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재앙 파괴자 (3) >
재윤이 처음 갔던 운명의 탑에는 주변에 변이버섯들이 득실거렸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런 위협적인 존재는 없었다.
그저 진입 제한만 존재해 자격에 해당하지 않는 이는 들어갈 수 없을 뿐이었다.
츠으읏!
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의 환한 공간이 나타났다.
세상과 완전 분리된 또 다른 공간.
그곳의 중심에 천사를 연상케하는 신비한 여성 아루넬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어서오세요, 각성자님. 갑자기 이렇게 불러서 놀라셨나요?”
“놀랍다기보다는 궁금했습니다. 저를 부른 이유는 뭐죠?”
“당신은 이곳 세계에서 최초로 재앙을 파괴하셨어요. 물론 소규모 재앙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단한 업적이라 할 수 있어요.”
최초로 재앙을 파괴했다?
그럼 최초로 운명의 탑에 들어왔던 것처럼 뭔가 특별한 보상을 주려는 것일까?
당시 재윤은 모든 스탯이 10 증가하는 보상을 받았었다.
“그것 때문에 저를 부른 겁니까?”
“네, 맞아요.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잠시 후 저와 대화를 마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거예요.”
“그렇군요. 고맙게 받겠습니다, 아루넬 님.”
그렇지 않아도 다크 엘프들와 괴물 군단에게 성이 봉쇄되어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는데, 뭔가 전투력에 유리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저에게 고마워하실 건 아니랍니다. 운명의 룰에 따라 당신이 이룬 업적에 마땅한 보상이 주어지는 거라서요. 저는 그저 전달자에 불과하죠.”
아루넬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부른 건 그것 때문만이 아니에요. 가능한 빨리 레벨 42를 달성해야 한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레벨 42가 되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요?”
“당신이 가진 특화 능력과 관련된 또 하나의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2차 특화 능력 같은 건가요?”
“비슷해요. 하지만 무조건 얻는 건 아니에요. 그 또한 인연이 있어야 하고 확률은 1차 때보다 훨씬 희박하죠. 그러나 당신은 성주가 되어 재앙을 파괴한 이상 거의 확정적으로 얻게 될 거랍니다.”
아루넬은 눈을 강하게 빛내며 말했다.
“당신이 성주로서의 진정한 힘을 발휘하고 싶으면 42레벨을 달성한 후에 이곳으로 오세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방이 포위된 상태라 괴물 사냥을 할 수가 없으니 문제였다.
정작 42레벨은커녕 40레벨 달성도 불가능한 상황.
"그럼 부디 건투를 빌겠어요.”
그러나 아루넬은 그런 사정은 잘 모르는 듯 환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알림.
[당신은 최초로 재앙을 파괴했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의 모든 극 전투 능력이 한 단계씩 상승합니다.]
[검기파가 Lv3이 되었습니다.]
[질풍의 화살이 Lv2가 되었습니다.]
[광혈의 의지가 Lv2가 되었습니다.]
[질풍 이동이 Lv2가 되었습니다.]
‘오! 이건?’
극 전투 능력의 강화는 지금껏 딱 한 번 가능했다.
흑요정의 시험을 10단계까지 통과한 보상으로 극 전투 능력 강화석을 1개 받았으니까.
그 외에는 그 어떤 보스 급 괴물을 죽여도 얻을 수 없었는데, 이번 보상으로 단번에 극 전투 능력들의 단계가 모두 올랐다.
* 검기파(Lv3)
-효과 : 대상에게 <3000 + 모든 스탯의 3000%>만큼 피해를 준다.
-유효 거리 : 40m
-파투스 2 소모
-재사용 대기 시간 : 100초
이 중 가장 압권은 역시나 검기파(Lv3)였다.
데미지도 대폭 증가한 데다 유효거리가 40미터로 늘어났다.
오크 로드의 공간 망토 덕분에 10미터가 추가되니 이제 50미터 밖에 있는 적도 검기파로 공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밖에 광혈의 의지(Lv2)는 무적 지속 시간이 4초로 증가했고, 질풍의 화살과 질풍 이동의 시전 거리도 모두 늘어났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치고 빠지면서 조금씩이라도 경험치를 얻어볼까?’
이동 거리와 시전 거리가 늘어났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
곧바로 재윤은 광혈검을 빼들고 보호막 밖으로 나갔다.
다크 엘프가 아니라 다른 보스급 괴물들을 타겟으로 잡았다.
‘검기파!’
그 중 한 녀석을 향해 검기파(Lv3)를 날렸다.
철갑 독지네 보스였는데 이미 B급 지식을 터득한 상태라 약점을 노려 쏘아냈다.
콰앙!
약점 치명타에 B급 지식 효과로 무려 11088 포인트의 막대한 데미지가 철갑 독지네의 머리에 작렬했다.
