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속박에서 자유를 (2) >
코인 나무 베르타는 재윤에게 32,000코인이라는 막대한 액수를 빌려 부서진 성을 완전히 복구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재윤을 향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하루 일당 10코인의 재윤 전용 루팅 일꾼이 되어 당장 오늘부터 대략 8년 8개월 정도를 매일 성실히 일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한숨부터 나오기 마련일 텐데 베르타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나무로 속박되어 있다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으니 신이 나긴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강재윤 그대는 이제 이 성의 주인이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대가 이미 인간들이 만든 이곳 공동체의 대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성이 그대를 주인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전 내가 마기로 폭주해서 성을 완전히 박살내려할 때 그대가 나서서 나를 쓰러뜨렸지. 그로인해 성이 그대를 주인으로 인정한 게 분명해.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 전에 그대가 히드라의 재앙을 물리친 것과 그간 이 성에서 벌인 여러 활약 등을 성이 주시하고 있었겠지.”
재윤은 황당했다.
“어떻게 성이 날 주인이라 인정한 걸 알 수있지?”
“이 성에 나도 그대의 허락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 생겨난 것도 그렇고, 코인 상점에 성주 전용 목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성주 전용 목록?”
“그건 코인 상점을 이용해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어차피 난 이곳을 떠날 텐데 별 의미없는 일이군.”
“인간들이 누구를 대표로 할지라도 그건 성의 주인과는 별개의 일일 뿐, 성은 오직 그대만을 주인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대가 이곳을 떠날지라도 말이야.”
베르타는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나는 그대의 아공간에서 쉬고 있을 테니 아이템 루팅이 필요하거나 혹은 코인 상점을 이용하고 싶다면 언제든 불러라.”
“이름을 부르면 되는 건가?”
“어차피 그대가 전투를 시작하면 난 알아서 나와 아이템을 주울 테니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성의 코인 상점은 나의 분신이 알아서 할 테니 잘 활용하도록 해라.”
그 말과 함께 베르타는 앞에서 그냥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벌써 분신을 만들었나?’
그러고 보니 광장 근처에 못보던 커다란 건물이 하나 보였다.
건물의 간판에는 반짝이는 화려한 글자로 [코인 상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웬 녹색 머리의 예쁘장한 소녀가 바쁘게 각종 물품들을 진열 중이었다.
“앗, 손님이! 아, 당신은? 강재윤 님이시군요.”
“넌 누구지?”
그러자 소녀는 생긋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리아라고 해요. 베르타 님의 분신으로 오늘부터 이 성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러니까 네가 베르타의 분신이라고?”
“네."
“아무리 봐도 나무 인간처럼은 안 보이는데?”
“인간들 사이에서 너무 이질적으로 보이면 안되니 변신했어요. 불편하시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까요?”
“아니야. 보기 좋다.”
“뭐든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물론 코인은 갖고 계셔야겠죠.”
세리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다시 물품들을 진열하기 시작했다.
“인간 각성자들이 자주 구매하던 물품들 위주로 미리 매장에 진열해두고 있어요. 고르는 재미도 쇼핑의 즐거움 중 하나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매장에는 갖가지 종류의 의복과 식품, 생필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작은 규모의 마트를 보는 느낌이었다.
각 물품마다 그것의 코인 가격이 붙어 있어 각성자들이 마치 쇼핑하듯 들어와 물건을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쪽에는 시설 관련 책자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성안의 각종 저택이나 경계탑, 성의 보수와 관련된 비용들이 상세히 적혀 있는 책자였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놀랍네.”
“베르타 님이 코인 나무로만 존재했을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한계를 돌파해서 가능해졌죠. 저와 같은 분신을 만들 수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세리아는 무척이나 친절했다.
"참, 이 성의 방어에 관련해 새롭게 생겨난 목록들이 있는데 보실래요?”
“뭐가 있는데?”
그러자 세리아가 재윤 앞에 하나의 창을 띄웠다.
【수성 용병 부대 고용: 스켈레톤 부대】
-제한 : 성주 전용
-스켈레톤에 대한 지식 등급이 높을수록 비용이 대폭 절감.
-고용된 스켈레톤 부대는 자동 방어 명령을 내릴 경우 적이 성을 공격시 자동 소환되어 적과 전투를 벌임.
“수성 용병 부대?”
