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그리고 다음 페이지로 (1) >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깃든 것은 분명한 경멸의 빛이었다.
“...정말로 유감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정말로 열심히 설득하려고 했다. 이것이 가장 최선이고 올바른 선택이라고, 일부러 심상세계에 끌어 들여 자신의 기억까지 보여주면서 또 다른 자신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그것들 전부 무의미한 일이었다.
체념한 루드비히는 등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이야기의 페이지를 넘겼을 때 배드 엔딩이 찾아오는 것이 필연이라면, 언제까지고 페이지를 넘기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서있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은 억지로라도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고 한다.
그렇다면 세계라는 책 자체를 통째로 불태워버릴 뿐. 이미 각오를 끝낸 루드비히에게 망설임 따위 한 조각도 없었다.
“어디 가는데? 이야기 안 끝났어!”
“너와 할 이야기는 없다. 싸울 생각도 없어.”
계단을 올라가는 루드비히가 지수를 슬쩍 돌아보았다. 스나크. 놈과 싸워서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왕들의 묘소에 잠들어 있던 용왕 전원을 둥지에 품고 있는 저 괴물은, 몇 번을 빈사상태로 만들어도 즉시 부활해 더욱 강해졌다.
꺼림칙한 데다 귀찮기까지 하다. 굳이 상대해줄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의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변명을 대고 있었지만, 이제 슬슬 인정해야만 했다. 루드비히는 지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휙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경계한 지수가 움찔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너에게는 보이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수는 팍 눈썹을 찌푸렸다. 돌연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손가락을 가리키더니, 보이긴 뭐가 보인다는 건가. 그 반응을 본 루드비히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이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발현한 것은, 반쯤 겹쳐있는 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수십 개의 극소 마법진이었다.
“보이지 않는다면, 그걸로 됐다.”
지수의 눈에는 루드비히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게 현재 해석사로서 둘 사이에 있는 격의 차이였다. 같은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숙련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내 가면 너머의 눈동자에서 자줏빛 화염이 불탔다.
만상해석(萬象解釋).
마왕의 눈동자에 현실의 뼈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움직이는 모든 물체의 상태는 물론, 시간과 공간의 흐름마저도. 그것은 해석 능력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도달점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몇 초만 받아들여도 뇌가 불타버릴 미쳐버린 시계. 루드비히의 정신력으로도 엄청난 부담이 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용왕에게 확실하게 통할 방법이라면 이것 정도밖에 없다. 발상 자체는 한참 예전에 떠올랐지만, 한 번도 사용해볼 기회가 없었던 기술. 시공의 흐름을 직접 비틀어 세공해서, 현실과 유리되어있는 하나의 감옥을 만들어낸다.
한 번 빨려들어가는 순간 절대 외부에 개입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의 강제 추방. 사건의 지평선. 이걸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선 루드비히와 같이 정점에 이르른 해석 능력이 필요했다. 지수가 아직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건 방금 확인했다.
“어딘가에 박혀있어라. 모든 게 끝날 때까지."
“험…!”
루드비히가 지수를 가리킨 순간, 지수의 모습은 순식간에 비틀리더니 쏘옥 구멍에 빠지듯 현실에서 사라졌다.
루드비히가 자리에 털썩 무릎 꿇었다. 아무리 ‘살짝 건드리는 정도’라고 해도, 마법으로 시공의 흐름에 개입하는 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일이었다. 방해물은 제거했다. 당장에라도 주저앉아서 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쉴 여유 따위가 있을 리 없지.”
그것은 어떠한 확신이었다. 스나크가 유폐된 채로 있는 건 그리 긴 시간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지만 근거 따위 없었다. 그저, 지금껏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을 때마다 지수는 어떻게든 빠져나왔다. 하지만 몇 분이면 충분하다. 몇 분 만 있으면 세계를 부술 수 있다.
이내 루드비히가 계단 위로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루드비히는 섬뜩한 예감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해석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순한 직감. 아무런 전조도 기척도 없었지만, 돌아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불가능해."
"......."
“그렇게 외치고 싶다는 표정이신데.”
돌아본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현실로 돌아온 지수가 서있었다. 몇 분 정도 걸린 수준이 아니다. 지수는 거의 유폐되는 것과 동시에, 루드비히의 기술을 파훼하고서 현실에 복귀했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나크… 네게는 ‘보이지 않을’ 텐데?”
