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안전 지대 (2)
“여기 괴물 피 가져왔어요!”
한지성은 붉은 혈액이 가득 들어 있는 피트 병을 들어 보였다.
그의 어머니 이정숙이 반색했다.
“어떻게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었니?”
“그냥 골프 스틱으로 한 대 치니 죽던데요?”
그러자 이정숙 옆에 있던 한혜미가 코웃음 쳤다.
“뻥 치시네. 위에서 다 보였거든.”
“뭘 봤다는 거야?”
“아빠하고 오빠하고 골프 스틱을 아무리 휘둘러도 그놈이 안죽었잖아.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죽이는 거 내가 다 봤다고.”
한지성이 뜨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개 때문에 안 보였을 텐데 보긴 뭘 봤다고 그러냐?”
“나 안전 지대 관리자라서 시야가 넓은 거 몰라?”
이정숙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한지성을 쳐다봤다.
“어쩐지. 누가 와서 도와준 거구나?”
한지성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민철이 형하고 아는 사람이래요. 화살을 소환해 괴물을 한 방에 잡던데요?”
이정숙의 눈이 커졌다.
“잘됐구나. 그런 사람이 함께 있으면 제작에 도움이 될 거야. 괴물의 피를 많이 구해야 파투스 장비를 많이 만들 수 있어.”
그러자 한태진이 들어오며 물었다.
“괴물 피는 거기 한 병 가득 가져왔는데 또 필요하다는 거요?”
“많을수록 좋죠. 한 병으로 한 개 밖에 만들 수 없어요.”
“그럼 일단 하나라도 만들어 봅시다. 그 파투스 무기라는 것만 있으면 괴물 놈들을 쉽게 죽일 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오.”
“쉽게 죽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고 피해를 줄 수 있대요. 설명 창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제조 능력 각성자인 이정숙은 그녀의 능력과 관련된 설명 창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설명 창은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라 한태진은 볼 수 없었다.
“그것 참, 왜 난 각성이라는 걸 못한 건지. 답답해 죽겠군.”
그 말에 한지성도 가슴을 쳤다.
“저도 답답해 죽겠어요, 아버지. 혜미는 안전 지대 관리자라도 됐는데 말입니다.”
그때 이정숙이 손을 흔들었다.
“다들 조용히 해봐요. 집중에 방해 돼.”
1단계 파투스 장비의 제작법은 괴물의 피만 있으면 매우 간단했다.
사실 그녀의 제작 능력이라는 것이 실제로 장비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있는 골프 스틱이나 망치와 같은 것들에 파투스의 힘이 깃들게 해주는 것으로, 일종의 연금술과 비슷한 능력이었다.
‘제작!’
그 순간.
[당신의 첫 파투스 장비 제작에 특별한 행운이 깃듭니다.]
[희귀 이상의 장비 제작 성공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피트 병에 들어있던 혈액이 검붉은 연기로 변해 골프 스틱에 스며들었다.
그로인해 은빛이던 골프 스틱이 검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장비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희귀한 크로거 골프 스틱을 얻었습니다.]
* 희귀한 크로거 골프 스틱
-등급 : 희귀(★)
-분류 : 파투스 무기
-내구도 100/100
-기본 공격력 : 1
-추가 공격력 : 근력 + 민첩
-약점 강타시 높은 확률로 대상에게 스턴 효과를 줌.
-장착 제한 : 근력 3, 민첩 8
-제작자 : 이정숙
‘아니, 이건?’
이정숙은 첫 장비 제작에 성공해 무척이나 기뻤다.
평범한 장비가 아닌 희귀한 장비!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근력 스탯이 3, 민첩 스탯이 8이 되지 않으면 이 골프 스틱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스윽.
그때 남편 한태진이 다가와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볼까?”
그러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살짝만 휘둘러 보려고 했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정숙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필 희귀 장비가 만들어져서 장착 제한이 붙었어요.”
“장착 제한?”
“각성자만 쓸 수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손에 쥘 수는 있어도 사용은 할 수 없어요.”
“미쳤군.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어디 있어?”
물건에 장착 제한이 있다는 얘기는 한태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이 골프 스틱은 바로 그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휘두르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오히려 숨만 차왔다.
그는 투덜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진짜 미친 세상이야.”
좋은 장비가 만들어졌으면 뭐하는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인 것이다.
그러던 그는 골프 스틱을 막 거실로 들어온 이민철에게 건넸다.
“받아. 이건 각성자만 쓸 수 있다고 하니 어디 자네가 한 번 휘둘러봐.”
그러나 그것을 받아쥔 이민철 역시 울상을 지었다.
드디어 무기가 생겼다고 좋아했지만 무슨 짓을 해도 휘둘러지지 않았다.
“으! 안 되네요. 손에 힘이 안 들어가요.”
이정숙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 근력과 민첩이 몇이지?”
“근력 7에 민첩 2인데요.”
“근력은 충분한데 민첩이 문제네. 그건 민첩 8이 되어야 쓸 수 있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애써 구해온 괴물의 피로 대단한 성능의 장비를 제작했지만 아무도 쓸 수 없다는 것.
이대로라면 전력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다.
공연히 괴물의 피만 날려먹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까 죽은 크로거의 사체는 금세 사라져 피를 더 이상 얻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내일 다시 괴물 피를 구해봐요. 일반 장비를 만들면 장착 제한 같은 것 없으니 당신과 지성이도 쓸 수 있어요.”
그러자 한태진이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민철을 쳐다봤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괴물을 한 마리도 해치우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재윤이라는 청년은 지금 어디 있나?”
