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숨겨진 재앙 (1) >
한편 최재형과 그의 심복들이 재윤 앞에 허리를 숙이는 광경을 보는 신논현 연합 각성자들의 표정은 싸늘했다.
장예찬도 마찬가지였다.
“재윤아, 다른 사람들은 다 받아도 상관없지만, 저자들은 반대다. 분명 말은 저렇게 해놓고 나중에 가면 문제를 일으킬 사람들이야.”
장예찬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을 노렸던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최재형 등이 강남역 연합에서 보여줬던 행동은 철저히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다른 각성자들을 이용했다.
4층 던전을 통과할 때만 해도 그렇다.
마치 총알받이를 내세우듯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각성자들을 앞세워 히드라 보스의 독을 시험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니까.
대의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 대의라는 것이 바로 최재형을 비롯한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모르는 각성자들은 없었다.
그럼에도 각성자들이 최재형의 그늘 아래 있었던 이유는 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던전의 10층까지 통과해 안전지대를 형성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최재형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최재형보다 훨씬 강한 존재가 나타났다.
그는 단신으로 5층을 통과했다.
약한 각성자들을 이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각성자들이 그에게 기대기 위해 스스로 모여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재윤의 앞에 최재형 등이 찾아와 허리를 숙인다?
그것도 불과 며칠 전에 장예찬을 죽이기 위해 사악한 술수를 부렸던 자들이?
이미 그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각성자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따라서 최재형이 진심으로 그 때의 일을 뉘우친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재윤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들었나? 내 친구의 의견이 곧 나의 의견이다.”
당연히 재윤 또한 최재형 등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구를 공격했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 장예찬을!
그들이 말은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는 일.
따라서 재윤이 최재형 등을 죽이지 않은 것만도 엄청난 배려를 해준 것이다.
동정 때문이 아니다.
그 스스로 사람을 마치 괴물을 죽이듯 너무 함부로 죽이게 될까봐 스스로 자제하는 중일뿐이다.
그러자 최재형은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재윤이 이렇게 대놓고 자신들을 거절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감히!’
무엇보다 그는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허리를 굽혀본 적이 없었다.
세상이 뒤바뀌기 전에도 그는 흔히 말하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연간 1조 정도 매출을 내는 기업의 후계자.
강남에서 그가 소유한 부동산의 가치만 수천억이 넘었다.
지금이야 그것들이 다 의미 없어지긴 했지만 각성자로서 그는 그때보다 더한 부귀를 누릴 수 있다 확신하고 있었다.
괴상하게 변하긴 했지만 강남대로를 중심으로 한 이 도시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실현가능했다.
재윤이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너 따위 놈이 감히 나를 무시해! 용서 못한다.’
최재형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러한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뻔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그 라이칸슬로프에게 온몸이 찢기듯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그는 애써 미소 지었다.
“뜻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강남역 던전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짐짓 대인배처럼 말한 후 돌아섰다.
그런데 이윤지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재윤의 앞에 가더니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말했다.
“흐윽! 저는 저자에게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저곳에 있었어요. 강남역 연합을 탈퇴하고 싶어도 무서워서 못했고요. 제발 저를 이곳에 있게 받아주세요.”
그러자 최재형이 기막힌 듯 그녀를 노려봤다.
그런데 이윤지 뿐이 아니었다.
조영훈도 사태가 심상치 않자 즉각 최재형을 배신했다.
“이윤지의 말대로입니다. 저 또한 저 최재형의 밑에서 온갖 굴욕을 당하며 지금껏 버텨왔지만, 도망칠 용기를 못냈습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최상위 랭커 중 이승준과 오재구를 제외한 모두가 최재형을 배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미 장예찬과 유선미가 저들이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해 재윤에게 알려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최재형의 힘을 믿고 그 아래서 온갖 갑질을 다 부렸던 이들이라고.
따라서 이윤지가 눈물로 호소해도 재윤은 그녀에게 아무런 동정도 주지 않았다.
“제칸! 쫓아버려라.”
“예, 주인님."
그 순간 제칸이 라이칸슬로프 로드의 본신으로 변신했다.
푸른 털의 거대 늑대 괴수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최재형 등은 기겁했다.
"허억!"
"으아악!"
이미 한 번 제칸에게 당했던 최재형, 오재구, 이승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또한 이윤지와 조영훈 등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후다닥 밖으로 달려갔다.