“네. 당신은 이곳 성의 성주이시니 수성 용병 부대를 고용할 수 있어요. 이 성에는 현재 여건 상 스켈레톤부대만 고용가능하답니다."
“밤에 나타나는 그 스켈레톤 놈들을 내가 고용해서 부릴 수 있다는 거야?”
“자동 방어 명령을 내려놓으시면 적 침입시 자동 소환되어 성을 방어하게 되죠.”
그 순간 재윤의 앞에 스켈레톤 용병들의 리스트가 떴다.
【스켈레톤 용병 부대】
-지식 등급 A 특전 : 1000코인/월
-구성 : 백부장 1, 십부장 10, 병사 100
-전투 중 파괴된 스켈레톤 병력은 하루가 지나면 자동 복원
1000코인을 내면 스켈레톤 부대를 한 달 동안 고용 가능하다는 것.
그 중에는 스켈레톤 백부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작 1000코인으로 스켈레톤 111마리를 한 달 동안 부려먹을 수 있다면 사실상 거저라 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코인이 있다고 아무데서나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것은 이곳이 파투스 성이기 때문이에요.”
“파투스 성?”
“신비한 파투스의 기운이 이 성 전체에 흐르고 있죠.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코인이 있다고 해도 건물을 짓거나 하는 건 불가능해요.”
하긴 이 성에 있으면 파투스가 저절로 회복된다.
이것은 코인을 투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이 성이 그런 곳이었다는 뜻.
“그리고 성 관리소에 가보시면 이곳 상점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어요.”
“성 관리소?”
“당신이 성주님이 되심과 동시에 내성에 새로 생겨났죠. 거긴 오직 당신만 접근할수 있을 걸요. 아주 특별한 일을 할수 있으니까요.”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건 베르타 님께 여쭤보는 게……아, 그러고 보니 베르타 님이 아는 건 저도 거의 아는 거라서. 그 분도 모르시겠군요.”
“그럼 내가 가봐야겠다.”
재윤은 코인 상점을 나왔다.
그러자 그 사이 채시은을 비롯한 공동체의 일원들이 광장 쪽으로 몰려오며 환호하고 있었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거대한 나무를 쓰러뜨리다니 대단하세요!”
“저희들은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모두들 성이 부서져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복구된 것이 신기한 듯했다.
“대표님, 그런데 저 상점은 어떻게 생겨난 거죠?”
채시은이 다가와 물었다. 그 뒤로 다른 각성자들도 다들 궁금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재윤은 미소 지었다.
“코인 나무가 스스로를 강화하며 만들어낸 분신이 있는 곳이죠. 각성자들이라면 안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이용하면 됩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도 한 번 들어가볼게요.”
채시은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코인 상점에 들어갔다.
다른 각성자들도 그 뒤를 따라갔다.
꽤 큰 건물이라 수십 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별로 좁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사이 재윤은 내성 쪽으로 향했다.
이 성의 내성은 사실 그저 상징적인 구조물이었다.
크기도 매우 작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저택에는 현대식 시설이 갖춰 있지 않아 그간 그곳들은 비각성자들이라 해도 거주하지 않았다.
내성 밖 주거지역에 현대식 시설이 갖춰진 좋은 주택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성자들이 내성 지하 코인 나무를 이용할 때만 들어오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갑자기 신비한 보라색의 안개가 피어나 내성을 휘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는 내성에 무엇이 있는지도 볼 수 없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경비대장 최진석이 재윤을 향해 말했다.
“웬 일인지 저 안으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안개에 알 수 없는 막같은 게 존재해 들어가려고 해도 밀어내는군요.”
“저도 그것 때문에 살펴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재윤은 아무런 저지없이 안개를 통과했다.
‘보호막인가?’
안전 지대 보호막처럼 허용된 대상만 진입이 가능한 건 확실했다.
‘건물이 바뀌었네.’
내성문을 통과하자 그 안에는 허름해보이는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본래는 이곳에 잡다한 건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진 상태였다.
‘저게 성 관리소인가 보군.’
재윤은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봤다.
그런데 그곳 또한 뭔가 이상했다.
텅 빈 공간.
그 안에 신비한 푸른빛을 발산하는 큼직한 정팔면체가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오셨군요, 성주님.”
그 정팔면체로부터 나는 음성이었다.
차분하면서도 맑은 소녀의 목소리.
“저는 운명의 룰에 의해 탄생한 이 성 자체이자 동시에 관리자이기도 한 오르도예요.”