루드비히가 눈을 부릅 떴다. 자신의 인지를 뛰어넘은 불가해한 현상에, 저 예측할 수 없는 변수 덩어리에 이제는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지닌 만상해석은 현실을 넘어 시공의 흐름조차 관조한다. 그것은 해석의 끝자락에 있는 경지였다. 애초에 루드비히는 해석 능력을 얻기 이전에도 신기에 가까운 분석 능력을 구사하던 실력자. 해석 능력을 각성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 햇병아리 용왕하고는 경험치의 단위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방금 루드비히가 쓴 기술은 시공을 포착하지 못하는 이상 결코 파훼할 수 없다. 그야 해석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심상을 읽어낸 지수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 말대로야. 같은 능력을 써도 나랑 당신 사이엔 하늘과 땅 만큼 격차가 있겠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당신 같은 괴물을 노력한다고 따라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안 들어.”
실제로 지수의 시야는 엄청난 정확도로 주변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따지고 보면 용왕으로서의 능력. 단순히 원래 가지고 있던 감각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것일 뿐, 인간의 그것을 완전히 뛰어넘은, 규격 외의 영역에 이르지는 못했다. 지수의 해석으로 시공의 흐름 마저 관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근데 같은 이지수로서 한 마디 하자면 말이야. 이 시원찮은 인간은 애초에 맨날 실패하는 게 일상에다, 어찌어찌 남의 도움만 받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한심한 자식이라고.”
지금껏 언제나 그래왔다. 이유라에게 패배했고, 아그리올라에게 패배했고, 협회장에게 패배했다. 용왕이 되어 강해진 뒤로도 중요한 싸움에선 언제나 한심한 패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오성화가 구해주었고, 허다인이 구해주었고, 밴더스내치가 구해주었다. 서민하가 구해주었고 정유현이 구해주었고 김유성이 구해주었다. 누군가가 쓰러지지 않게 등을 밀어주었기에, 휘청거리면서도 한 걸음씩 내딛어 여기까지 왔다.
“내 힘만으로 당신이랑 비벼볼 생각 애초부터 없었어.”
지수가 옆으로 손을 뻗자, 그곳에서 험프티 덤프티가 발현했다. 정유현의 중력 능력으로 만들어진 극소의 블랙홀. 그리고 서민하가 지닌 ‘결을 읽는 능력’이 지수의 해석과 결합해, 험프티 덤프티의 주변 찌그러져 있는 경계선을 포착했다.
지수는 루드비히가 사건의 지평선을 발동하려던 순간, 심상해석으로 그의 의도를 읽고 기술의 원리를 추론했다. 그리고 정유현의 험프티 덤프티를 나침반 삼아, 서민하의 결을 읽는 능력으로 수치를 뽑아내, 현상해석으로 전부 해석했다.
“스나크 사냥.”
마왕인 루드비히가 가지고 있는 게 백마녀의 마도라고 한다면, 용왕인 지수가 가지고 있는 건 능력을 먹어치우는 둥지. 자신의 해석이 루드비히의 해석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지수는 다른 사람들의 능력에 도움받을 수 있었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둔 초강수도 무위로 돌아갔다. 이미 상황의 주도권은 지수에게 넘어와있었다. 지수는 굳이 당장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머리를 긁적이며 루드비히에게 말했다.
“당신답지 않다고. 일단 머리를 좀 식혀보란 말이야. 애초에 세상을 멸망시키겠다 생각할 정도면 그냥 망치 써서 또 과거로 돌아가면 되잖아. 2회차로 안 되면 3회차, 몰라?”
물론 그것도 지수 입장에서는 심히 마음에 안 드는 방식이고 정말 그렇게 하도록 놔둘 용의도 없었지만, 일단 세계 그 자체를 완전히 파괴한다는 것보다야 백 배쯤 나았다. 하지만 지수의 말에 루드비히는 어이가 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
“...가당찮은 걸 넘어서 모욕적이군. 스나크, 너는 내가 그런 사실을 고려하지도 않고 세상을 멈추려 했을 줄 알았나? 그냥 지쳐서 더 이상은 못 해먹겠으니 그만두자는 거라고?”
“그럼 대체….”
“이번이 유일한 기회였다. 다음 기회 따위는 없어.”
루드비히가 메마른 목소리로 담담히 사실을 선고했다.
한 번 더 망치를 써서 현재를 깨부수고 다른 가능성으로 도망쳐봤자, 여왕은 부서진 세계의 조각들을 먹고서 더더욱 강해진 채 나타난다. 그것은 이미 증명이 끝난 사실이었다. 여왕을 봉인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최대한 억눌렀는데도, 멸망한 세계 만큼이나 강대한 능력자들이 몇 명이고 생겼다.
그렇기에 결코 피할 수 없는 멸망인 것이다. 아마 다음 번에는 대전쟁에서 여왕을 봉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 이것이 마지막 분기점이다. 이대로 세상을 영원히 멈추는 것만이 모든 존재에게 허락된 유일한 안식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눈앞에 있는 스나크의 쓸데없는 고집으로 방해받고 말았다.
