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그리고 다음 페이지로 (3) >
마지막으로 루드비히가 느낀 감정은 유쾌함이었다.
생각해보면, 여왕은 자신의 손에 한참 동안을 갇혀있었다. 여왕과 연결되어있는 존재, 그녀의 촉각이나 마찬가지인 김유성 또한 여왕과 함께 봉인된 채였다.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봉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야말로 가장 위험한 변수라고 판단했고, 다른 모든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오직 루드비히의 배제에만 집중했다. 세계의 바깥에서 뛰어들어온 저 규격 외의 이레귤러만 사라진다면, 이 세계에 여왕이 대처하지 못하는 요소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사라지기 직전인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여왕의 첫 실책이자,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번 세계의 루드비히’. 이레귤러의 이레귤러인 지수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존재가 되어갔는지. 차라리 루드비히를 마음대로 뛰어놀라 두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저 미쳐 날뛰는 변수 덩어리를 1초라도 더 설치게 둘 바에야.
끝내 마왕은 모든 자조와 좌절에서 벗어나 미소지었다.
새하얀 빛과 함께 백마녀의 이름이 계승되었다. 펄럭이는 망토의 부유감이 사라져버린 것의 무게를 역설했다. 루드비히가 묶여있던 자리에는 가면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지수는 한참 동안,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역 씨.”
말하던 서민하가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지수의 머리카락 절반은 하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이제는 미역이 아니라 반만 미역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었다. 자리에 서서 둥지를 안정화시키고 있던 지수는, 조용히 걸어나가 바닥의 가면을 주웠다.
“...이거 잠깐 맡아주세요.”
정말 소중한 보물이니 조심스럽게 다뤄달라는 듯이, 지수는 천천히 정유현에게 가면을 건네주었다. 정유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면을 받았다. 이내 지수는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둥지의 안정화 따위, 루드비히의 힘을 받자마자 끝내버렸다.
얄궃게도 세계 규모의 결계를 조정하는 기술은 루드비히의 특기나 마찬가지였다. 네버랜드도, 여왕의 봉인도, 세상을 멈추는 책갈피도 전부 루드비히의 작품이었으니까. 그의 기술을 자신에게 딱 맞도록 개량하는 과정 따위 필요도 없었다. 그야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얄궃은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흑마녀는 자신에게 백마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런데 지금 정말 백마녀의 이름을 이어버리게 되다니. 이른바 스나크 베리야에프라고 해야 할까.
"영역."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의 파장이 세계를 쫙 훑고 지나갔다. 용왕은 둥지 안의 모든 것을 손에 잡힐 듯이 감지할 수 있다. 집중만 한다면 구석 어딘가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것 하나까지도 저 멀리 앉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 것이 세계 전체에 작용하고 있다. 그는 이미 용왕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었다.
지수는 지금 한 세계의 왕이었다.
“만상해석.”
지수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왕이 바로 본체를 현현시켜 오지 않은 이유는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루드비히에게 다시 봉인 될지도 모른다 두려워해서 그런 것인지, 어차피 승리하는 건 이쪽이니 신중히 상황을 살피려는 거였는지. 아니면 그냥 사람들 갖고 노느라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너는 이제 뒤졌어.”
지수는 단숨에 여왕 본체의 위치를 특정했다. 여왕은 아직 완전히 현현하지 않았기에 물리적인 간섭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수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주변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자기 자신에게 해석을 적용해, 위치 정보를 살짝 조작하는 것으로 순간이동과 가까운 효과를 낸다. 해석 능력이 극에 이른다면 이런 짓거리도 할 수 있었다. 눈앞에는 꿈틀거리고, 부글부글 끓고, 검붉고 뾰족하고 미끄러운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지수의 출현에 크게 놀라움을 표하고 있었다.
지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평소였다면 용사의 의지를 계승하고 마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어쩌고 저쩌고 하며 비장한 분위기를 다잡아겠지만, 말할 줄도 모르는 괴물이랑 떠들어봤자 의미가 없다. 존재하는 건 그저 차가운 분노 뿐.
지수는 조용히 김유성에게 들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룰을 마음대로 바꾸는 게임이라 했었나.’