특히 이윤지 등의 표정은 난감함 그 자체였다.
재윤이 당연히 받아줄 거라 생각해 눈물 연기까지 하며 최재형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강남역으로 가면 맞아죽을 지도 몰라.”
그녀는 다급히 조영훈을 쳐다봤다.
그러자 조영훈도 그녀의 뜻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
“어쩔 수 없어. 논현역으로 가자.”
그렇게 최재형 패거리는 그 와중에 둘로 나뉘었다.
최재형, 오재구, 이승준을 제외한 나머지는 신논현역에서 쫓겨나자마자 논현역 쪽으로 도주한 것이다.
“크큭! 크크크큭!”
최재형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미친놈처럼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동안 자신이 그들을 그토록 챙겨줬는데 단 두 놈 빼고 모두가 배신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
잠시 후 이윤지 등은 논현역 앞에 도착했다.
그곳 던전 입구로 내려가자 왜소한 체구의 남자 한 명이 그곳에 서 있었다.
다름 아닌 허승우.
비록 지금은 명성이 좀 하락하긴 했지만, 한때는 최재형과 쌍벽을 이룰 만큼 강한 존재였다.
그는 최재형의 견제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이곳으로 나와 논현역 던전을 개척한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허승우 대표님.”
이제 기댈만한 존재는 그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윤지 등은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그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허승우는 그들을 향해 빙긋 웃었다.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논현역이 쓸쓸했는데 그대들이 와서 온기가 도는 것 같군요.”
그가 반겨주는 것 같자, 이윤지 등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전에 서로 안 좋았던 일들은 잊어주세요. 그땐 최재형 때문에 저희도 어쩔 수 없었어요.”
“저는 이미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근데 대표님은 왜 신논현역에 안 가시고 혼자 남았죠?”
그러자 허승우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난 원래부터 북적이는 걸 싫어해서 그런가 봅니다. 어쨌든 이제 그대들이 왔으니 함께 힘을 합쳐 3층도 한 번 도전해봅시다.”
“3층이라면 저희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요.”
“하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대표님.”
그런데 그때였다.
“큭! 너희는 3층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한기가 가득한 음성.
다름 아닌 최재형이었다.
그의 뒤로 오재구와 이승준 또한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자 허승우가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최재형 대표님, 오랜만이군요.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이신지?”
“배신자들을 처리하러 왔으니 넌 상관하지 마라.”
그 말을 들은 이윤지 등의 안색이 굳었다.
그들은 설마하니 최재형이 논현역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빨리.
“대표님,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요.”
“저희가 잘못한 건 맞지만 너무 하십니다.”
이윤지 등이 말하자 최재형은 그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닥쳐! 그놈이 날 거절한 것보다 너희 연놈들이 날 배신하고 그놈에게 달라붙으려 했던 것이 백배는 더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허승우가 다급히 외쳤다.
“진정하십시오, 최재형 대표님.”
“크큭! 그러고 보니 허승우 네놈도 배신자였지. 감히 나를 거스르고 떠난 놈이니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벼르고 있었는데 오늘이 날인 것 같구나.”
최재형은 이승준과 오재구에게 힐끗 눈짓을 했다.
자신이 허승우를 해치우는 동안 그들이 이윤지 등을 처리하라는 뜻.
이승준 등의 입가에 살기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푸확!
“으으윽!"
가장 먼저 힐러 조영훈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의 뒤쪽으로 이동한 오재구가 그의 목덜미에 단검을 꽂아 넣은 것이다.
촤악!
“아아악!”
다음은 이윤지였다.
이승준이 도끼로 그녀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최재형 휘하 랭킹 2위와 3위인 오재구와 이승준이 작정하고 살육을 펼치자 이곳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허승우의 앞에는 어느새 최재형이 성큼 다가가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카아앙! 카앙!
허승우 또한 재빨리 창을 빼들어 최재형의 공격을 방어해나갔지만 위태해 보였다.
“으아아악!”
“크아악!”
결국 그 사이 오재구와 이승준이 각성자들을 모두 죽였다.
이로써 허승우는 더욱 불리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최재형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오재구와 이승준까지 그를 포위해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푹! 푸확!
“크으윽!"
결국 허승우는 심장에 검이 찔린 채 주저앉았다.