“솔직히 이곳 사정을 얘기했더니 다른 건물을 찾아 쉬러 갔어요. 내일 날이 밖는 대로 다시 이곳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내일 다시 온다는 말에 한태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잘됐군. 그럼 그 친구에게 괴물 잡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해봐. 저 무기를 쓸 수가 없으니 우리 힘만으로는 무리야.”
그러자 이민철이 한태진과 이정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도움을 받는 대가로 재윤이에게 이 골프 스틱을 주는 게 어떨까요?”
“이걸 주자고?”
“예. 재윤이는 민첩을 올려놔서 이 무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 녀석과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공짜로 괴물을 잡아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이정숙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걸 주긴 좀 그렇구나. 다음에 또 이런 무기가 만들어진다는 보장도 없는데.”
이정숙은 자신에게 초심자의 행운이 작용해 희귀한 무기가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그러한 행운이 또 다시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자 한태진이 잠시 고심하더니 말했다.
“민철이 말대로 하는 게 좋겠소.”
이정숙이 발끈했다.
“당신 말은 이 골프 스틱을 그 청년에게 주자는 얘긴가요?”
“괴물 잡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공짜로 잡아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아무리 희귀한 무기라 해도 지금 당장 쓸 수 없는 물건은 그저 애물단지일 뿐이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가 쓸 수 있는 무기야.”
“하지만.”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딸 한혜미가 말했다.
“엄마! 제 생각도 아빠랑 같아요. 대신 그냥 주지 말고 조건을 거는 게 어때요?”
“조건이라니?”
이정숙이 쳐다보자 한혜미는 미소 지었다.
“무기를 받는 대신 괴물 열 마리를 잡을 때까지 도움을 준다는 조건이죠.”
그 말에 이정숙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괴물 열 마리를 죽인다면 무기 제작을 꽤 많이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결코 손해보는 조건은 아니었다.
한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좋고 매부좋고!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지. 그 친구는 무기를 얻고 우리는 피를 얻는 거니 나쁠 것 없지 않겠소?”
그러자 이정숙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동의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나쁘지 않네요. 근데 그 재윤이라는 청년이 괴물을 열 마리나 잡아주려 할까요?”
그 말에 이민철이 염려말라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그 녀석에게 잘 말해보겠습니다.”
“좋아! 자네만 믿겠네.”
이민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재윤아! 너 득템했다.’
사실 재윤은 이런 걸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괴물 잡는 걸 도와줄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민철은 이런 식으로 얘기해야 이정숙이 파투스 무기로 바뀐 골프 스틱을 재윤에게 기꺼이 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전 지대에서 지내게 해주지도 못하는데 이런 거라도 도와줘야지. 근데 그 녀석 민첩이 8이 될 지 모르겠네.’
재윤이 민첩을 올렸다고 했지만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기 때문에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 * *
한편 그때 재윤은 어둠을 뚫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부서져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밖도 캄캄했지만 건물도 어두웠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곳에 건물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는 안전 지대 같은 것 없나?’
만약 그랬다면 뭔가 알림이 들려왔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무런 알림도 없었다.
‘여긴 아닌가 보구나.’
이 지옥같은 세상에 괴물들이 들어올 수 없는 안전 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안전 지대를 반드시 찾아야 해.’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안전 지대 관리자가 된다고 했으니 앞으로 가능한 많은 건물을 뒤져볼 생각이었다.
“휴~! 어쨌든 오늘도 힘들었다.”
재윤은 대충 아무 방이나 들어가 눈이라도 붙이기로 했다.
물론 언제 괴물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니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
그러던 재윤은 돌연 서늘한 시선을 느꼈다.
어둑한 거실의 안쪽.
‘뭔가가 있어!’
캄캄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었다.
번뜩!
아니나 다를까, 그쪽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쩍였다.
그 빛으로 인해 일단의 실루엣들이 드러났는데 언뜻 보면 사람들의 형체였다.
그러나 시선에서 느껴지는 섬뜩함과 거친 호흡들!
그것은 그들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을 의미했다.
‘괴물들인가?’
번뜩! 번뜩!
연이어 다시 번쩍이는 안광들!
대충 봐도 십여 쌍은 되어 보였다.
‘으! 저것들은?’
그 안광의 빛들 덕분에 재윤은 그것들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썩은 피부를 가진 인간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조차도 남지 않아 뼈만 보이는 신체를 가진 이도 있었다.
‘시체 같은데? 설마 좀비?’
그렇다.
시체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공포 영화에서나 봤던 좀비들이었다.
‘미친다. 하다 하다 이제 좀비까지 나타나는 거냐?’
하긴 크로거 말고도 괴물들이 또 있을 거란 생각은 했다.
이민철도 밤에는 더욱 무서운 괴물들이 나온다고 했고 말이다.
“키아아아!”
그 사이 좀비 중 하나가 재윤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윤은 뒤로 물러나며 화살을 소환했다.
“바람의 화살!”
크로거와 달리 좀비는 푸른색 약점 포인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좀비에게 약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재윤이 아직 좀비에 대한 지식이 없어 약점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크로거의 경우 C등급 지식을 얻은 이후에나 약점이 보였으니까.
‘어쩔 수 없지. 머리를 노리자.’
푸확!
바람의 화살이 날아가 머리에 박히자 좀비는 뒤로 훌렁 넘어갔다.
그러나 넘어진 즉시 다시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이놈도 한 방에는 안죽네.’
아무래도 승산이 없었다.
한두 놈이라면 모를까 십여 마리도 넘는 좀비들을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였다.
‘이 집을 빠져나가야 해.’
그런데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현관문 쪽에도 좀비가 세 놈이나 나타나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