검으로 베면 베인다. 마법을 발동하면 주문이 나간다. 불로 지지면 화상을 입는다. 여왕은 그런 모든 행동의 기본이 되는 법칙들을, 근본적인 단계에서 고쳐 써버린다. 여왕은 그 자체로 자신의 법칙을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저쪽은 게임을 해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공격력이 1만이어봤자 데미지를 0으로 바꿔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단순한 개인으로서는 한 명이든 일억 명이든, 얼마나 세든 말든 여왕에게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세계 스케일이 아니면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수는 지금 혼자서 한 세계를 품고 있었다. 이쪽부터 저쪽까지, 이 세상 전부가 용왕 스나크의 영지다. 땅이나 바다뿐만이 아니다. 이 세계에 포함되는 아공간이나 정신계조차 지수의 둥지가 영역을 뻗치고 있다. 그리고 주인 없는 땅이라면 몰라도, 용왕의 깃발이 꽂힌 영토에서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법을 주장할 수는 없다. 지수가 손을 처들었다.
“네가 해커면 나는 운영자다.”
지수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등 뒤에서 커다란 마법진이 나타났다. 브로켄의 유령. 그것은 루드비히가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강대하고 거대한 규모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신불과 본존의 뒤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는 만다라와도 같이.
그리고.
“스나크 사냥.”
다른 능력을 동경해 흡수하는 능력. 숙련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지금 지수는 세계에 존재하는 각성자들의 능력을 전부 다 사용할 수 있었다. 루갈반다의 수호로 인해 침식은 통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겠지. 반칙 하나로 먹고 살던 꿈틀이 괴물 따위,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사실 지수에게 세계의 법칙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만큼의 전능함은 없었다. 지수는 어디까지나 신이 아니라 왕이니까.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대표자로서 왕좌에 앉아 총의를 행사할 뿐이다. 하지만, 여왕이 마음대로 남의 땅 법칙을 바꾸려는 걸 관리자로서 꺼지라고 일갈할 수는 있었다.
여왕은 그것도 모르고 끊임없이 법칙을 개변시키고 있었다.
무의미하단 걸 보여줘도 그랬다. 끊임없이 세계에 간섭하는 방식을 바꾸면 대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지수에겐 여왕의 방식이고 뭐고 훤히 다 해석되었다.
예를 들어 여왕은 모든 공격을 무시한다. “불허.”
예를 들어 여왕은 상처받는 즉시 회복한다. “불허.”
예를 들어 상대는 모든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불허.”
예를 들어 모든 마력은 움직임을 멈춘다. “불허.”
전투라고도 할 수 없는 전투는 그저 일방적이었다.
한 가지 번거로운 점은, 여왕의 본체가 커다란 섬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이었다. 정신계에서 이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 말 그대로 한 세계에 가까운 자아를 지닌 초생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완전히 소멸시키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수의 양손에 두 이야기의 정령이 휘감겨 정령무장이 되었다. 하나는 원래 지수의 정령이었던 재버워키, 그리고 또 하나는 루드비히를 거쳐 지금은 지수에게 계승된 벨의 정령. 있을 리 없는 같은 정령의 중첩은 거대한 대포로 화했다.
세계를 등에 지고 있는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따분한 일상. 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시답잖은 이야깃거리로 수다를 떠는 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그 가면을 쓴 남자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
그러니까 이것은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에게 바치는 경의다. 내가 당신의 한 일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등 뒤의 새하얀 마법진이 격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용언마탄을 완성시키는 건, 지금은 세계의 곳곳에 날아가 기둥으로서 둥지를 떠받치고 있는 수호룡들. 그들이 바친 용언은 한데 모여 지수의 마력으로 증폭되고, 앨리스의 만화경에 무수히 반사되어 분열한다. 최강의 일격이 여왕에게 겨누어졌다.
누구나 느긋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부디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일 없기를 바란 한 마왕의 소원.
“이상한 나라의 끝.”
절망으로 가득차있던 1챕터는 이제야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음 페이지로. 마탄이 작렬해 여왕의 본체는 흔적도 남지 않게 일소되었다. 굉음과 함께 일어난 대폭발은 정신계라는 차원 자체를 뒤흔들 정도였다. 드디어 끝났다.
“……어?”
그리고 지수는 무언가 위화감을 눈치챘다. 지수가 세계 전체에 둥지를 뻗고 있는 데다, 거대한 충격으로 정신계의 경계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자그마한 금. 마치 오류 때문에 만들어진, 세계의 공백과도 같은 틈새 공간.
아무래도 확인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수는 조용히 그곳을 향해 걸어가보았다.
***
새빨간 코브라가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오성화는 운전대를 잡고 네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박자까지 타는 게, 지금 나오는 노래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지수에게 말했다.
