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또 다른 생존자들 (2)
“으윽! 일단 저 건물로 피해, 박 대리.”
30대 남자 윤현성이 다급히 건물 입구 쪽으로 뛰며 외쳤다.
20대 여자 박은빛은 지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은 가까스로 건물 입구로 들어섰고 곧바로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쿠우우오오오!”
그러자 거대 크로거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거칠게 포효만 날려댔다.
그 사이 3층 중간 계단까지 오른 윤현성이 숨을 헉헉거리며 벽에 기대섰다.
“으으! 화염 불꽃을 맞고도 멀쩡하다니! 진짜 괴물이 따로 없군.”
“윤 과장님, 우리 이제 어쩌죠? 꼼짝없이 건물에 갇힌 것 같은데.”
거대 크로거는 4미터가 넘는 신장을 가진 터라 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억지로 들어온다고 해도 비좁아서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
물론 무식한 괴력으로 건물의 벽을 후려쳐 무너뜨리기라도 한다면 답이 없겠지만 말이다.
“쿠아아아!”
“쿠오오오!”
그런데 그때 사방에서 괴물들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 크로거의 소리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맹수처럼 사나운 기세가 느껴졌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미친! 크로거들이에요.”
계단 옆의 창문으로 밖을 쳐다본 박은빛은 기겁했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거대 크로거의 주위로 10여 마리가 넘는 크로거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으, 저놈이 대장이었어. 부하들을 부른 게 분명해.”
윤현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거대 크로거와 달리 보통의 크로거는 건물 안에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단순히 들어오는 정도가 아니었다.
건물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죽이는 데 매우 능숙한 녀석들인 것이다.
“크크큭! 우린 끝났어. 하긴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었지.”
박은빛이 4층으로 향하며 외쳤다.
“뭐하고 계세요? 여기 있다간 죽어요. 일단 옥상으로 피해요.”
“소용없어. 거기 간다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냥 여기서 죽자, 씨발!”
“죽자고요?”
“어차피 지금 있는 파투스로는 저놈들 다 못잡아. 끽 해야 두세 마리라고.”
“그래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봐야잖아요. 어떻게든 버티면 안전 지대에 있는 다른 각성자들이 우릴 도우러 올 수도 있어요.”
“거기 있는 각성자들 다 온다고 해도 저 괴물 놈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큭! 발악이고 뭐고 지금은 살아있는 게 악몽이야. 혹시 알아? 죽으면 이 악몽같은 현실이 아닌 본래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될지.”
바닥에 주저앉은 윤현성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얼굴이었다.
“크르르르!”
“쿠아아아!”
쿵쿵쿵!
바로 그때 크로거들이 1층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뛰어오는 소리가 났다.
“윤 과장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혀도 와이프랑 딸 찾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정말 여기서 포기하실 건가요? 딸을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드실 생각이에요?”
그 말을 듣자 윤현성이 움찔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이라 잠시 삶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아내와 딸을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박 대리 말이 맞아. 발악이라도 해봐야지. 발악이라도.”
그래봤자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보였지만, 최후의 발악조차 하지 않고 삶을 포기한다면 죽어서도 아내와 딸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윤현성과 박은빛은 옥상까지 뛰어올라갔다.
그러다 그곳에 두 명의 남자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아앗!”
“당신들은?”
그러자 이민철이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이민철이라고 합니다. 운빨이 아주 좋으신 분들이네요, 하하.”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운빨이 좋다니요?”
박은빛이 물었다.
아래에서 크로거들이 쫓아올라오고 있는데 운빨이 좋다고 하니 황당했던 것이다.
이민철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릴 만난 이상 살아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는 뜻이죠. 저 밑에 있는 큰 괴물 놈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로 올라오는 크로거 놈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을 하는 이민철의 눈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민철의 기세는 장난이 아니었다.
1미터 90센티가 넘는 거구에 전신에서 피어나는 강철같은 기운.
윤현성과 박은빛은 한 눈에 그가 각성자임을 알아봤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 말이다.
‘어쩌면 살아날 수도 있는 건가?’
‘이 남자 정말 강해보여!’
윤현성과 박은빛은 마치 어둠 속의 빛을 본 느낌이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윤현성이라고 합니다.”
“박은빛이에요. 그런데 저 분은?”
박은빛이 옥상 난간 쪽에 선채로 아래를 살피고 있는 재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이민철이 즉시 대답했다.
“저 녀석은 강재윤이라고 최강의 괴물 사냥꾼이죠. 재윤이 있는 한 크로거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최강의 괴물 사냥꾼이라니!
윤현성 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보기에 재윤은 꽤 건장한 체격의 청년같긴 했지만, 이민철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볼 때 약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옥상 난간에서 거대 크로거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재윤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재윤입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각성자일 뿐 최강의 괴물 사냥꾼 이런 거 아닙니다.”
“하하, 예. 그러시군요. 저는 윤현성입니다.”
“아, 네. 저는 박은빛이에요.”
“이렇게 살아계신 분들을 보니 반갑군요. 지금은 길게 인사할 시간이 없으니 이따가 다시 얘기해요.”
사실 재윤은 윤현성과 박은빛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들 자체가 반가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말고 또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안전 지대 혜미에 있는 이들 빼고 다 죽은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
그 말은 곧 또 다른 사람들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부모님 역시 그 중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재윤은 지금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크로거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반색하고 있었다.
덕분에 크로거 토벌 임무가 완수될 수 있을 테니까.
【크로거 토벌(C)】
-임무 수행중 : 48/60
앞으로 12마리만 더 죽이면 700코인과 대량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거기에 하급 운명의 상자라는 것도.
과연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경험치가 더욱 절실했다.
