들은 매우 강력하니 조심해라.”
재윤은 마음이 무거웠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던전 10층을 돌파해 재앙을 제거하지 않으면 이 도시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피 그 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하늘에 형성된 구름의 폭풍이 훨씬 빠르게 도시를 덮칠 테니까.
‘몸에 초승달 문양이 있는 존재를 찾아야 한다.’
친구 장예찬을 비롯한 수백의 각성자들.
그리고 1만이 넘는 비각성자들까지.
그들의 목숨과 운명이 그것을 찾느냐에 달려 있었다.
곧바로 재윤은 장예찬과 유선미에게 베르타에게 들은 내용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던전은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초승달 문양을 가진 존재를 찾는 건 많은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해.”
그러자 장예찬이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그건 내게 맡겨라. 여기 있는 각성자들과 비각성자들도 모두 동원해 찾아볼게.”
유선미가 말했다.
“찾아내는 사람에게 포상을 하겠다고 하면 비각성자들도 적극 협조할거예요. 이를 테면 각성자만이 거주할수 있는 고급 저택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준다던가.”
그러자 재윤이 끄덕였다.
“그럼 비각성자들에게는 코인을 거는 게 가장 좋겠군요. 누구라도 초승달 문양을 가진 존재를 찾아내면 1만 코인을 쓸 수 있게 해주겠습니다.”
던전 10층을 통과해 안전지대가 생성되면 코인 경제(Lv1)가 실현된다.
비각성자들도 코인 계좌가 생성되는 터라 그곳에 코인을 얼마든지 입금시켜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겠죠.”
재윤에게는 1만 코인이야 별거 아니지만, 비각성자들에게는 꿈의 코인이다.
아니, 웬만한 각성자들에게도 엄청난 코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각성자들에게는 능력 강화석 10개를 걸겠습니다.”
그 순간 유선미의 두 눈이 반짝였다.
당장 그녀부터 구미가 당겼기 때문이다.
각성자들에게는 코인이야 어떻게든 벌 수 있다.
그러나 능력 강화석은 쉽게 얻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재윤이 막대한 포상을 걸었지만, 모두들 그 포상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각성자들이건 비각성자들이건 모두 저 상공의 구름 폭풍을 보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초승달 문양을 가진 존재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
자정이 지나자 6층 던전이 저절로 열렸다.
재윤이 코인을 소모해 개방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열린 것이다.
또한 그 아래 던전은 봉인된 채 열리지도 않았다.
마치 6층으로 어서 들어오라고 악마가 손짓하고 있는 듯했다.
“예찬아, 그럼 부탁한다.”
“그래.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염려마라.”
“제칸! 넌 예찬이를 호위하며 도와줘라.”
“예, 주인님."
아직 초승달 문양이 있는 존재는 찾지 못했다.
도시 상공의 구름 폭풍은 그 사이 더 거대해졌다.
그것은 그만큼 그것이 도시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윤은 던전 6층이 열린 이상 다른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구름 폭풍을 막는 일은 일단 친구 장예찬에게 맡겨두고 그는 곧바로 던전으로 들어갔다.
[6층에 진입했습니다.]
[6층의 모든 괴물들을 처치하십시오.]
무더운 정글과 같은 숲.
그 사이로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에 재윤이 상대했던 오크들보다 신장이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크고 강해보이는 녀석들.
“쿠아악!”
“쿠악!"
놈들은 시커멓게 번쩍이는 중갑을 몸에 두른 채 재윤을 향해 달려왔다.
무기도 다양했다.
양손도끼, 미늘창, 방패와 한손도끼 등등.
그 기세들도 무척 험악했지만.
‘혈광파!’
재윤은 시간끌 것 없다는 생각에 흡혈귀의 피를 소모해 광역기를 날렸다.
“쿠어억!”
"꾸억!"
본래 오크들이라면 혈광파를 절대 견뎌낼 수 없다.
그러나 유효거리내 있는 대부분의 오크들이 각자의 무기나 방패로 그것을 막아냈다.
물론 멀쩡한 녀석들은 없었다.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수준일 뿐.
혈광파의 데미지가 약간만 더 높아져도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
서걱! 촥! 촤아악!
“쿠어억!”
“꿰에엑!”
