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때로는 옛 이야기를 (10) >
지수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칼끝을 겨눈 벨을 바라보았다.
분석한다. 그 한 가지 방면에 있어서, 지수는 독보적인 영역에 달해있었다. 김유성이 지닌 심안처럼 문답 무용으로 정답지를 들춰보는 행위가 아니라, 성실하게 과정을 적어나간 끝에 숨겨져 있던 진실을 도출하는 행위. 지수는 그것을 불편하거나 단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과 잘 어울렸다.
어차피 자신은 의심암귀에 씌어 있는 배배 꼬인 인간이다. 편리한 정답을 떡하니 던져줘봤자, 그게 정말로 정답일지 의심하느라 오히려 더 망설일 것이 틀림없다. 그럴 바에야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힘으로 분석해 추론하는 것이 편하다.
주인이라는 양반이 정신머리를 쏙 빼놓고 다니는 만큼,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머리를 잘 굴리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어떤 위험이든 미리 간파하고, 어떤 위기이든 돌파구를 찾아낸다. 비관주의에 찌들어있던 지수는, 벨과 함께하던 사이 어느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과신이었다. 분명 김유성의 연락에 위화감을 느꼈을 텐데도 자신은 벨을 데려와버렸다. 분명 이렇게 되기 전에 조금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도 자신은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려버렸다. 분석은 개뿔이. 그냥 얼간이였다.
그리고 이제 지수는 아무것도 분석할 수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지수가 벨을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겨누고 있다.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여야 하는데 그 한마디가 어떻게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벨이 조용히 말했다.
“네 손으로 끝내줘.”
그 말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폭약이 점화한 것처럼, 지수의 안에서 수십, 수백 가지의 말들이 동시에 터져 올랐다.
바보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너한테는 꿈이 있잖아. 죽도록 포기하기 싫어하던 녀석이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냐. 애초에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아직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십 초만 기다려봐 어떻게든 살아나갈 방법을 생각해볼게. 이런 웃기는 상황 따윈 예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잖아. 그때마다 살아남아 왔고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내가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어야겠냐? 침식을 막을 방법도 분명 찾을 수 있어. 그러니까 헛짓거리 말고 너는 그냥 가만히….
하지만 입 밖에 나온 것은 가장 한심한 한마디였다.
“난 못 해.”
지수의 얼굴은 완전히 울상이었다. 이빨은 딱딱 부딪치고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있었다. 벨은 적어도 지수의 손에 죽기를 바라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김유성이 벨의 목을 베어버린다. 두 가지 선택지의 어느 쪽도 지수는 선택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잔혹한 선택지를 제시당해도, 자신은 냉정히 더 나은 쪽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답이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니 곧장 이 꼴이다. 현실에서 도피한 채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하고, 제발 시간이 이대로 멈춰줬으면 좋겠다 빌고만 있다.
“...마음이 꺾였군.”
몇 발치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김유성이 말했다. 백마녀의 사역마. 이 짧은 시간에 초월자의 격에 달해, 최악의 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저 꼴이 된 각성자 따위는 결코 자신의 적이 될 수 없다. 김유성은 지수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거두었다.
“저 녀석은 그른 것 같고. 내가 끝내주지.”
그렇게 김유성이 검을 치켜든 순간 벨이 말했다.
“날 죽이면 백마녀는 다음 세대에 계승될 거야.”
김유성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말대로였다. 마녀라는 능력은 죽인다고 해도 다음 대의 마녀에게 능력과 지식이 계승된다. 흑마녀를 폭주시켜 세상을 하나로 만들려는 김유성과 루갈반다의 계획에 있어, 중요한 것은 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백마녀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영혼째로 찢어버리면….”
“그래 봤자 내 영혼만 손상될 뿐이야.”
벨의 말에 김유성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용사의 앞에서 거짓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벨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벨을 죽인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내 얼굴을 팍 찌푸린 김유성이 물었다.
“그럼 뭐 다른 방법이란 게 있기라도 한 거냐?”
“지스를 유지시키고 있는 건 내 존재 그 자체야.”
벨이 목소리를 꺼내는 것도 힘들어하며 말했다.
