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그리고 다음 페이지로 (2) >
그것은 방심이라기보다는 힘빠짐에 가까웠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허탈함. 그것이 루드비히의 사고에 잠깐의 경직을 주었다. 그리고 그 간격은 치명적인 결과가 되어 돌아 왔다. 지금 이 상황 누구의 손에도 빼앗겨서는 안 되는 물건이, 가장 쥐어서는 안 되는 놈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루드비히의 안색이 새파래진 채 지수를 노려보았다.
무슨 속셈으로 망치를 빼앗은 것인지야 대강 짐작이 간다. 애초에 자신이 김유성의 의지를 이었다고 대놓고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다. 그 빌어먹을 용사가 시도했던 것처럼, 흑마녀의 능력을 폭주시킬 생각이겠지.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지수에게는 준비된 것처럼 흑마녀의 능력까지 쥐어져있었다.
여왕의 침식에 반쯤 먹혀있던 이전 세계에 비하면 훨씬 사정이 낫다.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멸망할 거라면 한 번 제대로 싸워나 보고 죽자. 경멸하게 될 만큼 멍청한 생각이다.
“스나크. 너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흑마녀의 능력은 힘 그 자체를 취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능력이다. 전인류의 영혼을 한데 묶어서 인격 째로 녹여버리겠다고? 확실히 단언하지. 거기서 태어나는 건 여왕보다 끔찍한 무언가다.”
루드비히가 지수를 노려보며 호소했다. 하지만 지수는 그래서 그게 어쨌냐는 듯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루드비히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왜 갑자기 상관없는 소리를 하고 앉아있냐는 표정. 스나크는 그게 얼마나 무책임하고 끔찍한 선택인지 요 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을 때.
제단의 천장이 무너지며 새까만 촉수들이 해일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여왕의 말초였다. 그 검은 촉수들이 노리고 있는 표적은 명백했다. 촉수들은 망치를 들고 서있는 지수보다도, 계단에 무릎 꿇고 있는 루드비히를 덮치는 것을 우선했다.
“뭐라고?”
평상시의 루드비히였다면 요격하지 못할지언정 쉬이 촉수에 잡히지도 않았겠지만, 지금 루드비히는 지수와의 연전에 이어 만상해석을 사용하는 것으로 반쯤 탈진한 상태였다. 뻗쳐나간 촉수 다발이 루드비히의 한쪽 팔목에 휘감겼다.
루드비히는 재빨리 손을 휘둘러 촉수를 쳐냈지만, 접촉한 부위에서 곧바로 침식이 진행되었다. 살갗이 꿈틀대며 무더위의 진흙탕처럼 끓어오르고 있다. 하지만 루드비히의 정지는 벨의 침식을 막지 못한 후회에서 비롯된 능력. 루드비히는 환부에 정지의 역장을 휘감았다. 그러자 침식 또한 멈추었다.
하지만 이걸로 이제 오른손은 쓸 수 없다. 여왕의 말초에 닿아 침식을 허락할수록 정지시켜야 할 부위는 늘어날 것이다. 루드비히는 여왕이 무너뜨린 던전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던전 안엔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모든 던전은 여왕이란 생물체의 내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의식의 제단이라고 해도 좋다. 자신의 일부를 세계에 섞어 특정한 구조물을 만드는 것으로, 여왕은 처음으로 세계에 현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던전을 부수는 건 제 살 깎아먹기였다.
적어도 게이트가 해방돼 완전한 현실이 되지 않는 이상, 여왕은 던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세계를 부수는 망치가 있는 이 던전은 중요할 터였다. 그야 김유성이 흑마녀를 폭주시켜 여왕에 대항하자는 미친 계획을 실행하려 했을 때도, 여왕은 이 던전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자문한 루드비히는 콧숨을 쉬었다.
“갇혀있다 보니 초조해진 건가.”