재윤이 빠르게 움직이며 암흑검으로 툭툭 치기만 해도 모두 나동그라졌다.
‘여기 오크들이 히드라나 철갑 독지네 보다 강하긴 하군.’
물론 재윤에게는 5층이나 6층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래봤자 아직 이곳 섬 바깥에서 해치운 삼두적린사 정도의 수준도 되지 못했으니까.
따라서 이대로라면 6층을 통과하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그러나 재윤은 던전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어둠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베르타가 말한 마족화된 각성자인가?’
그들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들 사이로 보이는 두 명의 인간.
일남일녀였다
아까 재윤을 찾아와 허리를 숙였던 최재형 패거리 중 둘.
윤일호와 배주은.
놀랍게도 그들에게서 풍겨나는 기세는 아까와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두 눈은 암흑처럼 검었고 그들의 전신을 시커먼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강재윤.”
재윤이 그들을 노려봤다.
“고작 던전을 지키는 괴물이 되려고 마족의 하수인이 된 거냐?”
“닥쳐! 네놈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여 버리겠다, 강재윤!”
윤일호과 배주은의 몸이 거대하게 변했다.
3미터도 넘게 커진 그들의 몸체는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윤일호는 마치 오우거를 연상케 하듯 우람한 근육질의 거대 괴물이 되었고, 배주은은 상체는 인간이되 하체는 뱀인 진짜 괴물이 되어 버렸다.
“흐흐, 지금 상태면 뭐든 다 이길 것 같은데?”
“하지만 이 꼴이 대체 뭐야?”
“크큭! 뭐긴. 우린 괴물이 된 거지. 영원히 이 꼴로 살아야 한다.”
“이게 모두 저놈 때문이야. 죽여 버려!”
곧바로 윤일호가 창을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쒸익!
재윤은 창을 피하며 윤일호의 허리를 암흑검으로 갈랐다.
콰앙!
그러나 폭음만 울릴 뿐 윤일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창을 풍차처럼 휘돌려 재윤을 공격했다.
카캉! 카앙!
‘으윽!’
놀랍게도 재윤이 힘에서 밀렸다.
당연히 윤일호의 힘이 아니다.
마족화되며 엄청난 괴력이 그에게 생긴 것이다.
“죽어! 이 나쁜 새끼야! 너 때문에 내 몸이 이 꼴로 변했어!"
이번에는 배주은이 쌍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 속도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쾅! 콰쾅! 카카카캉!
‘으윽! 뭐가 이렇게 빨라.’
재윤은 윤일호의 창과 배주은의 쌍검을 정신없이 막아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무기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배주은의 눈에서 붉은 광선 같은 것이 수시로 번쩍이며 날아왔고, 윤일호는 시뻘건 불덩이를 입에서 토해내기도 했다.
화르르르!
특히 윤일호의 입에서 쏟아진 화염은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으윽!’
그것들의 열기는 광혈의 막을 순식간에 파괴했다.
다시 광혈의 막을 펼쳤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
연속으로 화염 데미지가 들어와 재윤의 생명력을 계속 하락시켰다.
“크큭! 여기서 끝내자, 강재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꼴 좋구나.”
그러나 재윤은 묵묵히 암흑검을 휘둘러 그들과 맞섰다.
재사용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검기파(Lv3)를 비롯한 필살기를 날렸고, 암흑검에는 검기(Lv10)를 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윤일호와 배주은의 몸체를 두른 불가사의한 방어력의 방어막.
그것만 파괴하면 되니까.
특히 생명력이 하락하는 순간 얼마 전 운명의 탑에서 얻은 새로운 능력이 빛을 발휘했다.
전쟁신의 투혼!
생명력이 하락할수록 공격력 증가!
그 증가폭은 재윤의 생명력이 하락한 정도에 비례했다.
‘저놈들을 상대로 이걸 쓰게 될 줄은 몰랐군.’
일부러 생명력 물약을 먹지 않고 고통을 참으며 전투를 벌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그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운명의 탑에서 전쟁신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전사에게 천여 번을 죽었던 재윤이다.
그 끔찍했던 고통의 순간들이 온몸에 각인되듯 남아있다.
그에 비하면 지금 피부가 녹아들어가는 고통쯤이야 별 것 아니니까.
콰아아앙!
전쟁신의 투혼으로 강화된 검기파(Lv3)!