레벨이 16에서 정체되어 있는 지금, 레벨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저 아래 있는 거대 크로거는 오늘 처음보는 괴물이다 보니 섣불리 이길 수 있다고 낙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주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재윤의 눈에 놈의 약점 부위가 보였으니까.
하긴 덩치만 클 뿐 놈도 크로거인 이상 약점이 보이는 건 당연하리라.
‘그런데 약점 부위가 불규칙한 패턴을 그리며 이동하고 있어.’
재윤이 잔뜩 긴장한 채로 거대 크로거를 살피고 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보통의 크로거와 달리 거대 크로거는 약점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위치가 빠르게 변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 약점을 타격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그놈을 상대하는 건 잠시 후의 일이고 일단 지금은 건물에 난입한 크로거들부터 해치우기로 했다.
‘잘됐어. 승산을 높이려면 레벨을 하나라도 더 올려야지.’
이민철도 같은 생각인 듯 망치를 쥔 채 옥상 출입구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재윤아! 크로거들 거의 다 올라왔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크로거 하나가 출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쿠아아아!”
회색 빛 악어 형상의 머리에 시뻘겋게 번뜩이는 두 눈.
놈은 마치 악마처럼 흉악한 기세를 뿜어냈지만 옥상으로 몇 걸음 발을 딛기도 전에 머리 일부가 터졌다.
콰직!
재윤이 번개처럼 달려가 골프 스틱으로 후려친 것이다.
“꾸으으윽!”
약점을 강타당하는 순간 높은 확률로 스턴 효과가 발동!
크로거는 비틀거린 채 스턴에 빠져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휭! 퍼억!
다시 날아간 골프 스틱의 헤드가 크로거의 머리를 박살냈다.
크로거는 그대로 널브러졌다.
“아니, 어떻게 저런?”
“맙소사!”
그 모습을 보고 윤현성과 박은빛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능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그저 골프 스틱을 두 번 후려쳐 크로거 하나를 쓰러뜨리다니!
각성자인 그들은 저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각성 능력이 아니면 아무리 강한 힘도 소용없다.
실제로 윤현성은 경찰들이 크로거를 상대한 것도 지켜봤다.
일단 권총이나 소총과 같은 화기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일부는 대검을 휘두르며 덤볐지만 크로거들의 가죽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크로거들에게 일방적으로 죽임을 당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재윤이라는 청년은 골프 스틱만을 휘둘러 크로거들을 아주 가볍게 처치하고 있었다.
휭휭! 퍽! 파악! 콰직!
“꾸어어억!”
“꿰에엑!”
뒤이어 옥상 출입구로 들어온 크로거들도 연거푸 쓰러졌다.
크로거들이 마치 한 줄로 들어와 맞아죽는 것처럼 보였다.
골프 스틱을 휘두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윤현성 등의 눈으로는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싸! 재윤아, 나 레벨 올랐다! 레벨 10이야.”
“오! 축하해, 형.”
“그리고 드디어 크로거 E급 지식도 얻었다. 나 이제 크로거 토벌퀘 할 수 있어!”
이민철의 레벨이 Lv10으로!
거기에 크로거 지식 등급 상승까지!
그는 좀비의 경우 E등급 지식을 얻어 토벌 임무를 받을 수 있었지만 크로거 지식은 F에서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크로거 E급 지식을 얻은 것이다.
재윤이 E급 토벌 임무서는 몰아서 주었기에 이민철에게는 크로거 E급 토벌서만 3장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가방에 챙겨온 터라 즉시 한 장을 꺼내 임무를 받았다.
“흐흐, 이제 광렙만 남은 건가? 토벨퀘로 11렙 가즈아!”
“하하, 형! 게임 용어는 좀!”
재윤은 왠지 쪽팔렸다.
이민철이 덩치는 크지만 상당히 오덕오덕한 구석이 많은 편인데, 이럴 때 옆에 있으면 같은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윤현성과 박은빛에게는 전혀 그렇게 비추어지지 않았다.
크로거들을 장난처럼 때려눕히는 재윤과 이민철의 모습이 너무 멋지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저 사람들 정말 대단하군.”
“세상에! 저 분은 레벨이 10이래요!”
“어쩐지. 크로거들이 꼼짝도 못한다 했어.”
윤현성은 레벨 4, 박은빛은 레벨 3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민철이 레벨 10을 달성했다는 말은 엄청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잠깐! 우리도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 한손이라도 거들어야지.”
윤현성이 즉시 손에서 화염 불꽃을 생성시켜 쏘아내 크로거 하나를 공격했다.
화르르!
그 크로거는 이미 재윤의 골프 스틱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스턴에 빠져 있었는데, 화염 불꽃이 적중하자 그대로 쓰러져죽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렇게 크로거가 죽자 윤현성은 레벨이 올랐다.
그의 레벨은 4였는데, 5레벨을 위한 경험치가 거의 다 차 있었던 것이다.
“오! 레벨 올랐어. 하하, 나 이제 레벨 5다.”
“와! 축하해요, 윤 과장님.”
그들이 그렇게 환호하는 사이 재윤과 이민철은 옥상으로 몰려온 크로거들을 모두 해치웠다.
덕분에 재윤도 수행 중이었던 크로거 토벌 임무(C)를 완수할 수 있었다.
【크로거 토벌(C)】
-임무 수행 중 : 60/60(완료)
[당신은 임무 【크로거 토벌(C)】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임무 보상으로 700코인을 얻었습니다.]
[임무 보상으로 하급 운명의 상자를 얻었습니다.]
[임무 보상으로 대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로써 재윤은 레벨이 한 단계 상승해 Lv 17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