“성의 관리자?”
“네."
“왜 날 주인으로 선택한 거지?”
“당신이 처음 이곳에 오는 순간부터 쭉 지켜봤어요. 히드라의 재앙을 해결하고, 인간들의 공동체를 도와주고, 사악한 이들을 단호하게 심판하는 것 모두 지켜봤죠. 또한 마기에 폭주해 정신 줄을 놓아버린 얼간이 녀석을 혼내주는 것도요. 그리고 이제는 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판단했어요.”
정팔면체 오르도는 강렬한 빛을 냈다.
그러나 재윤은 그 빛이 조금도 눈부시지 않았다.
그 빛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너의 주인이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저는 당신을 지키는 불멸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어요.”
“불멸의 방패?”
“제 곁에 있는 한 당신은 절대 죽지 않으니까요.”
“죽지 않는다?”
“이곳은 절대 안전한 장소랍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멸망할 경우에는 저 또한 소멸되어 버리겠죠.”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
“따라서 당신은 이 세상을 멸망으로 이끄는 재앙들과 맞서 싸우셔야 해요.”
“대체 어떤 재앙들을 말하는 거지?”
“그건 저로서는 알지 못해요. 당신이 앞으로 하나씩 찾아서 제거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뒤에서 당신을 도울 수 있을 뿐이에요.”
오르도가 다시 강렬한 광채를 발했다.
“그 모든 재앙을 물리치면 당신은 이 뒤바뀐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 되시는 거죠.”
“난 그런 것 관심없어. 부모님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 나침반이 부모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이곳을 가리켰지. 혹시 그게 너 때문인가?”
“그렇다면 역시 운명의 힘이 당신을 저에게로 이끌었던 것이군요.”
오르도는 말을 이었다.
“재앙을 몰고 오는 괴물들을 모두 물리치지 않는 한 당신은 누구든 완전히 지킬 수 없어요. 당신이 찾고 또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진정으로 지키는 방법은 강해져서 재앙을 소멸시키는 방법 뿐입니다. 그리고 그건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어째서 나지? 나 말고도 각성자들은 많을 텐데.”
“불멸의 방패인 저의 주인은 당신 뿐이니까요.”
재윤은 다시 물었다.
“계속 불멸의 방패라고 하는데 너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가?”
“때마침 저의 능력을 보여드릴 만한 상황이 왔군요.”
그 순간 오르도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텅 빈 공간 안에 성의 모습이 축소되어 나타났다.
그림이 아니었다.
마치 CCTV로 보듯 실시간의 상황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성의 외부도 다 보였다.
안개로 가려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먼 곳까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성을 향해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빙의괴물들도 있었지만, 히드라와 철갑 독지네를 비롯한 각종 괴물들이 수두룩했다.
곳곳에 보스 급 괴물도 포진해 있었다.
재윤이 이미 해치웠던 히드라 보스!
아직 만나보지 못했 던 철갑 독지네 보스!
그밖에 길이가 30미터도 넘는 거대 뱀들이 상공을 유영하듯 날아오고 있었다.
“뭐지? 저놈들이 작정을 한 건가?”
재윤은 기가 막혔다.
어쩐지 요며칠 잠잠하다 했다.
물론 다크 엘프들의 반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그 차원이 다른 대규모 괴물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숫자는 대충 따져봐도 수천 마리.
아무리 재윤이라도 저많은 숫자의 괴물들과 싸워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그 중 보스 급 괴물만 수십 마리는 되기 때문이다.
“서둘러야겠어요. 어서 성주님의 손을 저에게로 대주세요.”
재윤은 정팔면체인 오르도의 몸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재윤의 귀에 알림이 들려왔다.
[오르도가 성을 두르는 보호막을 생성시키려합니다.]
[성주인 당신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허락 시 1000코인이 소모되며 보호막은 현재 당신의 레벨에 한 시간을 곱한 만큼 지속됩니다.]
재윤의 레벨은 38.
그럼 1000코인을 들이면 38시간 동안 지속되는 보호막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뜻.
“성주님! 어서 허락을! 적들이 지척까지 왔어요.”
“허락한다.”
재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1000코인이 소모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코인 잔액은 80,218입니다.]
[성에 보호막이 생성되었습니다.]
[지속 시간 : 38시간]
그 순간 성 주위를 투명한 푸른 빛의 보호막이 둘러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