너 같은 괴물이 그런 감정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루드비히가 촉수들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여왕은 괴물답지 않게 신중하다. 마치 곤충 같이 합리적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먹어치울 수 없는 세계에는 애초에 손을 대지 않겠지. 먹어치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이 세계를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있을 리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마치 자신의 침략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극히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침식을 방해하고, 용사를 이용해 자신을 봉인하는 데까지 성공한 불가해의 존재.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라는 이레귤러가 출현했다.
한 마디로 말해, 여왕은 마왕에게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어차피 한낱 장난감이자 먹잇감. 애초에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저 형용할 수 없는 존재에게 위협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니까. 그것은 그 누구도 달성해내지 못한 위업이었다. 루드비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다면 좋아. 더 이상 일말의 유예도 없다, 스나크! 지금 당장 망치를 휘둘러, 네 손으로 이 세계를 끝내버려라!”
외치는 루드비히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힘이 돌아와있었다.
그때와 같은 좌절과 괴로움이 아니라, 한 방 먹여줬다는 긍지와 함께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 최고의 해피 엔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최선이었다. 이만큼 힘냈으니 벨이라고 해도 적당히 용서해줄 것이다.
애초에 맡지도 않는 주인공 역할을 억지로 떠넘긴 것이다. 애드립으로 각본을 꼬아버렸다 한들 불평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그런 루드비히에게 엿이나 먹으라는 듯이,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
지수는 치켜든 망치를, 있는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
망치는 세계를 부수지도, 현실을 조각내지도 않았다. 깨부순 것은 지수가 용왕으로서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의 경계. 지수를 둘러싸고 있는 둥지의 역장에 쩌억, 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깨진 껍질의 내용물이 끝도 없이 퍼져나간다.
루드비히는 착각하고 있었다. 흑마녀의 능력을 폭주시켜 전 인류를 흡수할 생각이냐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지수는 남에게 참견 받는 것도, 자기 일에 남을 끌어들이는 것도 싫어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이라면 그 정도는 파악해야 했다.
“무슨….”
무너진 던전의 바깥에는 세상이 있었다. 지수를 중심으로 팽창하는 둥지가 그 모든 것을 덮어갔다. 경계 자체가 사라진 둥지는 어디까지고 퍼져나갔다. 이미 둥지는 멀리 보이는 지평선 너머까지 다다라있었다. 둥지가 세계를 품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본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떨렸다.
“당장 둥지를 거둬라 스나크! 네 둥지는 결계 술식과 다를 게 없어. 어느 정도의 크기를 넘어서면 불안정해져 날뛰게 된다! 그런데 경계선을 파괴하다니! 너 혼자서 세계를 짊어질 수 있을 것 같나? 과부하로 네 존재 자체가 파열할 거다!”
그 루드비히가 당황해서 큰소리를 칠 만큼, 지수가 한 일은 각별히 미친 짓이었다. 김유성의 계획은 끔찍하고 저주받을지언정 여왕에 준하는 존재를 탄생시킨다는 가능성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저건 그냥 자폭이다. 마치 국가 하나의 업무를 한 사람이 전부 떠맡는 것과 같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저게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여왕의 말초들은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루드비히의 팔다리에 촉수들이 휘감겼고, 이윽고 더욱 격한 침식을 위해 스스로 녹아내리며 루드비히를 옭아맸다. 루드비히는 즉시 자신의 몸 전체에 정지의 역장을 둘렀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완벽한 결정타를 먹었다.
정지도 풀렸고, 망치도 사라졌다. 더 이상 어떤 방법도 없다. 전부 저 얼간이 용왕 때문이었다. 이제 여왕은 천천히 본체를 현현시킨 뒤 맛있게 차려진 요리를 먹으러 오겠지. 끝내는 이 세계 전체가 침식당해 여왕의 뱃속에 들어갈 테고.
그리고 정지에 감싸인 루드비히 쪽을 슥 바라본 지수는, 저대로면 걱정 없겠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수가 전개한 것은, 스스로 둥지에 품고 있던 왕들의 묘소였다.
“혼자서 짊어질 생각,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어.”
