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전술 파악의 위력 (1)
거대 크로거는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계속 쫓아왔다.
적당히 쫒아오다가 포기할 줄 알았는데 놈은 집요했다.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찢는 듯 섬뜩하게 들려왔다.
마치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올 기세였다.
[당신과 다른 파티원들과의 거리가 너무 멉니다.]
[파티에서 자동 탈퇴되었습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파티가 그냥 풀리는가 보군.’
재윤은 뛰는 속도를 높였다.
‘대충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만 저놈을 따돌리자.’
아무리 민첩을 올려 속도가 높아졌다고 해도 괴물에게 쫓기는 와중에 일일이 방향을 확인하며 뛰는 건 쉽지 않았다.
시야가 넓게 트여있다면 산이나 건물 같은 지형을 기준으로 두고 쉽게 기억할 수 있지만, 사방은 숲이고 짙은 안개로 인해 시야 거리는 100여 미터 정도로 제한된 상태.
이러다 자칫 방향이라도 잃어버리면 안전 지대 혜미로 복귀하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더 이상 가다간 오늘 안에 복귀가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밤을 안전 지대가 아닌 곳에서 보내게 되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없게 된다.
소진된 파투스도 회복하기 어려울 테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재윤이 속도를 높이는 순간이었다.
스스-
갑자기 지면 위에 붉은 빛의 장판이 생겨났다.
반경 20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원형의 붉은 장판.
재윤은 그 한 가운데 있었다.
‘저 빛은 뭐지? 갑자기 왜 이런 게 보이는 거야?’
그 순간 다급한 알림이 귀를 울렸다.
[크로거 군장 아르툼이 분노의 대지 강타를 시전합니다.]
[붉은 빛의 범위에서 빨리 벗어나세요.]
갑자기 이게 웬 소리인가 싶었지만, 재윤은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은 저게 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빨리 붉은 빛 장판 밖으로 나가는 게 중요했으니까.
왠지 불안한 마음에 전력을 다해 뛰는 것은 물론이고 바람 이동까지 펼쳐 장판 밖으로 이동했다.
“쿠우우우어어어어!”
그때 거대 크로거가 크게 포효를 지르더니 마치 날 듯 공중으로 도약했다가 지면으로 착지했다.
7미터도 넘는 초대형 괴수의 거대한 동체가 공중으로 뛰었다가 떨어져내리는 모습은 재윤도 보지 않았다면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콰아아아앙!
놈은 정확히 붉은 장판이 있는 지점에 착지했다.
동시에 놈을 중심으로 일정 반경이 초토화되었다.
땅이 움푹 파이며 충격파가 파동처럼 퍼져나가 반경 안의 나무와 풀들이 모조리 뽑혀 나갔다.
놀랍게도 그 초토화된 반경이 딱 붉은 장판이 생겨났던 부분과 일치했다.
‘으!’
재윤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방금 전 알림을 듣고 본능적으로 전력을 다해 붉은 장판 밖으로 벗어나 무사할 수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어서 저 충격파에 휘말렸으면 지금쯤 그의 몸은 처참히 찢겨져 버렸을 것이다.
‘진짜 무식한 공격이네!’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윤은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거대 크로거는 지면 강타를 펼치고도 재윤을 죽이지 못하자 더욱 분노한 듯 콧김을 내뿜으며 쫓아왔다.
‘저건 정말 차원이 다른 놈이야.’
광범위 영역을 초토화시키는 무식한 공격력!
진정한 보스급 괴물이었다.
심지어 이름도 있었다.
크로거 군장 아르툼!
이놈에 비하면 아까 죽인 4미터 크로거는 보스급 괴물이라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 붉은 장판이 아니었으면 난 꼼짝없이 죽었을 텐데, 왜 갑자기 그게 나타난 거지?’
덕분에 살아나긴 했지만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전술 파악이 이걸 의미하는 거 아닐까?’
크로거의 지식 등급이 A로 상승하며 새로 나타난 효과 중 하나.
-크로거의 전술 파악 1단계
그렇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방금 전 크로거 군장 아르툼이 펼친 분노의 대지 강타라는 필살기를 재윤은 미리 파악하고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로거 군장 아르툼이 분노의 대지 강타를 시전합니다.]
그때 다시 들려오는 알림.
동시에 재윤의 발 아래 다시 붉은 빛 장판이 생겨났다.