분명 똑같은 자기 자신일 텐데 왜 저렇게 말귀를 들어먹지 못하는 건가. 차라리 김유성이 그나마 나았다. 인정 못하겠다 악을 쓰든 말든 그냥 힘으로 박살내면 되니까. 저 용왕은 박살내도 박살내도 끊임없이 이쪽을 방해하려 튀어나왔다. 그건 정말로 질리는 걸 넘어서 공포가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모든 걸 보여줬다. 세상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마왕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큰 희생 위에서 만들어진 기적인지! 그걸로도 설득이 부족하나? 어떻게 해야 이해할 거냐, 네가 지금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이를 빠득 간 루드비히가 지수를 노려보았다.
“너 때문이다. 세상이 멸망하는 건….”
마녀의 사역마 이지수가 죽고 마왕 루드비히가 태어난 날.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결코 남의 탓을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맹세했다. 그랬던 루드비히가 처음으로 약한 말을 입에 담았다. 눈앞의 스나크 또한 자기 자신이므로, 이것은 남 탓이 아니다. 그런 유치한 자기합리화를 머릿속으로 되뇌이면서.
그렇게 원망의 말을 들은 지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당신은 나랑 똑같아.”
...처음에는 닮은 꼴이라고 생각했다.
루드비히는 사고방식도 행동하는 경향도 자신과 비슷했기에, 뭔가 통하는 것 같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한참 뒤 적으로 대면했을 때는 루드비히의 사상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닮기는커녕 외계인을 보는 듯한 감각까지 들었다.
마치 거울의 상처럼. 겉으로 보기엔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정반대라고. 결코 서로를 이해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지금 다시 바라보면 역시나 닮은 꼴이었다.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르고, 나는 누구와도 관련 없이 고고하다 외치고 있는 듯한 저 루드비히도, 결국 존재 자체가 남의 도움 위에서 성립하고 있을 뿐인 연약한 인간이다.
루드비히의 심상을. 그가 품었던 절망과 소망을 모두 두 눈으로 목격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이지수가 아니라 루드비히라고 아무리 주장해봤자, 그의 근본은 지수와 똑같았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오로지 등에 짊어진 것들의 차이가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 뿐. 지금의 지수라고 해도 같은 경험을 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를 설득시키고 싶은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과거 따위 보여주지 않는 편이 나았어. 그랬으면 당신의 소원을 짓밟기 미안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꺾여버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바람은, 최선의 선택이니 합리적인 판단이니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악역이다 흑막이다 하는 역할을 자처하면서 자기 자신을 상처입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바라는 소원은,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모두를 구해내는 해피 엔딩을 만들어내는 것.
지수의 눈동자에서 금색의 안광이 번쩍였다. 멈춰있는 세계를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건, 해석해서 깨뜨리고 말 것도 없이 지수의 심상을 강하게 퍼뜨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그것은 해석 능력을 각성하며 시작된, 지수가 걸어온 이 이야기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악마의 눈동자에 비친 세계를 바라보며, 그 암울한 풍경과 꼬여가는 일들에 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바로 다음 주인공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며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자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래도, 나는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어.”
이지수는 루드비히 베리야에프의 팬으로서, 그의 웃기지도 않은 연재 중단 선언을 정면에서 부정했다. 각성자가 초월자에 이르러, 순수하고 확고한 의지는 그것 자체로 현실을 변화시킨다. 바람이 춤춘다. 꽃잎이 흔들린다. 단단히 꽂혀있던 책갈피가 뽑혀나가, 세계의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한다.
루드비히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세계 전체를 정지시키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온갖 요소를 겹치고 겹친 끝에 성취해낸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것이 지금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이제 다시 멈추는 것은 어떻게 해도 불가능하다.
“스나크,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긴 하는 거냐…?”
목소리는 경멸을 넘어서 증오가 되어있었다. 모라토리엄은 끝나고, 모든 것은 미래를 향해서.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것으로 언제까지고 유예되어있던 멸망 또한 찾아온다. 그때 막지 못했던 악몽이 전 인류에게 평등하게 퍼뜨려진다.
무력감은 곧 탈력감이 되어 루드비히의 몸을 짓눌렀다. 세계의 마취는 풀려버렸다. 잠을 자다가 조용히 죽어버리듯이, 모든 게 멈춰있는 상태에서 인류를 안락사시키려던 계획은 영영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제 와서 망치를 휘두른다 한들 세상은 비탄과 절규에 잠긴 채로 깨져나가게 될 뿐이다.
“벨, 나는….”
또다시 최악의 형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내 그렇게 쓰러진 루드비히를 지수가 스쳐지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 나가며, 올곧게 앞을 바라보고서. 루드비히가 멍하니 뒤를 올려다봤을 때, 지수는 망치를 쥐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지수가 의아해하며 세계를 부수는 망치를 휙휙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