“흑마녀의 오의가 다른 존재를 자신의 안에 받아들이는 거라면, 백마녀의 오의는 자신의 존재를 다른 곳에 나누는 것… 이론상 무생물이라고 해도 내 사역마로 만들 수가 있어.”
보통의 사역마 계약과는 원리 자체가 달랐다. 평범한 마법사들처럼 마력을 품은 박쥐나 불도마뱀 괴물 따위와 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줌으로써 말 그대로 주인에게 귀속된 사역마로 변생시킨다. 배신 따위의 걱정은 요만큼도 없는, 말 그대로 백마녀의 분신 같은 존재.
“대충 알겠군. 그렇게 만든 사역마에 네 존재력인지 뭔지 하는 걸 남김없이 전부 다 쏟아버리면, 너는 계승이고 뭐고 될 틈도 없이 세상에서 깨끗이 증발해버린다는 건가.”
이야기를 따라잡은 듯 김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마녀의 오의에 대해서는 지금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원리 자체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알았다. 그러면 빨리 사라져주지 그래. 지금은 시간이 없어. 이러고 있는 중에도 여왕에게 세상이 갉아 먹히고 있다.”
“...나 스스로는 불가능해. 양도하는 도중에 힘이 다해서 멈춰버릴 테니까. 제대로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야.”
김유성이 눈을 부라렸다. 이번에도 거짓은 없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흑마녀 안에서 세계가 하나로 안정되기 위해선, 불순물인 백마녀는 사라져야만 한다. 백마녀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리고 벨이 미약한 마력을 몸에서 발현했다.
“지스. 일어나서 단검을 쥐어.”
“이봐. 저 녀석은 이미….”
재기불능이다. 완전히 절망했다. 단검을 쥐긴커녕 제대로 걷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던 김유성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무리 봐도 자신의 의지로 보이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명백히 어떠한 지배력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무슨 수로?’
그렇게 생각한 김유성은 곧이어 실소를 흘렸다. 애초에 무슨 수를 쓸 필요도 없다. 저 주종이 워낙 허물없이 지내는 탓에 잊고 있었지만, 사역마를 주인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지수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꼭두각시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벨이 들고 있던 단검을 잡았다.
“명령하는 건 서투르지만, 똑바로 들어줘.”
“하지 마….”
텅 빈 눈동자의 지수가 말했다. 무엇을 시킬 셈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단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게 할 셈이다. 그런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역마인 지수의 몸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려 했다. 지수는 벨을 바라보았다. 절박한 시선을 받은 벨은, 그저 조용히 웃어 보였다.
“내가 말했었던가? 벨은 이름이 아니라 애칭이라고.”
이런 상황에서도 벨은 아무래도 좋을 화제를 꺼내고 있었다. 마치 식사 시간에 빵을 한 움큼 베어 물며 말하는 듯한 일상적인 어조였다. 김유성은 방해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마지막 대화쯤은 충분히 나누게 해주자, 따위의 감상이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섣불리 끼어들다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백마녀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내 이름은 아무한테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백마녀는 대대로 신비주의였다느니 뭐니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나는 마녀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거든. 내 이름을 알린다면, 사람들이 아 그 마녀, 가 아니라 아 그 작가, 하고 떠올릴 수 있게.”
지수가 텅 빈 눈동자로 벨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이야기였다. 벨은 죽는다. 벨뿐만이 아니라 모두 죽을 것이다. 만에 하나 김유성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해도, 그곳에 이미 개개인의 이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벨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실 알고 있었지? 나한테는 재능이 없다는 거.”
벨이 툭 던진 질문에 지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세상이 개판이고 말고 이전의 문제다. 벨에게는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이 요만큼도 없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유명한 작가가 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지스 넌 언제나 합리적이지 않다느니, 불필요한 일이라느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삼았지만, 애초에 작가가 되려는 꿈 같은 건 그만두라 말리는 편이 합리적이었을 거야. 하지만 지스 너는 그러지 않았어. 마지막까지 같이 꿈을 꿔주었어.”
그리고 휙 고개를 든 벨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지스 너한텐 재능이 있는 거야.”