‘또야?’
재윤은 전력을 다해 붉은 장판을 벗어났다.
“쿠우우우우어어어어!”
그 즉시 아르툼이 도약했다가 착지했다.
콰아아아앙!
장판이 생겨났던 영역이 초토화되었다.
재윤은 이미 한 번 겪었던 터라 이번에는 놈이 착지 상태에서 잠시 주춤하고 있는 틈을 타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들려오는 급박한 알림.
[크로거 군장 아르툼이 분노의 폭풍 질주를 시전합니다.]
[붉은 빛의 범위에서 빨리 벗어나세요.]
‘폭풍 질주?’
이번에는 원형 장판이 아니었다.
붉은 빛이 일직선으로 길죽하게 바닥에 형성되어 있었다.
마치 폭 3미터 길이 50미터 정도의 붉은 색 카페트가 바닥에 쫙 펼쳐져 있는 듯했다.
‘젠장!’
재윤은 잽싸게 옆으로 이동해 그 영역에서 벗어났다.
쿵쿵쿵! 콰콰콰쾅!
그 순간 아르툼이 마치 질풍처럼 그 영역을 주파했다.
붉은 장판의 끝에서 끝으로 순식간에 이동한 것이다.
역시나 놈이 지나간 공간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 앞에 있던 나무뿐 아니라 바위도 박살났다.
재윤이 조금이라도 늦게 피했다면 이미 시체로 변해있을 터였다.
‘도무지 답이 안나오네.’
아르툼이 앞쪽으로 이동해 있는 상태라 재윤은 방향을 틀어 달렸다.
그러자 잠시 후 다시 대지 강타가 펼쳐졌다.
재윤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학습 효과로 인해 그 사이 장판을 피하는 것도 요령이 생겼으니까.
굳이 파투스가 소모되는 바람 이동을 펼치지 않아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아무리 거리를 벌려놔도 아르툼에게 금세 따라잡힌다.
놈은 대지 강타나 폭풍 질주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물론 재윤이 잘 피하고는 있지만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는 순간 그 즉시 죽게 될 것이다.
재윤은 그렇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나도 공격한다.’
도주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면 싸우는 수밖에!
그 사이 살펴본 바 놈이 필살기를 펼치고 나면 잠시 그 상태로 경직되듯 멈춰 있었다.
그때를 노려 한 방씩 치고 빠지면 된다.
물론 근접해서 골프 스틱을 휘두르는 짓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바람의 화살을 날리고 거리를 벌린다.
최소한 20미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야 놈이 어떻게 나오든 대응할 수 있으니까.
바람의 화살(Lv6)은 이제 25초에 한 번 쓸 수 있고, 유효 거리는 6미터.
재윤은 도주하며 아르툼이 필살기를 펼칠 때를 기다렸다.
“쿠우우우어어어어!”
그때 놈이 크게 포효했다.
[크로거 군장 아르툼이 분노의 대지 강타를 시전합니다.]
‘지금이다.’
재윤은 지면에 생겨난 붉은 빛 장판 밖으로 잽싸게 피했다.
콰아아앙!
지면이 초토화되는 순간 아르툼은 착지한 자세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재윤은 충격의 여파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 잽싸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바람의 화살!”
약점 부위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데다 잽싸게 치고 빠져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정확히 약점을 타격하기란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간 이런 타이밍을 맞추는 연습을 꾸준히 해온 것이 위력을 발휘했다.
“죽어라, 이 괴물!”
푸확!
화살이 날아가 아르툼의 오른쪽 가슴팍에 작렬했다.
강철처럼 단단해보이던 놈의 가죽이 터지며 피가 튀었다.
그러나 놈은 가벼운 신음조차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사이 재윤은 이미 20미터 밖으로 이동한 후였다.
놈이 대지 강타나 폭풍 질주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펼치지만 않는다면 재윤은 절대 따라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뛰는 속도는 그가 더 빠르니까.
[크로거 군장 아르툼이 분노의 폭풍 질주를 시전합니다.]
그 즉시 폭풍 질주 장판이 길게 깔렸다.
처음에나 당황했지 오히려 이것이 대지 강타보다 피하기 쉬웠다.
재윤은 측면으로 잽싸게 빠졌다.
쿵쿵쿵! 콰콰콰쾅!
그 순간 놈이 50미터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하며 그 앞에 있던 것들을 박살냈다.