“쿠아아아아아!”
놈의 머리가 일부 깨지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재윤의 앞을 시커먼 형체의 존재가 번쩍 가로막았다.
다크 엘프 족장 파필리오!
“어리석군. 그런 식의 기습이 통할 줄 알았나, 인간?”
까마득히 멀리에 있던 파필리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재윤의 앞으로 이동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쾅쾅! 콰앙!
재윤은 광혈검을 휘둘러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검술 자체는 재윤이 조금도 밀리지 않았지만 파필리오의 검에는 정체불명의 괴력이 깃들어 있어 한 번씩 격돌할 때마다 엄청난 데미지가 밀려들어왔다.
게다가 그 사이 다크 엘프들이 포위망을 구축해 합공을 해왔다.
“죽어라, 어리석은 인간 놈!”
“끝장을 내주마!”
사방 어디에도 피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재윤은 그들의 공격을 무시한 채 그중 가장 약해보이는 녀석을 향해 돌진했다.
파파팟! 촥! 촤아악!
무적기인 광혈의 의지를 펼치면 4초 동안 모든 피해를 입지 않는다.
실제로 파필리오를 비롯한 다크 엘프들의 검격이 재윤의 몸에 적중했지만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버렸다.
재윤은 대략 3초 정도를 그 상태로 버티며 한놈을 집중 공격해 해치웠고, 마지막 1초가 남는 순간 질풍 이동과 바람 이동을 연이어 펼쳐 보호막으로 복귀했다.
“쿠으으윽!”
다크 엘프 하나의 가슴과 옆구리에서 피분수가 터져나오더니 그대로 쓰러질 찰나 다른 다크 엘프들이 그의 몸에 손을 대고 뭐라 주문을 외웠다.
순간 시커먼 구름이 그를 휘감더니 그는 금방 상태가 회복되어 버렸다.
‘젠장!’
저런 사기적인 회복이라니!
본래라면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 조금만 더 속도를 내면 되겠어.’
재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한놈씩 처치할 수 있다면 레벨도 올리고 적들에게 타격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무적기의 재사용 시간이었다.
다시 펼치려면 54분이 지나야 한다.
무적기 없이 돌진했다간 방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 살아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결국 54분을 꼼짝없이 보호막에서 대기하다가 나가야 한다는 뜻.
한편 파필리오의 안색은 딱딱히 굳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군. 저 따위 녀석이 어떻게 절대 방어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건가?”
그는 방금 전 재윤의 몸에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재윤이 꿈쩍도 하지 않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른 다크 엘프들의 표정에도 경악이 서려 있었다.
파필리오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놈이 절대 방어 마법을 보유하긴 했지만, 곧바로 보호막으로 도주한 걸 보면 지속 시간이 긴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모두들 보호막에서 최대한 떨어져서 대기하면 기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예, 로드.”
대략 100미터 거리를 두고 있던 괴물 군단의 포위가 500미터 정도로 멀어졌다.
파필리오의 예상대로 재윤으로서는 더더욱 치고 빠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 * *
어둡지만 시야는 투명하게 트여있는 기이한 공간.
다크 엘프 족장 파필리오는 누군가의 앞에 부복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오연한 태도로 서 있는 뇌쇄적인 마력의 여성.
그녀는 다름 아닌 상급 마족 케사르나였다.
“파필리오! 이 얼간이 놈! 그 따위 인간 놈 하나 처리하지 못할 만큼 무능하다니 실망이구나. 네놈의 부주의로 인해 암흑의 서가 사라지고 말았다.”
“요, 용서를……"
파필리오는 머리를 땅에 쿵 박았다.
케사르나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야. 마왕 데사오 님의 마력구까지 그놈의 손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그것이 파괴되는 날에는 네놈은 물론이고 나까지 그분의 손에 갈가리 찢기고 말 거야.”
파필리오가 다시 몸을 떨었다.
“반드시 놈의 손에서 회수하겠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그놈의 능력이 낮아 데사오님의 마력구를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그놈이 더 강해져 그것을 파괴하기 전에 반드시 놈을 죽여 그것을 회수해야 한다.”
“그런데 보호막 때문에 도무지 놈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자 케사르나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제물을 바쳐라.”
“제물이라 하시면?”
“잠시지만 나의 권능으로 그 성을 겁박하기 위함이다.”
“설마 강림하실 생각이십니까?”
파필리오가 깜짝 놀랐다.
케사르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운명의 룰에 의해 아직은 직접 강림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희가 적당히 제물을 바치면 환상을 통해 강림할 수 있다.”
“환상 강림으로 그놈들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죽이기란 불가능해. 하지만 성 안에 웅크리고 있던 놈들이 스스로 뛰쳐나오게 할 수는 있겠지.”