데미지가 얼마나 증가했는지는 재윤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토록 공격해도 꿈쩍도 안하던 배주은의 방어막이 단 번에 파괴되어버렸다.
“으윽! 이럴 수가!”
배주은이 충격을 입고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칠 재윤이 아니었다.
번쩍 암흑검에서 흑광이 피어나는 순간 배주은의 허리가 두 동강났다.
“끄아아아악!”
배주은은 괴물처럼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12,000코인을 얻었습니다.]
[마족화된 각성자에 대한 E급 지식을 얻었습니다.]
대량의 코인 외에 드롭템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지식을 얻었다.
“크아아아아! 용서 못해! 죽여 버리겠다!”
배주은의 죽음에 분노한 윤일호가 다시 불을 뿜어내며 창을 미친 듯 휘둘렀다.
‘으윽!’
재윤은 일부러 광혈의 막을 펼치지 않고 데미지를 받았다.
생명력이 삼분의 일 정도 하락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놈에게 필살기를 날렸다.
그러나 윤일호의 전투력이 배주은보다 훨씬 강하다보니 놈은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재윤은 결국 생명력의 절반까지 하락한 상태가 되고 나서야 놈에게 강력한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그만 죽어라!”
윤일호의 방어막이 파괴되자 재윤은 즉각 놈의 양손을 잘라버렸다.
그로써 끝없이 날아들던 창의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놈의 심장에 암흑검을 박았다.
푸화악!
“크으으윽! 제기랄! 크큭!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윤일호는 자조어린 미소를 지었다.
“크윽! 그, 그래도 날 죽여줘서 고맙다, 강재윤. 괴물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마지막 아주 잠깐이지만 윤일호는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지자 그의 몸은 검은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14,000코인을 얻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전쟁신의 검술이 Lv57이 되었습니다.]
[마족화된 각성자에 대한 D급 지식을 얻었습니다.]
레벨 상승!
마족화된 각성자가 주는 경험치는 생각보다 많았다.
이제는 어지간한 보스급 괴물들을 죽여도 레벨 업은 엄두도 못내는데 배주은과 윤일호를 죽이자 레벨이 한 단계 오른 것이다.
그 사이 오크들은 재윤과 마족화된 각성자들의 전투에 기가 질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재윤은 즉각 던전을 돌며 오크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크 보스도 싱거운 수준이라 순식간에 끝이 났다.
[6층의 모든 괴물들을 처치했습니다.]
[던전에서 나갑니다.]
이렇게 재윤은 신논현역 던전 6층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 순간 신논현역 주변이 더욱 확장되었다.
동시에 암흑으로 뒤덮인 논현역과 강남역이 양옆으로 밀려나듯 멀어져갔다.
콰아아아아!
그러나 상공을 휘돌고 있는 구름 폭풍은 도시에 더욱 가깝게 접근하고 있었다.
‘아직 못 찾은 건가?’
재윤은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역 밖으로 나와 상공을 살펴본 후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내일 7층이 열릴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
장예찬과 제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바쁘게 초승달 문양을 가진 존재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표님!”
그때 유선미가 재윤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뭔가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부터 저 아이가 대표님을 뵙겠다고 기다리고 있어요.”
“무슨 일로요?”
“모르겠어요. 대표님께 직접 말하겠다며 저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해요.”
누추한 몰골의 한 소녀였다.
무엇 때문인지 소녀는 왼손을 꼭 말아 쥔 채로 서있었다.
‘저 아이는?’
재윤은 소녀를 알아봤다.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 양아치 김우식 패거리에 의해 앵벌이를 하던 이예은이라는 소녀였으니까.
“아저씨!”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던 이예은은 재윤을 보자 밝게 웃었다.
재윤은 미소 지었다.
“예은이구나. 잘 있었니?”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엄마가 나았어요. 엄마가 아저씨에게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잘됐구나. 그보다 그놈들이 또 널 괴롭히진 않았어?”
“그 후로는 제 앞에 한 번도 안 나타났어요.”
다행히 경고를 잘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재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고맙다는 말을 하러 온 거였구나."
“그것도 있고 또 하나 있어요.”
“그게 뭐지?”
그러자 이예은이 재윤을 향해 왼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말아 쥔 주먹을 펴서 손바닥을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