아니다. 재능 같은 것은 없다. 자신은 이 세상 제일가는 머저리에 천치다. 그런 지수에게 벨은 그렇지 않다고 다시 부정하며, 지수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재능이.”
그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기쁘다는 듯, 밝게 웃는 얼굴은 해바라기를 연상시켰다. 그 표정을 본 지수의 눈동자에 빛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지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건 정말로 이쪽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수많은 각성자들의 능력이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스 너는 분석을,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 능력만을 갈고닦았어. 이런 세상에서도, 지스 너는 폭력으로 뭔가를 해결하는 게 싫었던 거야…. 나는 그게 무척이나 기뻤어.”
오해다. 그건 그냥 자신이 기분 나쁜 음침이여서 그런 것일 뿐이다. 정말로 남을 다치게 하기 싫어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였다. 인간은커녕 몬스터조차 죽이길 꺼려 해서 잠깐 동안 잠들어 있으라고 어루만지는 것이 바로 너였다. 지수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말 없는 오열만이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지수의 몸이 움직였다.
소름 끼치는 감촉과 함께, 단검이 벨의 심장을 찔렀다.
“주인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야, 지스.”
벨의 심장을 찌른 단검에서 새하얀 마력의 격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벨의 존재성 그 자체였다. 단검은 벨의 존재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증발해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리고 백마녀의 존재를 기반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사역마가, 백마녀 없이도 혼자서 활동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눈부시게 터져 나온 빛에 김유성이 한쪽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건 단순한 에너지의 양도가 아니었다. 천천히, 지수의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되어갔다. 김유성은 곧바로 깨달았다. 새로운 백마녀가 탄생하고 있다.
“이젠 네 것이 될 내 이름은, 베리야에프.”
새하얀 빛이 되어 사라지기 직전, 벨은 지수에게 속삭였다.
"멋진 주인공이 되어줘…."
그리고 빛이 사그라들었다. 벨이 입고 있었던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녀의 존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있었다.
지수가 건네받은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벨이 가지고 있던 아지랑이의 성도, 이야기의 정령도, 그녀가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있던 습작 소설도 백마녀로서의 지식과 능력, 이름도 전부. 이제는 벨이 아니라 지수의 것이 되었다.
“어이가 없군. 백마녀 자식, 웃기는 짓을…!”
속았다는 걸 깨달은 김유성이 우선 지수의 사지를 찢어놓으려 한 발자국 앞에 나선 순간, 차가운 얼음이 등에 닿은 듯한 오싹함이 느껴졌다. 김유성이 멈추었다. 망설임 따위의 감정은 진작에 갖다버린 김유성이 한순간 공격을 주저해버릴 만큼, 심안에 비치는 감정은 거대한 절망을 품고 있었다.
지수를 중심으로 일렁이고 있는 은빛 마력은 무엇보다도 불길했다. 김유성이 오한을 느낀 것과 동시에, 아래쪽에서 루갈반다가 날아왔다. 자신이 함께 싸우지 않으면 김유성이라고 해도 위험한 상황이라고, 시초의 용왕은 판단한 것이다.
그런 용사와 용왕을 앞에 두고, 지수는 아주 침착했다.
“멋진 주인공이 되라고….”
그런 것 따위 가능할 리가 없었다.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역마다. 꿈을 이루는 걸 도와주겠다 해놓고, 결국 주인을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지스라고? 주인을 지키는 방패라고?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자신은 왜 이렇게 비참하고 아무것도 못 하는 팔푼이인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다른 존재로 거듭나면 된다.
한심한 자신 따위 버려 버리자. 멋진 주인공이 되라고 명령받았다면, 그에 걸맞은 존재가 되면 그만이다. 하지만 멋지다는 게 뭐지?
아주 잠깐 곰곰이 생각한 지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언젠가의 날에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대화들이었다.
-오페라인지 뭔지, 저 인간들은 왜 저렇게 치렁치렁한 망토를 걸치고 다니는 거야? 가면은 왜 쓰는 건데?