재윤으로서는 오히려 고마웠다.
놈이 그렇게 알아서 멀리 거리를 벌려주니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력】 62/100
그러고 보니 생명력이 꽤 하락한 상태다.
필살기의 반경에서 벗어났다해도 숲을 이동하다보니 여기저기 부딪히며 깨진 상처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력질주를 많이 하다보니 체력 소모가 큰 탓도 있었다.
벌컥!
다행히 앞 주머니에 넣어둔 최하급 생명력 물약 하나를 마시자 생명력은 금세 최대치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체력이 회복되자 자신감도 솟아올랐다.
“어디 해보자, 괴물.”
누가 이기나.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다.
【파투스】 31/35
바람 이동을 펼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앞으로 남은 바람의 화살은 31방.
여기에 10포인트의 파투스를 회복할 수 있는 회복 물약이 있으니 도합 41방을 날릴 수 있다.
저 괴물이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고 해도 설마 그 정도 데미지를 버텨낼 수 있을까?
“쿠우우우우어어어어!”
그렇게 재윤이 전의를 드러내자 아르툼은 가소롭다는 듯 크게 포효를 날리며 달려왔다.
지금처럼 놈이 필살기를 펼치지 않고 달려오면 한동안 미친 듯 도주해야 한다.
재윤의 민첩이 아무리 높아졌다 해도 놈과 근거리에서 싸우는 건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놈이 필살기를 펼치면 그때가 바로 반격의 기회!
따라서 재윤은 서두르지 않았다.
저 놈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 동안 재윤은 계속 도주했고, 기회를 노려 계속 바람의 화살을 날렸다.
【파투스】 12/35
파투스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물약도 이미 소모한 상태라 앞으로 12방 내에 놈을 죽이지 못하면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르툼은 건재했다.
‘역시 아직 내 능력으로는 무리인 건가? 정말 지긋지긋한 놈이다.’
재윤은 치를 떨었다.
어느덧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안개가 더욱 짙어져 시야 거리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러다 캄캄해지면 아르툼을 상대하는 건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날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아르툼이 추격을 포기하고 멈춰선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재윤이 한참을 뛰고 나서였다.
“쿠우우우우어어어어!”
놈이 분한 듯 포효를 날렸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히 먼 곳이었다.
더 이상 쫓아오지 않고 소리만 질러대다 그조차도 나중에는 조용해졌다.
‘왜 포기한 거지?’
그렇게 죽자사자 쫓아오던 괴물이 추격을 포기하자 일단은 안심이긴 했지만 한편으로 의문이 들었다.
‘혹시 어두워져서 그런 건가?’
왠지 그런 듯했다.
하긴 그간 다른 크로거들도 밤에는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재윤이 밤에 좀비들과 마주친 적은 있어도 크로거와 마주친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것은 크로거들이 어둠에 약하다는 뜻.
종족 특성이라면 크로거 군장인 아르툼도 마찬가지이리라.
재윤은 그래도 혹시나 싶어 계속 놈과의 거리를 벌린 후 멈춰섰다.
이미 사방은 어둑해졌고 시야 거리는 수십 미터 이내로 줄었다.
놈이 쫓아온다면 지면이 울리는 소리가 들릴 텐데 조용한 걸 보니 정말로 포기한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살았구나. 정말 징그러운 놈이었어.’
근처의 바위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마신 후 주먹밥을 꺼내 씹었다.
이정숙이 챙겨준 도시락이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네.’
재윤은 아르툼에게 쫓기다보니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밤이 아니라 낮이라 해도 안전 지대 혜미가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더 캄캄해지기 전에 밤을 보낼 만한 곳을 찾아야겠다.’
이럴 때를 대비해 해드랜턴을 챙겨오기 잘한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재윤은 양 손가락에 착용한 반지들 덕분에 어둠 저항이 늘어나 밤에도 근거리 시야는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날이 완전히 캄캄해지자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위협이 생겨났다.
‘저 놈들은?’
다름아닌 좀비들이었다.
땅 속에서 시체들이 쑥쑥 솟아오르더니 좀비가 되어 접근해오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어.’
재윤은 오히려 반색했다.
좀비들을 해치우는데는 파투스를 굳이 소모할 필요없다.
골프 스틱으로도 충분하니까.
게다가 좀비 토벌 임무도 받아둔 상태이니 잘하면 레벨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