순간 파필리오의 안색이 환해졌다.
“설마 공포를 통해?”
“후훗, 네놈도 아주 미련하지는 않구나.”
“제가 무능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다시 증명할 것입니다. 제물은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인간 각성자들이 쌓아놓은 향기로운 파투스의 힘! 그거라면 매우 흡족할 것 같구나.”
“비록 암흑의 서는 사라졌지만 그간 만들어둔 빙의인간 놈들은 제법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쓸만한 놈들을 골라보겠습니다.”
“네 정성을 지켜보겠다, 파필리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케사르나 님.”
그 순간 어둑한 공간이 사라졌다.
파필리오는 다크 엘프 진영의 막사에 앉은 채로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에서 붉은 흉광이 번뜩였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라! 그놈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도 모두 죽는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갔던 모든 병력을 이쪽으로 계속 모으고 있습니다, 로드.”
“겹겹이 에워싸서 저놈들을 철저히 봉쇄해 말려죽여야 합니다, 로드.”
다크 엘프들의 말에 파필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상급 마족 케사르나 님의 강림을 위한 많은 제물을 바칠 것이다. 거대한 제단을 만들어라.”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상급 마족의 강림이라는 말에 다크 엘프들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 * *
어느덧 다크 엘프의 괴물 군단이 성을 봉쇄한지 이틀이 지났다.
그러나 재윤은 여전히 레벨을 1단계도 올리지 못했다.
파필리오를 비롯한 다크 엘프들이 재윤의 기습에 계속 대비하고 있는데다 거리도 잔뜩 벌려놓은 터라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욱 좋지 않은 건 놈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다른 곳에 분산되었던 다크 엘프의 전력이 이쪽으로 모이고 있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놈들이 괴상한 제단 같은 걸 만들고 있었는데, 그곳에 빙의괴물들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황당하게도 얼마 전 사라진 차강혁도 빙의괴물이 되어 그곳에 무릎꿇려 올려진 상태.
‘저 자는?’
재윤도 단번에 그를 알아봤다.
물론 그는 이제 차강혁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은 시체 상태로 코볼트에 의해 조종되는 빙의괴물일 뿐.
그나마도 이제 제물로 바치는 것 같았다.
‘저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부리는지 모르지만.’
왠지 심상치가 않았다.
물론 보호막이 있으니 적들이 더 몰려든다고 해도 위험할 건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는 없는 일.
재윤도 뭔가 방법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겨났다.
전투를 대비해 성의 광장 벤치에 앉아 인벤토리 목록을 보고 있었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흑요정 테네르의 호의
흡혈귀 루나티쿠스가 있던 던전의 끝에서 발견한 흑요정 테네르.
그녀와 동일한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그만 인형이었다.
그런데 재윤이 인벤토리에서 그 목록을 보는 순간 그것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왜 반짝이지?’
마치 저 인형이 자신을 꺼내달라고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재윤은 무심코 그것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놨다.
스스!
그 순간 인형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커지고 있지만 무게는 그대로였다.
잠시 후 흑요정 테네르와 동일한 크기로 변했는데 그때는 이미 인형이 아니었다.
재윤의 손바닥에 발을 올려놓은 그대로 특유의 권태로우면서도 도도한 눈빛으로 재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오랜만이구나, 인간.”
“어떻게 된 거지? 이 인형이 당신의 분신이라도 되는 거였나?”
이미 코인 나무 베르타가 분신을 만든 것을 본 터라 재윤은 그러려니 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손바닥에서 뛰어 사뿐히 바닥에 착지하며 대답했다.
“그대의 말대로다. 지금의 나는 흑요정 테네르가 아닌 던전 요정 넬이니까.”
"넬?"
“그래.”
“던전 요정은 또 뭐지?”
“말 그대로 던전을 관리하는 요정이 바로 나다. 그대는 이제 성주가 되었으니 나와의 거래를 통해 이곳에 던전을 만들 수 있단다."
“성에 던전을 만들어?”
넬이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내 본신이 있던 장소에 깃들어진 기억을 이용해 이곳에 그곳과 동일한 형태의 던전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걸 만드는 이유는? 설마?”
재윤은 문득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루나티쿠스의 던전을 이곳에 만들 수 있다는 건가? 던전 리셋이 가능한?”
순간 넬이 살짝 놀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의외로 눈치가 빠르구나.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네.”
“아니야. 내가 짐작한 건 거기 뿐이다. 설명이 필요해.”
그러자 그녀는 특유의 도도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설명해주마. 그런데 입이 좀 심심하구나.”
단 것을 달라는 것 같았다.
재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라.”
초코바를 하나 건네자 넬은 흡족한 듯 그것을 곧바로 씹으며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