-네 소설. 왜 배경은 러시아인데 사람들 이름은 독일식이지? 평소에 이렇게 연기하는 말투로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기술 이름 같은 건 쓸데없이 왜 외치는 거야?
트집 잡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소한 지적. 그런 배배 꼬인 자신의 질문에, 벨은 분명히 그렇게 대답했었다.
-멋있잖아!
“그렇군.”
그런 것이 멋있는 거라면, 요구에 맞춰 그렇게 될 뿐이다. 한 걸음 내딛는 지수의 몸에 새까만 망토가 덧씌워졌다. 찰랑거리는 은발의 머리에는 화려한 무늬의 가면. 목소리는 연극배우처럼 중후하게, 손짓과 발짓도 과장을 섞어가며 우아하게.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새하얀 백지. 되고 싶은 자신을 써 내릴 수 있는 장래희망의 종이였다. 이것 또한 백마녀의 능력 중 하나라고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지수가 바란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다시는 실수 따위 하지 않도록. 아무리 바보인 자신이라도 눈치챌 수 있도록, 슬쩍 바라만 봐도 분석을 끝마치고 이해까지 시켜주는 ‘멍청이를 위한 능력’.
그것은 이미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될 능력이었다. 세상 만물을 분석하는 걸 넘어 해석해버리는 힘.
“비켜.”
지수가 뚜벅뚜벅 걸어가며 김유성을 스쳐 지나갔다. 이미 김유성이니 루갈반다니 하는 것은 지수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미 벨은 죽어버렸고, 저런 녀석들 따위 뭘 하든 아무래도 좋았다. 해석 능력을 얻게 된 지금, 지수의 시야에 비치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세계를 부수는 망치.
저것으로 세상 자체를 조각조각 부숴버리면, 모든 걸 다시 조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용사의 직감이라는 것이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위협을 느낀 것일까, 눈을 번쩍 뜬 김유성이 살의에 가득 찬 채 지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역마!”
검을 치켜든 김유성의 몸에 금빛의 폭풍이 휘감겼다.
지수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이미 김유성이 어떻게 할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전부 해석이 끝난 상태였다. 이내 지수의 몸 주변에서 이질적인 은색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제발 이대로 그만. 그대로 멈춰서, 이 소중한 순간들을 빼앗아가지 말아 달라는, 이뤄지지 못했던 소망. 그것만이 지금 지수의 마음에 가득 차 있었다.
“쇼 스타퍼.”
김유성은 어디 한번 해보자며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루갈반다가 재빨리 입으로 김유성을 낚아채 저 멀리 날아올랐다.
그건 김유성을 구해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며 화를 내던 김유성이었지만, 지수의 주변 광대한 영역 안의 모든 것이 멈춰버린 광경을 보고서는 말을 잃어버릴 뿐이었다. 지수를 내려다보는 루갈반다가 김유성에게 말했다.
“…최악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네 예상이 맞아떨어졌군. 저건 이미 일개 사역마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사역마라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마(魔). 세상을 구하려는 용사를 쓰러뜨리고, 세상 그 자체를 부수려고 드는 존재.
"마치, 마왕이다…."
그리고 이를 가는 김유성이 지수를 쳐다보았다.
“이지수!”
“아니야.”
가면을 쓴 지수가 피식 웃었다. 저 잘나신 용사님께서 자신을 ‘사역마’가 아니라 제대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수에겐 그런 이름으로 불릴 자격도, 불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한심한 자신과는 이별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지금부터의 자신은, 그래.
눈을 감은 벨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등에는 멋있는 망토를 두르고, 언제 어디서나 필요할 때에 나타나는. 무리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이것저것 전부 다 지켜내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
이 세상에도 그런 주인공이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루드비히.”
지수는 그제야 떠올렸다. 배경은 러시아인 주제에 주인공 이름은 독일어였던, 벨이 쓴 뻔하디뻔한 편의주의적 영웅담의 주인공 이름을. 그리고, 자신이 선물받은 벨의 진짜 이름을. 지수는 새까만 망토를 펄럭이며 자신의 이름을 댔다.
“루드비히 베리야에프다.”
가면 속에서, 삼라만상을 해석하는 안광이 빛났다.