“이거 신곡 좋지 않아?”
“매론 1위 했더라고요. 대박 쳤죠 뭐.”
뒤에 앉은 지수가 오성화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화면에서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서민하가 통기타를 들고서 잔잔한 느낌의 발라드를 부르고 있었다. 서민하의 실력이 원래 대단한 건지, 아니면 뭐 뱀파이어 능력으로 매혹이라도 쓴 건지 어디 길을 걷기만 해도 이 노래가 들려올 지경이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좋더라. 얘 예전 곡들은 거의 다, 그 뭐라고 하나… 데스메탈? 막 너무 시끄럽고 그랬잖아.”
지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성화의 말에는 지수 또한 동의했지만, 집에서 양손으로 얼굴 덮고 나는 자본주의에 굴복했다느니 저 옷 입고 노래부르는 화면 길에서 틀어줄 때마다 죽고 싶다느니 여행을 떠날 거라느니 끝없이 중얼거리는 서민하를 생각하면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기도 망설여졌다.
“이 노래 들으니까 또 생각나네. 쥐포장수 그 놈이나 걔 부하 기집애나 완전히 미쳤다니까. 아니 무슨 애 공연하는 데에 누가 난동 좀 부린다고 바로 능력 써서 제압을 해. 집행부는 일반인한테 능력 써도 된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걔네가 그러면 거기 경호원들은 뭐 먹고 살겠냐고. 사람이 배려가 없어 배려가. 투덜거리는 오성화가 핸들을 꺾었다.
“어이가 없긴 하죠.”
“아닌 게 아니라 집행부 넘버 원이랑 투잖아. 그런 놈들이 왜 집행부 제복 입고 가수 라이브에 개근을 하시고 있냐고. 심지어 맨날 자리도 제일 좋은 곳에 앉는다더만. 그것 때문에 협회가 저 애 빽 봐주나보다 하고 온갖 기업에서 협찬 들어온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어? 잠깐만. 사실 그거 노린 거 아니야? 쥐포장수 걔 그런 쪽 머리 되게 잘 돌아가잖아.”
오성화의 말에 지수가 턱을 매만졌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늑대 씨가 너무 팔불출이 되는 게 아닐까…. 하긴 저번에 진지한 얼굴로 둘이 손 잡고 찾아와서 임무가 있는 동안 민하 라이브 사진 좀 많이 찍어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긴 했지만.
“다 왔네. 여기 맞아?”
“네. 아침부터 여기저기 데려다주시고 죄송하네요.”
“이런 거 가지고 죄송할 게 뭐 있어? 봐봐. 다른 놈들 다 바쁘다 어쩌다 핑계댈 때 나 혼자 달려오는 거. 이런 평소 태도에서 상대방에 대한 리스펙이 다 보이는 거 아니겠냐고.”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 지수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순간이동이니 뭐니 손쉽게 이동할 방법은 많이 있었지만, 필요한 때가 아니면 사용을 자제하자는 게 지수의 방침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지 않으면 설거지도 마법, 분리수거도 마법 하면서 완전히 폐급 인간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놓고 아직껏 운전면허도 안 딴 게 웃긴 점이지.’
이내 지수가 앞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늘 여기 온 것은 ‘세계의 왕’으로서 업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수의 눈에서 안광이 빛나자, 숨겨져있던 결계의 술식들이 드러나며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그 문을 끼이익 열고 나온 건 요정들이었다.
<세, 세계왕 스나크 님을 뵙습니다!>
“아니. 예의 차릴 필요 없다니까요.”
지수가 손을 휘휘 저었다. 편한 자리인 거 강조하려고 일부러 추리닝 차림으로 나왔구만. 이세계의 문화 기준에서는 별로 효용성 없는 전략이었던 것 같았다. 요정들은 물구나무를 서고 뭔가 기묘한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저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큰절을 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인 것 같았다.
이들은 간단히 표현하자면 차원 난민이었다. 어떠한 사정으로 그들 세계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쳐, 무작정 다른 세계에 떨어지기를 기대하고 도박을 건 자들. 보통 어떤 세계고 출입구는 단단히 틀어막혀있기에 이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지만, 지금 지수의 세계는 여왕이 침략해오며 구멍을 뻥 뚫어버린 탓에 들어오는 것에 한해 아주 쉬워져있었다.