그는 핏발서린 눈빛으로 최재형을 노려봤다.
“어리석은 짓을!”
“크큭! 닥치고 그만 뒈져라!”
최재형은 허승우의 목을 베어버렸다.
서걱!
몸체에서 떨어져나온 허승우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원통한 듯 부릅뜬 두 눈이 최재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놈 끝까지 꼴 보기 싫은 눈빛을 하고 있군.”
최재형은 인상을 찌푸리며 허승우의 머리를 발로 차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바닥에 있던 허승우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던 것이다.
곧바로 최재형을 노려보는 허승우의 눈빛은 시커먼 암흑 그 자체였다.
“이건 또 뭐야?”
최재형은 검으로 허승우의 머리를 공격하려 했지만 돌연 몸이 석화라도 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으! 몸이 안 움직입니다.”
“크윽! 갑자기 몸이 굳었습니다.”
오재구와 이승준도 같은 상황에 처한 듯 당황한 음성들이 터져 나왔다.
그때 허승우의 두 눈이 시커멓게 번쩍였다.
《 한심한 놈 같으니! 결국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 》
그와 함께 전해오는 신비한 음성.
최재형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에게 매우 익숙한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설마?”
《 강재윤을 강남역 던전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 간단한 일 하나도 못하고 일을 이지경까지 만들다니. 》
그 말을 하는 허승우의 눈빛에서는 음침하면서도 사악한 기운이 번쩍이고 있었다.
《 네놈이 이렇게 미련한놈인 줄 알았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몰라 이놈의 몸에 마족의 씨앗을 뿌려두길 잘했군.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곳을 그놈에게 내주고 말았을 테니까 말이야. 》
죽어야 나타나는 재앙의 씨앗.
그것이 허승우의 몸에 숨겨져 있었다.
최재형이 허승우를 죽임으로 그것이 활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짐작도 못한 채 최재형은 다급히 외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놈만 없애주신다면, 아니, 저에게 약을 많이 주신다면 얼마든지 그놈을 죽일 수 있습니다.”
《 입 닥치고 네놈은 이제 순순히 던전으로 기어들어가 그놈과 맞설 준비나 해라. 》
“던전으로 들어가 그놈과 싸우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허승우의 두 눈에서 시커먼 빛이 쏘아져나왔다.
촤아아아!
암흑의 기운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오며 최재형과 이승준, 오재구를 휘감았다.
“크윽!”
“으으윽!"
최재형 등은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암흑의 기운에 빨려 들어갔다.
암흑의 기운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윤지 등의 시체도 휘감았다.
순간 죽었던 이윤지 등이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윽!"
“아아악!”
이내 그들 또한 비명을 지르며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르르릉!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사방이 진동했다.
논현역 전체가 암흑의 기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암흑의 기운은 점점 더 팽창되더니 검은 구름으로 화해 상공으로 올라갔다.
바로 그 순간 강남역 던전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
암흑은 이내 강남역 던전도 흡수하기 시작했고, 이내 검은 폭풍처럼 휘돌며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콰아아아아아!
그렇게 갑자기 도시의 중앙에 거대한 검은 구름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그와 함께 도시는 신논현역 일대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으아아! 이게 무슨 일이야?”
“사방이 깜깜해졌어.”
“저쪽에 빛이 있다! 저쪽으로 뛰어!”
논현역과 강남역에 있던 비각성자들은 앞 다투어 신논현역 쪽으로 몰려왔다.
그때 재윤 역시 하늘에 검은 구름의 폭풍이 생겨났다는 말을 듣고 역 밖으로 나와 살펴보고 있었다.
‘저건 또 뭐지?’
어둠의 기운이 물씬 풍겨나고 있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논현역과 강남역 쪽은 왜 다 암흑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지금 막 3000코인짜리 고급정보가 하나 생겨났다, 인간.”
베르타가 황급히 다가오며 말했다.
재윤은 놀랐다.
무려 3000코인짜리 정보라니!
지금껏 베르타에게 들은 가장 비싼 정보가 1000코인짜리다.
그런데 그보다 무려 3배나 비싼 고급 정보가 생겨나다니!
‘아무래도 저 구름 폭풍과 관계된 것이겠군.’
재윤은 즉시 끄덕였다.
“살 테니 어서 말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