거대한 용들의 영체가 지수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밴더스내치, 살카르사, 아트마레트라, 루갈반다. 그들을 비롯한 역대 용왕들. 하나하나가 대륙을 힘으로 호령한 당대 최강의 용들이었다. 그들 또한 다같이 둥지의 안정화에 힘을 보탰다.
<우리들 모든 용왕은 현왕 스나크를 지지한다.>
그럼에도 둥지는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혀를 찼다. 묶여있는 탓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지만, 만약 자신의 힘을 보탠다고 해도 저 둥지를 안정화시키는 건 무리일 것이다. 말 그대로 한 세계를 품는 크기란 말이다.
“쓸데없는 힘 빼지 마라. 너는 나야, 그렇게 계산이 안 되지는 않을 텐데? 주변을 잘 보고 해석해봐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변수들을 최대한으로 놓고 두드려봐도 그 둥지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드는 수치엔 못 미쳐. 세상 모든 S급 각성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너한테 힘을 몰아준다면 모를까….”
“그거 조언 고맙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허공을 비틀며 생겨난 진보라색의 소용돌이에서 걸어나온 건, 정유현과 서민하, 그리고 훅마녀였다. 그들 또한 초월자의 격에 이른 각성자. 던전 안에서라면 모를까, 던전이 무너진 바깥에서 이만한 힘의 격류가 터져나오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환상의 회랑을 공략하고 있던 도중 지수가 사라져버리고, 큰일이 난 것 같아 달려와보니 지수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당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전부 싸우지 않게 내버려두고 혼자 뛰쳐나가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건 이전부터 지수의 전매 특허였으니까.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도 사람들이 나타났다. 쉬쉭,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대규모 텔레포트로 나타난 건 김혜성과 오성화를 비롯한 S급 던전의 원정대들이었다. 이변이 감지되자마자 정유현의 신속한 판단으로 합류 연락을 받은 결과였다. 검을 든 오성화가 휘파람을 불며 감상을 말했다.
“완전히 난장판이구만?”
그야 텔레포트로 전이되자마자 보인 건 완전히 무너진 사원과,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는 십수 마리의 거룡. 해일처럼 흐르고 있는 새까만 촉수들과, 회색의 역장을 두르고 있는 마왕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건 가운데에서 거꾸로 쏟아지는 폭포처럼 마력을 내뿜고 있는 지수였다.
“위험한 상황인 모양이네.”
“흥, 마왕인가. 한심한 꼴을 하고 있군.”
이내 그 옆에서 금색의 나비가 흩날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육영웅 백묵과 같은 육영웅 허다인. 두 사람 뒤에는 누각과 불식의 정예들이 서있었고, 그 둘 사이에 단단한 대열을 이루고 있는 건 새까만 제복으로 무장한 집행부들이었다.
“민하!”
집행부의 맨 앞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건, 대검을 든 흑기사 우진의 인형을 대동하고 있는 인형사 이유라. 그쪽을 바라본 루드비히의 눈에 잠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둘을 보니 아주 잠깐 이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둥지를 안정화시키고 있는 지수가 말했다.
“지금 상황이 이래서…힘 좀 빌려주실 수 있어요?”
빌려줄 수 있냐고 말했지만 사실상 네가 가진 힘 내 필살기 연료로 몽땅 가져다 부을 거니까 내놔, 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듣는 것에 따라선 너희는 쓸모 없다고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바보 아냐?”
“그런 것 가지고 부탁을 할 필요는 없어.”
서민하가 얼굴을 찌푸렸고 정유현이 피식 웃었다. 그 말대로 부탁 따위 필요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지수의 밑에서 지수의 지시에 따라 싸우겠다고 한참 전에 결정했다. 지수가 행동으로 납득시켜줬으니까.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이 사람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
굳이 이 자리의 이들로만 한정하지 않더라도. 고깔 카페의 마법사들도, 교회의 성기사들도, 지수가 집행부 일을 할 때 구했던 이름 모를 각성자 아이들도. 전부 지수를 지지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지수의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힘을 건네주는 과정은 간단했다. 그저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지수 쪽에서 스나크 사냥으로 알아서 힘을 가져갔다.