지수가 한 것은 자신의 둥지에 ‘바깥에서’ 들어온 이들을 파악해 최대한 마찰을 빚지 않게 조율하는 일이었다. 무얼, 잠깐 전만 해도 각성자랑 몬스터가 판치고 있던 시대다. 준비만 충분히 거친다면 이종족쯤을 받아들일 재량은 충분히….
‘있나? 없나?’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걸 잘 풀리게 하는 게 자신의 책임일 터였다. 다행히 자신에게는 해석 능력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 전부를 냅다 먹어치우는 미친 괴물이 아닌 이상 대화와 소통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일단 생활공간은 필요할 테니, 게스트하우스로 안내해드릴게요. 문화나 관습 교육도 그쪽에서 담당할 거고. 비슷한 처지 분들도 꽤 있으니 정보 교환하시면 좋을 거예요.”
그 게스트하우스란 다름 아닌 허다인의 누각이었다. 그 공중에 떠있는 요새는 이미 엘프니 조인이니 슬라임이니 하는 이종족들의 친목의 장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허다인이 그런 이들과의 교감에 큰 흥미와 적성을 느끼는 것도 한몫했다.
“그러면 일단 이 부적을 손에 드시고….”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선 오성화가 피식 웃었다. 결국 아무리 대단한 존재가 되어봤자, 지수는 지수인 것이었다.
***
“세계의 왕이라. 부담스러운 직함이구만~”
돌아가는 길, 오성화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그때. 여왕 토벌전의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대강 끝낸 상태였다.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일이 있다거나, 둘러대는 쪽이 편할 거라거나. 수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최전선에서 싸운 그들에게는 모든 진상을 알 권리가 있었다.
“지수 너 아직 우리 길드 동맹인 건 알고 있지?”
피식 웃은 오성화가 팔꿈치를 흔들며 은근한 눈초리로 지수를 흘겨보았다. 아,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나는 지수 네 포션 처음 딱 마셨을 때부터 얘는 될 놈이다. 이건 진짜다 딱 생각했다니까? 오성화가 호들갑을 떨자 지수도 따라 웃었다. 이런 쾌활함은 오성화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그런데 원래 머리 반쪽 하얗게 물들었었잖아.”
다시 염색했어? 그렇게 묻는 말에 지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녀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으로 물드는 머리색은 염색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것 자체로 마녀의 증명 같은 것이니까. 지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오성화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돌린 화제는 여기 오기 전에 들렀던 장소였다.
“계속 손에 들고 있네. 좋아하는 책이야?”
차원 난민인 요정들과 만나기 전, 지수가 오성화에게 데려다달라 부탁했던 행사가 있었다. 무슨 어쩌구 작가의 사인회였는데, 지수가 그렇게 들떠있는 모습은 처음 봐서 놀랐었다. 신비주의인지 뭔지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네. 팬이예요. 영원히 사인 못 받을 줄 알았는데.”
“근데 인기작가 치곤 사람이 별로 없던데?”
“...인기 못끌 글만 쓰는 양반이거든요.”
지수는 조용히 여왕을 쓰러뜨린 직후의 일을 생각했다.
이상한 나라의 끝. 그 폭발의 여파로, 차원이 울렁거렸을 때 느꼈던 위화감. 휴지통처럼, 처리할 수 없는 오류를 일단 쑤셔박아놓은 것 같은 세계의 틈새. 그 입구를 감지한 자신은 손을 뻗어 그 안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건.
지수는 차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왕이 해커고 자신이 운영자라고 한다면, 그 남자는 버그였다. 존재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버그 덩어리. 그런 인간이 ‘자신을 지워 자신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승한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니까 세상도 감당할 수가 없어 오류를 일으켜버린 것이다.
‘그래서 반만 계승됐던 건가.’
지수가 유리창에 비쳐보이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은 예전처럼 전부가 녹색빛을 띠는 흑발로 돌아와있었다. 백마녀의 이름은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그래도 내년에는 줄 많이 서있을걸요.”
“응? 왜?"
“개인적으로 할 일이 다 끝나서…정확히는 남이 끝내줘서.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로 돈 좀 벌어보겠다네요. 여친이 밝고 가벼운 소설을 좋아해서 그쪽으로 한 번 노선을 틀어보겠다나. 딱 그 취향 저격할 수 있는 주인공 소재가 있대요.”
“오호, 제목이 뭔데?”
오성화의 물음에, 지수는 피식 웃었다.
그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유치해 빠진 제목이었다.
<규격외 등급 해석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