지수 쪽으로 모든 벡터가 결집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쌓아올린 인연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둥지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쏟아붓는다. 이걸로 안 된다면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둥지는 안정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현존하는 S급 각성자 전원을 비롯해 몇몇 초월자까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이 세계가 지니고 있는 전력의 9할 이상이라고 해도 전혀 어폐가 없었다. 이 모든 각성자들이 위기를 느끼자마자 지수를 중심으로 한 장소에 집결했다.
“...주인공인가.”
루드비히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가면이 흘러내려 바닥에 툭 떨어져내렸다. 둥지의 안정화에 힘쓰고 있던 지수는 고개를 돌려 루드비히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이에서 대여섯 살쯤 더 먹으면 저렇게 될 법한, 자신과 쏙 빼닮은 얼굴.
“벨은 내 가능성을 믿고 주인공이 되어달라 말했지.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런 역할이 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가면을 쓰고 다른 존재를 연기해왔던 거야.”
이내 루드비히의 팔다리에서 정지의 역장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촉수는 그 희미해진 부분을 타고 루드비히의 몸에 파고들었다. 그의 몸 속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아랑곳 않고 천천히 손을 들어 지수를 가리켰다.
“그런데, 지금 네가 반박을 해버렸군.”
여왕의 침식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여왕에게 먹혀버린다. 그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루드비히의 손끝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어깨가 무거운 역할을 떠넘겨지는 건 나란 존재의 숙명인 모양이군. 그래도 너는 나보다 낫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라는 거대한 시행착오를 목격했으니, 다음에는 좀 더 잘 할 수 있을 테니까. 실제로 지금까지 잘 해왔고….”
백색의 섬광. 그것은 이전에 본 적이 있었던 빛이었다. 그 시점에서 지수는 루드비히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잠깐, 당신!”
“불평하는 건 포기해라. 나도 억지로 떠넘겨진 거니까.”
루드비히의 목소리엔 어느 때보다도 온정이 담겨있었다. 선배가 기특한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결코 온몸이 여왕의 침식에 먹혀들어가, 지옥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의 음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은발의 지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는 주인공이 아니었어.”
장막 뒤에 숨어 음습하게 무대를 조작하던 유령 같은 자신과 달리, 스나크는 언제나 스스로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하염없이 자신 이지수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왔다. 한 번도 지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패배해있었던 마왕과, 몇 번이고 패배하더라도 지지 않고 유대를 쌓아온 용왕. 그리고 결국.
“주인공은 너였다, 이지수.”
좋은 배우는 퇴장할 때를 알고 있는 배우다. 지수가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모든 것은 결정된 것이다. 아무리 안타깝다 생각하더라도, 결국에는 맥 지리가 나타나 망토를 열어제끼고 오페라의 유령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지수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다. 웃기지 마, 당신 신작을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 그렇게 화내보든지. 아까만 해도 욕하더니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셨어? 그렇게 비꼬아보든지. 당신이 당했을 때 기분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잘 알면서, 나한테 똑같은 짓을 저지를 생각이야? 그렇게 정색하든지.
모든 말이 공허할 뿐이었다. 입 밖으로 내봤자 의미가 없다. 루드비히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수가 가까스로 입에 낼 수 있던,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에의 송별의 말은.
“...당신은 시행착오 같은 게 아니야.”
적어도 루드비히가 자조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단 한 명의 이해자도 없이 고독한 싸움을 계속해왔던 마왕에게, 나 만큼은 당신을 이해한다 전하는 격려의 한 마디였다.
그에 루드비히는 기습당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러냐.”
고맙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었다.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루드비히가 저렇게 순수하게 미소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어쩌면 그 생애에서 처음일지도 몰랐다. 이쪽이야말로 웃어주어서 고맙다 생각했다. 천천히 지수의 머리카락 반쪽이 새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Long live the king...."
마지막으로 이 세계의 용왕에게 축복의 말을 남기고,
이세계의 마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